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러브인톨킨(完) 15. 3. 7

[소린빌보] Love In Tolkien 中

 [소린빌보] Love in Tolkien



Love In Tolkien




 소린은 생각했다. 만일 소린의 부모님이 톨키니스트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들 자식의 이름을 소린 오큰쉴드라 짓지 않았더라면, 아니. 차라리 자신이 톨킨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자신이 이사를 갔던 옆집에 빌보 배긴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만 살지 않았어도, 자신은 평범한 연애를 할 수 있었을 텐데.


 9살의 소린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빌보가 그저 신기했다. 소린은 7살 때부터 어린이용 <호빗>을 읽으며 자라왔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난쟁이 왕자가 동료들을 데리고 펼치는 모험은 한 어린 남자아이를 책속세계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소린이 마음에 들어 한 건,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드워프 왕자보다는, 빌보 배긴스라는 이름을 가진 씩씩한 호빗이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던 호빗이 온갖 위기를 재치있는 꾀와 용기로 헤쳐나가는 모습은, 일곱 살 소린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래서 자신의 이웃집에 살고 있다는 빌보 배긴스를 소개받자 온몸이 긴장과 설렘으로 굳어, 그 아이를 향해 여유 있게 웃어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빌보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소린의 두 손을 덥석 잡고 드디어 첫마디를 건넸다.



"너도 네 이름이 싫지?"


"아니. 난 괜찮은데?"



그리고 소린은 한 아이의 표정이 얼마나 빠른 시간안에 험악하게 변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빌보가 자신의 이름을 싫어하며, 톨킨의 책은 단 한 번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린의 부풀었던 마음이 산산이 조각났다. 소린은 진심으로, 마음 깊이 좌절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호빗과 똑 닮은 이웃집 또래 친구가 <호빗>을 싫어하다니. 소린은 빌보가 하루빨리 중간계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에, 틈만 나면 빌보를 따라다니며 책을 같이 읽자고 제안했다. 불행히도, 빌보는 그런 건 재수 없는 샌님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서보다는 야외에 나가서 캐치볼이나 야구연습 따위를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처음엔 빌보의 성격이 자신이 생각했던 책 속의 빌보와 달라서, 소린을 적잖이 당황했었다. 하지만 이웃 사촌으로 지내면서 지켜봐 온 빌보는 <호빗>에 나오는 빌보 배긴스 그 자체였다. 다소 난폭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던지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리틀 야구단에서 투수로 꽤 오랜 시간을 활동했다. 결정적으로 빌보의 몸집은 언제나 소린보다 조금씩 작아서, 보면 볼수록 책 속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호빗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빌보는 소린이 자신을 내려보는 것을 언제나 불쾌하게 여겼다. 그래서 키를 키우겠다며 흰 우유를 토할 때까지 마시는 바보 같은 짓을 몇 년이나 지속했지. 어쨌든 소린은 빌보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빌보가 워낙 소린을 향해 틱틱거리는 탓에, 주변에서는 두 사람의 교우관계를 늘 걱정했다. 소린의 부모님은 언제나 말했다. 책 속의 소린과 빌보는 처음엔 아니었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진실한 우정을 나눈 친구가 되었다고. 소린 역시 자신도 언젠가는 빌보와 진정한 친구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열네 살, 뒤늦은 사춘기 때 소린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날은 언제나와 같은 오후였다. 평소 소린을 고깝게 보던 같은 학교의 남자 녀석들이 대뜸 소린을 불러냈다. 그들은 요새 들어 부쩍 키가 커진 소린에게 쏟아지는 여자아이들의 관심이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소린이 평소 책만 읽고 말 수가 적은 조용한 학생이었기에, 더욱 만만히 보였던 모양이었다. 무리 중 한 녀석이 소린의 어깨를 툭툭 밀치며 말도 안되는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뭐, 이사를 하라나? 소린은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정도의 겁쟁이도 아니었다. 소린이 주먹을 쥐고 자신의 눈앞에서 이죽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향해 강펀치를 날릴 타이밍을 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빌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치사한 자식들이…! 한 명한테 여럿이 덤비는 법이 어딨어!"


 빌보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소린의 어깨를 치고 있던 녀석의 얼굴로 강렬한 발차기를 날렸다. 빌보의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매우 엉망진창인 싸움이 벌어졌다. 물론 더 많이 얻어맞은 쪽은 이쪽이었다. 빌보와 소린은 둘이었고, 그들은 여섯 명이었기에. 게다가 빌보는 생각보다 싸움을 잘하지 못했다. 호빗은 역시 열매나 잘던지는 종족이었던 것일까. 그 녀석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빌보의 얼굴은, 소린이 지금껏 봤던 빌보의 얼굴 중에서 가장 못생기고 엉망진창이었다. 소린은 빌보의 얼굴을 보자 속상한 마음이 들어 괜스레 퉁명스럽게 말했다.



"싸움도 못하는 게 뭐하러 끼어들어."


"그래도 너 혼자 다 맞을 거, 내가 반 덜어줬잖아. 고마운 줄 알아."



 인생 최악의 못생긴 얼굴을 한 빌보가, 그 멍들고 퉁퉁 부은 얼굴로 소린을 보면서 씩 웃자, 소린의 가슴에 망치로 후려친 듯한 충격이 가해졌다. 그 순간 소린은 깨달았다. 빌보와는 앞으로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소린에게는 엉뚱하게도 진실한 우정이 아닌, 첫사랑이 찾아와버린 것이었다.


 소린은 그날 이후 한동안 빌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 빌보를 피해 다녔고, 빌보는 의리도 없는 자식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소린의 속내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엔 소린은 아직 어렸고, 그가 꿈꿔왔던 호빗과의 우정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소린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우정'으로 되돌리기 위해 무던히도 많은 노력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빌보를 보면서 헤벌레한 웃음을 짓지 않도록 무뚝뚝한 표정을 더욱더 유지했고, 더 이상은 빌보를 따라다니며 <호빗>을 읽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소린은 노력했고, 혼자만의 노력은 무려 3년이나 지속되었다.


 하지만 열일곱 살의 어느 날, 소린은 자신의 마음은 어떻게도 우정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구를 그만두게 된 빌보가 그의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남몰래 엉엉 울던 그 날, 소린은 자신의 방안에서 가만히 앉아 빌보의 울음소리를 한참이나 들어줬다.  어떻게 이 마음이 우정일 수 있을까. 그의 울음소리를 듣기만 해도,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찢어질 듯이 아픈데. 소린은 당장 빌보의 방으로 건너가, 그를 끌어안고 위로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소린은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빌보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연인이 된다? 그건 골룸이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 나즈굴의 목을 베는 것보다도 더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빌보는 소린을 친구로도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창문 밖으로 소린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빌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린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소린은 씁쓸하게 돌아서며 자신의 방 커튼을 쳤다. 그렇게 소린은 우정도, 사랑도 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꽁꽁 가뒀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할 걸 그랬어."



 소린은 자신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자신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죽기 전에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었다면 단연 그것이었다. 빌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한 번도 제대로 꺼내놓지 못했던 것. 소린은 열일곱 살의 그날 이후로 꽤 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여자친구를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녀들에게 흥미를 느낄 수 없었고, 소린에게는 바람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따라붙었다. 오늘 우연히 빌보를 마주쳤던 그 순간에도, 소린의 곁에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소린의 여자친구는, 깊은 산 속에서 소린과 둘만 남게 되자 갑자기 저돌적으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소린이 당황하여 뒷걸음쳐도, 그녀의 맹공은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그녀에게 떠밀린 소린이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그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내빼버렸다. 아마도 자신이 소린을 죽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멍청하긴. 소린은 혹시라도 그녀가 도망친 게 아니라, 구조를 요청하러 간 것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었지만, 벌써 두 시간째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정말 달아난 모양이었다. 소린은 이대로 자신이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마지막으로 빌보 얼굴이 보고 싶다.'



 소린은 고통 속에서 눈을 감으며, 오늘 산을 오르기 전 보았던 빌보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전히 귀여웠지. 죽기 전에 키스라도 해봤으면 좋았으련만. 빌보는 아마 여전히 여자친구가 없겠지. 키스도 당연히 못 해봤을 텐데. 점점 소린의 의식이 아득해지며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빌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제는 환청까지.'



 이건 자신의 이웃집에 사는 빌보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소린이 어린 시절부터 읽어오던 책속의 빌보 배긴스의 이름일까. 어쨌든 마지막 죽어가는 길에 빌보의 목소리가 함께한다는 사실은 썩 나쁘지 않았다. 소린은 그렇게 정신을 잃었고 그가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자신의 침대맡에 엎드려있는 빌보의 작은 뒤통수였다.



'천국인가'



 소린이 손을 움직여 빌보의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자, 빌보가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천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빌보는 소린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하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것 봐. 산에 오면서 로퍼를 신고 올 때부터 내 이럴 줄 알았지. 바보같이 추락이라니."


"네가 날 구해준 거야?"



 소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빌보를 바라보며 물었다고, 빌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실 빌보가 직접 소린을 업고 끌어올린 건 아니었지만, 소린을 발견하고 구조대에 알렸으니, 빌보가 소린을 구했다고 말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빌보는 이런 상황이 머쓱한지, 되려 퉁명스럽게 소린을 향해 말했다.



"나한테 목숨을 빚졌으니, 나중에 갚아."


 그리고 순간 소린의 마음속에 찌르르하고 짧은 전율이 흘렀다. 빌보가 또 한 번 자신을 구했다. 그리고 소린에게는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죽는다고 생각했던 순간, 가장 후회했던 일을 다시 한 번 되돌릴 기회. 소린은 홀린듯이 빌보의 동그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말했다.


"갚을게. 지금"


쪽-



소린이 빌보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빌보는 화들짝 놀라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이 미친놈이! 뭐 하는 거야! 이게 빚을 갚는 거야?"


"왜, 부족해?"



 소린은 다시 한 번 빌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부딪혔다. 이번엔 좀 더 길고 부드럽게. 당황한 듯한 빌보가 소린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여전히 단단하게 빌보의 볼을 감싸고 있는 소린의 두 손은 빌보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소린의 혀가 부드럽게 빌보의 아랫입술을 쓸어올리고, 벌어진 잇새 사이로 침범했다. 빌보는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는듯한 난생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빌보의 모습을 슬쩍 바라본 소린은 빌보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한쪽 손을 움직여 그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빌보는 찌릿찌릿한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짧게 아!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소린이 가만히 웃으며 빌보를 향해 더욱 집요한 키스를 퍼부으려는 찰나, 빌보가 정신을 차린 듯 소린을 세게 밀치고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는 빌보의 모습을 보자, 소린은 지난 시간 자신의 바보 같았던 세월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진작 이럴 것을. 빌보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소린이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빌보는 분에 못 이겨 소린이 누워있는 병원 침대 다리를 퍽퍽 차며 날뛰었다.



"정신 나갔어? 떨어질 때 머리라도 다친 거야?"


"아니."


"근데 왜 키스는 하고 지랄이야!"


"네가 좋으니까."




 소린의 뜬금없는 고백에 빌보의 모든 사고회로가 순식간에 정지했다. 소린은 빌보를 빤히 바라보며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빌보는 필사적으로 작은 머리통을 굴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도망치자.



 빌보는 소린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부리나케 병실을 빠져나갔다. 야구경기에서 도루를 할 때보다 더 빠르게 달려가는 빌보의 뒷모습을 보며, 소린은 크게 웃었다. 큰맘 먹고 고백을 했더니, 대답도 안 하고 도망쳐? 과연 빌보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린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소린은 빌보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고, 빌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소린이 스스로 포기하고 마음을 덮어두고 있던 어린 시절과 지금은 달랐다. 빌보를 향한 마음을 인정하고 그를 가지기로 결정한 이상, 소린 오큰쉴드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는 법. 게다가 키스할 때 보였던 빌보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미션도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역시 첫키스였겠지..?"



 병원 침대에 드러누우며 소린은 생각했다. 다친 게 빠르게 회복되도록, 당분간은 얌전히 병실에 누워있어야지. 그리고 건강해지면, 빌보를 찾아가 끊임없는 애정공세를 퍼부어야지. 때로는 달콤하게, 가끔은 격정적으로. 소린은 곧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를 품으며, 병실에서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계속>




모던AU/대학생AU

두편이 될줄 알았는데, 3편으로 잘리네요.

이번엔 소린 시점으로:) 

'호빗(Hobbit) > 러브인톨킨(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린빌보] Love in Love  (2) 2015.04.11
[소린빌보] Love In Tolkien 下  (4) 2015.03.09
[소린빌보] Love In Tolkien 上  (2) 2015.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