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Love In Tolkien 上
Love In Tolkien
上
빌보는 생각했다. 만일 자신의 부모님 중 한쪽이라도 열혈 톨키니스트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들이 톨킨 동호회에서 만나 결혼하여, 자신의 이름을 빌보 배긴스라고 짓지 않았다면.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따온 빌보 배긴스가 호빗이 아니었다면! 아니면 제 키가 조금이라도 더 컸더라면, 지금의 이런 수모를 겪지는 않았을 텐데.
"어이 호빗! 오늘은 또 어디로 모험을 떠나시나?"
"닥쳐. 네 얼굴에 강속구를 꽂아버리기 전에."
빌보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같은 반의 사내애들을 윽박질러보았지만, 그들은 그저 가소롭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으며 빌보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이런 일은 빌보에게 매우 흔한 일이었다. 빌보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달려가,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그의 어머니를 향해 여느 때처럼 투정을 부렸다.
"왜 하고많은 종족 중에 호빗이에요? 차라리 저쪽 동네 레골라스처럼 엘프 이름을 붙여주던가! 분명 내 키가 자라다 만 건, 다 이름 때문일 거야."
빌보의 어머니, 벨라도나는 빌보가 던져놓은 가방을 대수롭지 않게 챙겼다. 그녀에게도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닌지라, 그녀는 자신의 심통 난 아들을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
"하지만 옆집 소린은, 난쟁이의 이름을 붙였는데도 키가 크잖니? 네 키가 더이상 자라지 않는 건 성장판 탓이지, 호빗의 이름을 붙여준 탓이 아니란다."
소린!
빌보는 자신의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동갑내기 이웃 사촌의 이름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그 녀석만 아니었어도 빌보가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을 텐데. 빌보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오르는 계단을 쿵쾅쿵쾅 걸어 올라갔다. 뒤에서 간식을 챙겨가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지금은 간식 따위를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17살 빌보 배긴스. 그는 톨킨이 싫었다. 톨킨은 왜 호빗이라는 종족을 만들었으며, 그 호빗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빌보의 부모님은 열렬한 톨킨의 팬이었다. 그들은 특히 호빗 종족을 좋아해서, 자신들이 아이를 낳는다면 꼭 빌보 배긴스와 프로도 배긴스라고 짓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들의 성은 배긴스가 아니지만, 빌보와 프로도의 미들네임을 배긴스로 짓고 성을 거의 부르지 않는 방법으로 그들의 계획을 완성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들은 뛸 듯이 기뻐했고, 마침내 빌보의 동생에게 프로도 배긴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가지 유감인 건 프로도는 딸이었다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아직 4살이라, 자신의 이름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늘 불만 가득한 건 빌보였지.
빌보의 불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빌보의 부모 같은 정신 나간 마니아가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온라인 톨킨 동호회에서 만난 그들은 아예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한 마을에 모여서 지내기로 약속했고, 그 결과 빌보의 마을에는 유난히 특이한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 이웃 마을의 레골라스나, 세집 건너 이웃에 사는 갈라드리엘 누나나, 아랫동네에 살고있는 김리나. 전부 부모님이 그 톨킨 동호회에서 만나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빌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건 바로 옆집에 사는 소린 오큰쉴드였다. -물론 오큰쉴드는 미들네임이다- 그 녀석의 가족들은 빌보가 9살일 때 이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하필 빌보의 옆집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빌보는 소린과 강제로 친구가 되어야만 했다. 처음엔 빌보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남자아이가 옆집으로 이사 온다는 사실을 듣고 엄청난 기대를 품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줄 동지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뻤는지, 빌보는 소린을 처음 만나자마자 그의 손을 붙잡고 반짝이는 눈망울로 물었다.
"너도 네 이름이 싫지?"
"아니. 난 괜찮은데?"
소린의 무뚝뚝한 대답에, 빌보의 기대가 와장창 깨졌다. 알고 보니 그 녀석은 이미 어린이판으로 나온 호빗과 반지의 제왕을 읽었다고 했다. 물론, 빌보는 톨킨이 쓴 소설은 절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동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알고 보니 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 날, 빌보는 결심했다. 자신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톨킨의 책은 아무것도 보지 않을 것이며, 그 책을 원작으로 삼은 어떤 영화나 게임도 절대 가까이하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9살 여름, 빌보의 고독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빌보의 싸움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빌보가 아무리 알고 싶지 않아 해도, 주변인들의 참견으로, 빌보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호빗>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습득할 수밖에 없었다. 빌보는 7살 때부터 영국 안에 몇 없는 리틀야구단에서 투수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피칭을 할 때마다 호빗들이 열매 던지기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어야만 했다. 빌보의 키는 생각보다 잘 자라지 않아, 언제나 또래 아이들보다 작았는데 그 덕에 호빗이 키가 인간의 반밖에 되지 않는 종족이라는 정보도 알 수 있었지. 하지만 그런 것쯤은 참을 수 없었다. 빌보가 참을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는데, 바로 소린과 빌보가 소설 속에서는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는 사실이었다.
9살 여름의 첫 만남 이후로, 그 녀석은 한결같이 재수가 없었다. 딱히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빌보처럼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녀석은 언제나 여자애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얼굴? 빌보는 자신의 얼굴도 전혀 꿇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키는 비록 조금 작지만, 자신이야말로 위트있는 스포츠맨에 성적도 나쁘지 않은데 왜 여자아이들은 언제나 소린을 더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소린은 언제나 무게를 잡고 폼잡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였다. 아마도 멋진 척을 해서 여자애들의 인기를 끌려는 수작이겠지. 여자애들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사실 소린은 집에서 얌전히 톨킨 책이나 읽는 샌님이고, 가끔 자기 집도 못 찾아서 아닌 척하면서 내 뒤를 쫓아오는 길치라는 걸. 그러나 불행히 한살 한살 나이를 먹을수록, 소린의 키는 점점 커지고 몸집은 다부져졌으며 그를 향해 열광하는 여학생들의 수는 더욱 늘어만 갔다. 이따금 소린의 집 앞까지 따라오는 여학생 무리를 보며, 빌보는 집으로 달려와 흰 우유를 토할 때까지 마시며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빌보의 엄마, 벨라도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기 아들을 타일렀다.
" 빌보, 소린과 좀 사이좋게 지내는 게 어떻겠니. <호빗>에서 소린과 빌보는 정말 진실한 우정을 나누었단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관계였지만…. "
"그만해요 엄마. 난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알기 싫다구요!"
벨라도나의 톨킨이야기가 시작되면, 빌보는 귀를 틀어막고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올라가고는 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톨킨의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빌보만의 고독한 투쟁법이었다. 그렇게 빌보는 열일곱 살이 되었다. 빌보가 토할 때까지 우유를 마셔댄 보람도 없이, 그의 키는 어린시절보다 그다지 많이 자라지 않았고, 빌보의 학창시절에는 언제나 '호빗'이라는 별명이 따라왔다. 빌보는 침대에 몸을 던져 이불을 덮어쓰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사실 오늘따라 빌보의 기분이 최악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빌보가 자신의 야구인생의 마지막 피칭을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야구를 하기에는 빌보의 신체조건이나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빌보 자신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는 꿈같은 걸 품은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빌보는 지난 10년 동안 공 던지는 것을 꽤 좋아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야구를 더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뭐라도 원망하고 싶었던 것이다.
빌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였다. 이게 다 자신의 이름을 호빗으로 지은 부모님 때문이며, 호빗을 키가 작은 종족으로 설정한 톨킨 때문이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억지일지도 모르지만, 알게 뭐람. 내가 인생의 목표를 잃었는데. 빌보는 급기야 큰소리로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이제는 방과 후에 뭘 하면 좋을지, 주말에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자기가 키가 더 컸다면, 야구를 더 잘했을지도 모르는데. 바보 같은 톨킨, 바보 같은 호빗. 빌보는 그렇게 마치 떼쓰는 어린애처럼 한참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러다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빌보는 벌게진 눈으로 이불 밖으로 꾸물꾸물 기어 나왔고, 그때 빌보는 자신의 창문이 열린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옆집과의 간격이 넓지 않아서, 빌보의 방 창문과 옆집 창문은 가까이에 맞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주인은 소린이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소린이 자신의 창문 앞에 서서 빌보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빌보의 울음소리가 고스란히 들렸겠지. 빌보가 시뻘게진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소린은 그제야 아무 말 없이 커튼을 슬쩍 쳤다. 빌보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왠지 서운하고 서러웠다. 매정하게 커튼을 쳐버리다니.
'매정한 자식, 치사한 자식. 위로는 못 할망정. 시끄러우면 창문을 닫으면 될 거 아냐!'
빌보는 자신의 방 창문을 닫고, 자기도 커튼을 쳐버리고는 또다시 큰소리를 내며 울었다. 열일곱 살, 빌보는 그날 아마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그리고 빌보는 바로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씩하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방과 후에 늘 가던 야구클럽 대신 도서관을 향했고, 야외에서 운동하느라 까무잡잡했던 피부는 금세 하얗게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이따금 소린과 마주치기는 했지만 빌보는 고개를 팩 돌려 이웃 사촌을 외면했다. 소린은 종종 뭔가 빌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굳이 자신을 외면하는 빌보를 불러세우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도 없이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소린은 변했다. 원래도 작지 않았던 키가 부쩍 컸고, 예전보다는 덜 무뚝뚝한 남학생이 되었다. 여전히 여자애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게는 미소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고등학생이 된 소린에게는 언제나 여자친구가 있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소린을 볼 때마다, 빌보는 혀를 끌끌 차고는 했다. 매번 다른 여자들이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인데, 소린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책속의 소린은 평생 여자라고는 자기 여동생밖에 모르는 난쟁이였으니까. 반면 빌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책속의 빌보와 너무도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며 기뻐했다. 그랬다. 빌보는 전혀 여자친구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빌보는 그것 역시 톨킨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왜 자신만 톨킨의 저주를 직격으로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소린은 재수 없는 자식이고, 톨킨은 더욱 재수 없는 작가라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무시하며 자라오던 두 사람은 각자 기숙사가 딸린 먼 곳의 대학교에 진학했고, 서로 아무런 소식도 교류도 하지 않은 채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빌보가 22살이 됐을 무렵, 그는 소린을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만나고 말았다.
"빌보 배긴스?"
"소린 오큰쉴드?"
빌보는 등 뒤에 메고 있는 등산용 가방을 고쳐 매고, 소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완벽하게 등산에 걸맞은 옷차림을 한 자신과 달리 소린은 마치 산책하러 나가듯 가볍게 멋을 부린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빌보는 소린이 신고 있는 로퍼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린의 옆에 서 있는 가슴이 큰 미녀도 비슷하게 가벼운 차림인 것을 보니, 둘 다 등산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은 체다 협곡을 올라야만 했다.
"네가 산악동호회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뭐, 어쩌다 보니."
소린의 옆에 서 있는 여자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여자 때문에 취미에도 없는 모임에 따라온 것 같아 보였다. 소린은 여전히 그다지 자라지 않은 빌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야말로 산을 오를만한 체력이란 게 있어?"
"너보다는 튼튼할 테니 걱정 마시지."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소린을 향해 냉랭하게 돌아선 빌보는 자신의 일행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등산은 대학에 들어와 빌보가 가지게 된 새로운 취미였다. 런던근교에는 등산할만한 산이 없어서, 방학이 되면 마음이 맞는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꽤 멀리까지 산을 찾아오고는 했는데, 이곳에서 소린을 만날 줄이야. 빌보의 동기 중 한 명이 소린의 이름을 듣고 크게 웃었다. 아마도 그 녀석도 톨킨 덕후인 모양이지.
몇 년 전 개봉했던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 때문에 빌보의 이름은 어딜 가나 놀림거리였다. - 물론 빌보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 건, 이제 9살이 된 빌보의 여동생 프로도였지만 그녀는 아직도 너무 어리다. 빌보는 그나마 영화로 제작된 것이 <호빗>이 아니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물론 빌보는 <호빗>도 <반지의 제왕>도 읽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름을 <호빗>의 주인공에서 따왔고 프로도의 이름을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에게서 따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쨌든 대부분 학생들은 영화나 조금 알지, 톨킨의 원작소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빌보의 동기인 제임스가 소린의 이름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고, 빌보를 향해 다가와 말했다.
"참나무 방패 소린이랑은 무슨 관계야 호빗?"
"제임스, 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아, 미안. 빌보."
"...그냥 어릴 때 한동네에 살았던 녀석이야."
빌보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제임스는 멀리서 여자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린을 흘낏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소린이 제임스를 노려보았고, 제임스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성격 있네. 그보다, 빌보 배긴스와 소린 오큰쉴드가 한동네에 살았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평범하지 않은데?"
빌보는 자신의 어깨에 팔을 걸치는 제임스를 귀찮다는 듯이 뿌리치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우리 동네에 정신 나간 톨키니스트들이 많이 살아서 그래. 옆 동네에는 레골라스도 있고 김리도 있어."
"와우."
빌보는 더는 제임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답해주기 싫어, 배낭을 다부지게 메고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제임스인지 소린인지 모를 누군가의 시선이 빌보의 동그란 뒤통수에 꽂히고 있었지만,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등산하러 왔으니, 산을 오르는 데만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빌보는 열심히 앞만 보고 산을 올랐다. 비록 키는 작지만,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던 탓인지 빌보는 체력에는 꽤나 자신이 있었다. 그는 산을 오르는 것도 걷는 것도 전부 좋아했다. 잡생각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금세 잊히고는 하지. 빌보는 산의 중간지점에 올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오늘의 등반을 이끄는 리더, 매튜가 빌보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곧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어. 오늘은 이만 내려가는 게 어떨까?"
"오, 그래요. 아무래도 초심자들도 있고.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빌보는 아까 보았던 소린과 소린의 여자친구를 떠올리며, 매튜의 뜻에 동의를 표했다. 매튜가 빠르게 사람들을 체크하는 동안 빌보 역시 소린의 모습을 눈으로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소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빌보는 알만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나 마나 어디서 여자랑 노닥거리고 있겠군.'
빌보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지고 있었다. 바람둥이 자식. 차라리 어릴 때처럼 무뚝뚝하고,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않았을 때가 귀여웠는데. 빌보는 괜히 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를 발로 차다가, 소린의 여자친구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산에서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빌보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아 세우고 물었다.
"왜 당신 혼자예요? 소린은?"
빌보의 물음에 그녀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빌보의 팔을 뿌리치고는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모…. 몰라요. 아. 아까 없어졌어요."
"언제요? 어디서 마지막으로 봤죠?"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며, 마지 죄지은 사람처럼 빌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도망치는 소린의 여자친구가 영 수상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소린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빌보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근처에 소린이 있을지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또 어디서 길을 잃어버린 건가.'
빌보는 매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직접 소린을 찾으러 나섰다. 뭐 별일이야 있겠냐만, 혹시라도 자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매튜가 구조대를 불러주기로 했으니. 빌보는 능숙하게 산속을 돌아다니며 소린을 찾았다. 꽤 깊숙한 산속으로 왔는데도 소린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빌보도 조금씩 불안감을 느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소린! 소린!"
빌보는 급기야 소린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빌보는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소린의 이름도 싫어했기에 어지간한 일에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의사소통을 해결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린 오큰쉴드! 내 말 들리면 대답 좀 해!"
어느새 주변엔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산 속까지 들어왔다.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혹시 소린은 이미 산밑에 내려가 있는데, 자신만 헛고생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자식을 만나자마자 코뼈를 부러뜨려버려야지. 빌보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소린의 여자친구가 소린을 마지막으로 어디에서 봤는지 제대로 설명만 해줬다면, 그를 찾기가 수월했을 텐데. 빌보는 가슴만 크고 별로 매력도 없어 보이던 그녀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때, 빌보가 서 있는 바위 아래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빌보는 혹여나 빗물에 미끄러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천천히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래를 확인한 빌보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소린!!"
바위 아래쪽에는 소린이 정신을 잃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져있었다.
<계속>
톨킨덕인 부모님 때문에 호빗의 이름을 가지게 된 빌보가 톨킨을 향해 반항하는 내용입니다.
나중에 쓸 차원이동물(?)인 Lost in Tolkien의 프리퀄같은 이야기인데, 유쾌하게 읽어주세요.
(이야기의 배경은 반제 영화가 개봉한 이후, 호빗은 아직 개봉하기 이전 시점입니다)
'호빗(Hobbit) > 러브인톨킨(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린빌보] Love in Love (2) | 2015.04.11 |
---|---|
[소린빌보] Love In Tolkien 下 (4) | 2015.03.09 |
[소린빌보] Love In Tolkien 中 (2) | 201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