[소린빌보] 17minute.
이 곤혹스러운 감정을 어쩌면 좋을까.
소린의 손이 저절로 찌푸려진 미간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는 최대한 자신의 당혹스러운 감정을 평정심으로 포장하며, 침착한 저음으로 눈앞의 스무 살짜리 신입생을 향해 말했다.
"빌보, 여기는 내 직장이자 네 학교야."
"그런데요?"
"그리고 17분 뒤면 난 강의를 하러 가야 하고, 넌 그 수업에 출석해야만 하지."
빌보는 소린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순식간에 메고 있던 크로스 백을 소린의 책상에 벗어 올려두고 겁도 없이 자신의 블랙진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갔다. 소린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가득 물들었고, 그 표정을 확인한 빌보의 눈가에 승리를 확신하는 웃음이 지어졌다.
"역시, 아저씨도 날 좋아하는 게 확실해."
"학교에서는 교수님이라고 불러야지, 빌보."
소린이 진지하게 지적을 하거나 말거나, 빌보는 입고 있던 붉은색 가디건을 벗으며 소린의 연구실 책상에 올라탔다. 혹여 이런 모습이 다른 학생에게 목격되면 큰일인데. 소린은 순간 연구실의 문이 잠겨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재빨리 창문의 커튼을 쳤다.
"이거 봐. 이미 할 마음이 가득하시네, 교수님."
"빌보."
"벌써 1분이 지났는데, 어떡할래요.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소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당돌한 아이로 키운 기억은 없었는데.
그는 7년 전 빌보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우연히 자신이 평소 지나던 산책로가 아닌 다른 동네의 공원 근처로 산책을 나왔던 봄날, 소린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다. 옅은 금발 머리의 소년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자마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빌보 배긴스. 소린은 그를 기다렸던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과연 빌보가 환생을 하긴 했을까, 자신이 만날 수 있는 곳 만날 수 있는 같은 시간대에 태어나기는 했을까. 그리고 마침내,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에 빌보의 환생을 만나고야 만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환생한 빌보는 아무리 많이 봐줘도 열세 살, 자신은 그보다 열일곱 살이 많은 서른이었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래, 생각해보면, 전생에서도 꽤 나이 차이가 나는 편이었긴 했지.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또 달랐다. 소린은 일단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켜 빌보를 향해 다가갔다. 소린은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조심스레 빌보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이야 빌보."
"누구세요?"
이럴 수가. 소린의 표정이 마치 에레보르를 잃었을 때와 같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변했다.
빌보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열세 살의 빌보는 소린을 그저 위험한 아저씨를 대하듯이 경계하며, 언제라도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린은 우선 전생이니 호빗이니에 대한 설명보다도,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해명을 먼저 해야만 했다. 어쨌든 소린은 그저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로 빌보의 주변을 맴돌며 빌보의 기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렇게 7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빌보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소린은 대학의 시간강사에서 부교수가, 빌보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있었다. 첫 만남 이후부터 소린을 잘 따르던 빌보는 부족한 성적에도, 기어코 소린이 일하는 대학교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빌보의 부모님은 이웃에 교수님이 있는 덕분에 빌보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셨다고 마냥 기뻐하셨지.
아, 빌보의 부모님. 그분들에게는 뭐라고 사죄의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까.
소린이 지난 일들을 회상하는 와중에도 빌보는 후다닥 셔츠의 단추를 푸르고 있었다. 소린의 머리는 더욱 지끈거리며 아파졌다. 그래서, 빌보가 좋으냐 싫으냐를 따지면 당연히 좋았다. 그것도 미칠듯이. 이제는 미성년자도 아니고. 하지만 나이 차이와 도덕적인 잣대가. 소린은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빌보는 답답하다는 듯이 소린의 손을 잡아당겨, 그의 얼굴을 드러나게 하고 보란 듯이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푸르며 말했다.
"소린, 이제 15분 남았어요."
빌보에게 잡힌 손목이 데일 듯이 뜨거웠다. 훤히 드러난 빌보의 하얀 피부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소린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침을 삼켰다. 소린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잠시 흘끗 내려다보고는 결심한 듯이 넥타이를 잡아 끌렀다. 순식간에 빌보의 손목을 잡아채 연구실 책상 위에 그대로 뒤집어 눕혔다. 막상 소린의 태세전환에 놀랐는지, 빌보가 동그랗게 놀란 눈을 뜨며 소린을 올려다보자, 소린의 눈빛이 맹수의 눈빛처럼 빛났다.
남은 시간은 14분,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천국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하지만 그 끔찍하고 황홀했던 14분이 지나고, 빌보가 본 것은 천국만이 아니었다. 전생을 전부 기억해낸 빌보가, 열세 살짜리를 눈독 들였던 도둑놈이라며 소린의 맨등짝을 매섭게 후려쳤고, 결국 그들은 강의에 나란히 10분쯤 지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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