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연재] Lost in Tolkien <1>
Lost in Tolkien
<1>
첫 연애라는 것은 모름지기 서툴고 풋풋하며, 서로에 대해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아 조심스러워야한다. 또한 서로를 애틋하고 신비롭게 대해야하며, 함께있는 시간 하나하나를 아까워하며 아껴써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온전히 빌보 혼자만의 연애관이었다. 옆집에 사는 소린과의 연애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5개월이 지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2학기를 맞이하는 바람에 강제로 원거리 연애를 했어야만 했다. 그들은 틈나는대로 전화와 메신저로 애틋한 마음을 주고 받았고, 방학이 되서 서로 함께 지낼 시간이 찾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서로 떨어져있던 시간은 너무도 참기 힘들고 괴로웠지만, 빌보는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때가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학이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자마자 소린은 부리나케 기숙사를 나와 빌보의 옆집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빌보의 방으로 이사를 왔다고 해야 할까. 매우 뻔뻔하게도, 소린은 하루에 한 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씻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빌보의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빌보의 어머니 벨라도나가 차려주는 식사를 함께 먹고, 빌보를 따라서 조깅을 나가고, 빌보의 침대 위에 엎드려 종일 노트북을 두드렸다. 소린의 부모님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장남을 찾기는커녕 빌보와 사이가 참 좋아졌다며 흐뭇하게 박수를 치고만 있었다. 빌보의 부모님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벨라도나는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린 몫의 식사까지 총 5인분의 식사를 준비하고는 했다.
뭐 여기까지 들으면 과연 뭐가 문제인가 싶겠냐만. 정작 빌보는 최근 깊은 불만에 빠져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여자친구가 많았던 소린은 그렇다 쳐도, 빌보에게는 이번이 태어나서 맞이하는 첫 연애였던 것이다. 당연히 빌보의 머릿속엔 연애에 대한 갖가지 환상들이 품어져있었다. 하지만 왜 3주가 된 지금까지 그들의 데이트 장소는 언제나 같았다. 빌보의 방, 아주 가끔은 소린의 방. 빌보는 너무도 생활감 넘치는 이 상황이 지극히 불만이었다.
"질척해 정말."
빌보는 오전부터 온종일 자신의 허리에 엉겨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소린을 향해 말했다. 때마침 은근슬쩍 빌보의 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고 있던 소린이 고개를 들어 빌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억울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잖아."
"이제부터 할거잖아."
어차피 모든 계획이 간파당했기 때문인지, 소린은 아예 대놓고 손을 놀려 빌보의 셔츠를 걷어 올렸다. 빌보는 그런 소린의 파렴치한 손등을 찰싹 때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버릇없는 애완동물을 혼내는 듯한 표정을 보자, 소린은 기가 죽기는커녕 빌보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빌보의 입술에 가볍게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야!"
"왜, 뭐가 불만인데?"
급기야 빌보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그제야 소린은 장난스러운 태도를 그만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빌보를 마주 보았다. 빌보는 그동안 참아왔던 불만이 터졌는지, 래퍼처럼 불만사항을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벌써 3주째 집에서 나가질 않고 있잖아! 매일 같은 방구석에서 같은 얼굴을 보면서 같은 행위를 하는데, 뭐가 불만이냐니! 너 같으면 불만이 없겠냐? 뭐 데이트라던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소린은 그제야 약간 반성하는 듯한 표정으로 빌보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고 조그만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소린의 사과를 듣자마자 빌보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엔 무뚝뚝하다 못해 가끔 재수 없기 까지 했던 동갑내기 이웃사촌은, 연인이 되자마자 세상 누구보다 로맨틱하고 다정한 남자가 되었다. 빌보는 그런 소린의 변화가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랄까.
"그럼 지금 가까운 곳이라도 나갈까?"
"벌써 오후가 다 되어가는데 어딜 가. 이 동네에 볼 게 뭐 있다고."
"그냥 산책이라도 하지 뭐."
"좋아."
빌보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금세 밝은 표정이 되어, 옷을 갈아입고 외출준비를 했다. 소린은 그런 빌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자신 역시 일어나 가만히 빌보를 향해 다가갔다.
'귀여우니까, 역시 나가기 전에 한 번 해야겠다.'
***
잠시 맑았던 빌보의 기분은, 소린이 이끌고 간 산책코스에서 다시금 폭풍이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변했다. 지겨웠던 자신의 방에서 벗어나 온 곳이 하필이면 도서관이라니. 물론 빌보 역시 어차피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이나 할까 해서 나온 것이기에,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실망스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소린이 톨킨의 책을 들고 와, 빌보에게 내밀었다는 점이었다.
"소린. 내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난 톨킨의 책은 죽어도 안 읽는다고."
"왜? 이젠 톨킨을 싫어할 이유도 없잖아."
소린은 열람실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책상 앞에 빌보를 앉히고는 그의 앞에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빌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 책들을 자신의 앞에서 스윽 밀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이건 나의 투쟁이야. 난 어린 시절에 이미 다짐했다고. 죽을 때까지 톨킨의 책은 읽지 않기로."
"하지만 톨킨 덕분에 이렇게 나를 만나게 됐으니, 그런 무의미한 투쟁은 그만둬도 좋잖아."
소린은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빌보의 입술 옆에 입을 맞추었다. 빌보가 혹시라도 누가 봤을까 기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몇 안 되는 도서관 이용자들은 자신들이 읽고 있는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아무도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소린의 짓궂은 장난이 괘씸했는지, 빌보가 소린의 팔뚝을 있는 힘껏 꼬집어 비틀었다. 소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빌보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겨우 잡아빼고는 빌보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럼, 이것만이라도 읽어. <호빗:The Hobbit>"
"미쳤어? 그 책이 제일 싫어."
"그래도 네 이름의 유래 정도는 알면 좋잖아."
소린이 빌보의 손에 <호빗>을 쥐여주자, 빌보의 표정이 신문지처럼 와그작 구겨졌다. 이름의 유래라니. 저 책과, 빌보라는 이름 덕분에 학창 시절 내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소린이 다른 톨킨의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두러 일어서자, 빌보는 호빗을 들고 소린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속삭였다.
"이것도 가져다 놔. 난 안 읽을 거야."
"별로 길지도 않아."
"안 읽는다니까?"
두 사람이 사서의 앞에서까지 승강이를 벌이고 있자니, 은테안경을 쓴 사서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소린이 한발 물러섰겠지만, 오늘의 소린은 빌보에게 톨킨의 책을 읽게 하기로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소린은 빌보에게서 책을 뺏어 사서에게 건네주고는, 빌보의 얼굴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 책에는 빌보 배긴스 뿐만 아니라, 소린 오큰쉴드의 이야기도 나온다고. 궁금하지 않아? 나와 같은 이름을 지닌 난쟁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소린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빌보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호빗의 삶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소린과 같은 이름을 가진 드워프의 삶이라면 조금, 아주 조금은 흥미가 있었다. 얼마나 멋진 캐릭터이길래, 소린의 부모님이 자식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줬을까. 그리고 빌보의 망설이는 표정을 귀신같이 읽어낸 소린이 대여가 끝난 <호빗>을 빌보의 두 손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빌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받아들고는 낯선 책의 표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톨킨의 첫 번째 책, 빌보와 같은 이름을 가진 키 작은 종족이 주인공인 책. 그리고 참나무 방패 소린이라는 난쟁이가 나오는 책. 빌보가 죽을 때까지 읽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톨킨의 책. 빌보는 묘한 표정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빌보가 집에 가서 얌전히 책을 읽은 건 아니었다. 다음날엔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자며 소린과 함께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오는 바람에, 그 다음 날엔 벨라도나의 명령으로 다 같이 대청소를 돕는 바람에. 그리고 그 다음 날엔 프로도를 데리고 놀이동산을 다녀오는 통에 책은커녕 소린과 제대로 애정행각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니 잠든 프로도를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린이 빌보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자 빌보가 기대감에 눈을 감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린은 빌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명령하듯이 말했다.
"오늘은 꼭 <호빗> 읽어."
기대감이 깨진 빌보가 소린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찬 것 역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날, 소린은 눈을 뜨자마자 기분 좋게 일어나 자신의 방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밤새 빌보의 방 불이 켜져 있던 걸 보니, 드디어 빌보가 톨킨의 책을 읽은 것이 틀림없었다. 빌보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빌보 역시 톨킨의 책에 빠져들었을까? 자신과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생각할까? 소린은 감았던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채로 한달음에 옆집으로 달려갔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빌보의 부모님은, 소린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지도 않고 익숙하게 물었다.
"아침 먹을 거니?"
"이따가 빌보 일어나면 그때 먹을게요. 아직 자고 있죠?"
"걔야 늘 그러잖니."
벨라도나를 향해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까닥하고, 소린은 빌보의 방이 있는 2층을 향해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다. 분명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자고 있을 빌보를 어떻게 깨울지 고민하며, 소린은 빌보의 방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그리고 소린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폭소를 터뜨렸다.
"맙소사. 빌보,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소린이 그답지 않게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소리에 웅크리고 잠들어있던 빌보가 몸을 일으켰다. 소린은 빌보의 얼굴을 보고는 더욱 큰소리로 웃어젖히고야 말았다.
"책 읽기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코스튬플레이까지 하다니. 이런 감동적인 서비스를 해줄 줄은 몰랐는걸?"
소린이 잠에서 깬 빌보를 향해 다가가 그의 얼굴을 감싸자, 뾰족한 귀를 달고 호빗의 옷을 입고 있던 빌보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소린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빌보는, 분명 빌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일단 그는 지나치게 작았다. 게다가 소린이 알고 있는 빌보보다 약간 나이가 들어 보였고, 결정적으로 그의 큰 발과 뾰족한 귀는. 분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진짜 같았다. 놀란 건 그 '빌보'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린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소린..? 수염은 어쨌어요?"
<계속>
장편이라서 엄두가 안나 계속 준비만 하다가, 이제서야 시작하네요ㅠ
Love in Tolkien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니,괜찮으시면 전편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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