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로스트인톨킨

[소린빌보/연재] Lost in Tolkien <3>




Lost in Tolkien


3







 자신을 둘러싼 온통 비현실적인 풍경들 속에서 빌보는 이성의 끈을 잡으려 애썼다. 살아남기 위해선 냉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해야 한다. 빌보는 제 눈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소린'이 그의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시 바라봐도 놀랄 만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체격이며 나잇대며 전혀 맞는 부분이 없었다. 다음으로 빌보가 인지한 현실은, 괴물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덩치가 크고 흉측한 괴물들 중 하나가 칼을 쳐들어 소린을 닮은 누군가를 죽이려 했다. 빌보의 이성이 말했다. 그들의 주의가 분산된 지금 달아나야 한다고. 하지만 어디로? 자신이 지금 달아나면 소린을 쏙 빼닮은 얼굴의 낯선 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빌보는 다급하게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돌덩이를 쥐고, 오래전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때처럼 강하게 돌을 던졌다. 135km는 족히 될 듯한 강한 직구가 괴물의 뒤통수에 꽂혔다.



'아직 제구가 나쁘지 않군.'



 하지만 빌보가 제 실력에 감탄할 새도 없이 괴물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빌보를 돌아보았다. 그 휘 번뜩하게 빛나는 눈을 본 순간, 빌보는 이성의 경고를 무시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야 말았다. 그냥 혼자 도망치는 것이 현명했을 텐데. 빌보가 조금씩 뒷걸음치자 괴물이 흉악한 비명을 지르며 빌보를 향해 달려들었다. 빌보는 재빨리 몸을 굴려 괴물이 덮치는 것을 피하고, 아무 방향으로나 전력질주를 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 지, 괴물이 얼마만큼 자신을 가까이 뒤쫓는지도 모른 채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내달렸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무언가가 자신의 뒷덜미를 잡아채자, 빌보는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얼굴은 제 연인인 소린의 얼굴이었다.


'소린, 보고 싶어.'



 그러나 다음 순간 빌보는 자신의 몸이 하늘로 붕 치솟는 것을 깨닫고 감은 눈을 조심스레 떴다. 놀라운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독수리떼들이 제각각 작은 사람들을 쥐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빌보를 잡아챈 것 역시, 그 거대한 독수리 중 하나였다. 자신의 몸이 수천 미터 상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빌보는 미칠듯한 비명을 질러댔다. 잠시 버둥거리기도 했지만, 자칫하다가는 떨어져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곧 그만두었다. 빌보가 고개를 돌리자, 아까 보았던 소린을 닮은 낯선 수염 난 사내 역시 독수리에 의해 옮겨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린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독수리들은 한참을 날아, 괴물이 없는 안전한 언덕 위에 빌보와 작은사람들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들 중 키가 크고 흰 수염을 가진 늙은이가 땅에 내리자마자 빌보를 향해 달려왔다. 빌보는 영문모를 표정으로 그와 작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성인 남자치고는 무척이나 작은 키를 가진 빌보보다도 작은 사내들이었다.



'영화촬영장인가..?'



 그들은 빌보의 키를 보며 혼란에 빠진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정신을 잃고 있던 소린을 닮은 남자가 깨어났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를 찾으며, 자신이 찾는 이의 호칭을 입에 올렸다.



"호빗은 어디 있지?"


 그리고 그의 시선이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빌보에게 와 닿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금씩 빌보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은 정말 소린과 똑 닮아서, 빌보를 혼란스럽게 했다. 비록 코가 좀 더 크고, 수염이 덥수룩하며, 소린보다 키가 아주 작기는 했지만. 소린보다 나이가 더 들기도 했고. 소린을 똑 닮은 난쟁이가 묘하게 화난 목소리로 빌보를 향해 물었다.


"넌 누구지?"


"아, 내 이름은 빌보라고 해요. 빌보 배긴스."



 빌보가 나름 정중하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자마자, 청천벽력같은 고함이 그 난쟁이로부터 터져 나왔다.



"거짓말하지 마!"


"뭐라고요?"


"내가 알고 있는 빌보 배긴스는 인간이 아니라 호빗이지. 넌 호빗이라기엔 지나치게 크군."



 그의 말을 들은 다른 난쟁이들이 웅성거리며 제각각 떠들어대는 소리가 빌보의 귀에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좀도둑이 맞는 것 같다는 둥, 마법으로 키가 커졌다는 둥, 인간처럼 보인다는 둥. 소린을 닮은 난쟁이가 그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양인지, 그의 호통 한방에 순식간에 그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빌보를 거만하게 올려다보다가 흰 수염이 난 회색 옷의 늙은이에게 물었다.



"혹시 이자가 사악한 마법으로 호빗의 모습을 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 하지만 빌보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네."


"그럼 진짜 좀도둑은 어디로 사라진 거죠?"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빌보는 그제야 그들이 말하는 단어 중 몇몇이 아주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 단어들은 자신이 무척이나 싫어하던 '톨킨'의 책 속에 쓰여 있던 단어였다. 빌보가 굳이 '톨킨'의 책을 읽지 않아도 질리도록 들었던 단어들이었다. 호빗이나 마법, 빌보 배긴스 같은 것.


'그래, 난 <호빗>을 읽다가 잠이 들었었지.'


 빌보의 머릿속에 두 가지 가설이 세워졌다. 하나는 자신이 책을 보다가 잠들어서,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상태라는 가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이 책 속의 세계로 들어와 있다는 가설. 빌보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소리를 내 내뱉었다.



 "꿈이라기엔 감각이 너무 생생하니, 아무래도 이곳은 호빗의 세계겠네."


 빌보의 말을 용케 들었는지, 소린을 닮은 난쟁이가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빌보의 혼잣말에 끼어들었다.



"인간, 이곳은 호빗의 마을이 아니다.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당장 좀도둑을 내놓지 않으면.."


"그건 곤란하겠는데."



 빌보의 말에 그는 당장 칼을 뽑아들 기세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다른 난쟁이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빌보는 그들이 부디 진정하기를 바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두 번째 가설에 관해 이야기했다.



"원래 여기 있어야 할 호빗이 나랑 뒤바뀐 모양이야. 그는 아마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 가 있겠지."


"그게 어디지?"


"...책밖의 세계. 당신들은 다 책 속의 존재들이거든."



 빌보의 말을 듣자, 난쟁이들은 진정하기는커녕 더욱 더 빌보를 향해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빌보의 말이 그저 미친소리로만 들리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빌보 역시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나마 그중에 가장 이성적인 것으로 보이는 늙은이가 빌보를 향해 다가와 물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증거를 대보게."


"앞으로 당신들이 겪을 모험의 결말을... 음.. "



 빌보는 고심해서 증거가 될만한 이야기를 해보려 했지만,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빌보는 톨킨의 책은 단 한 페이지도 읽은 적이 없으니까. 빌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난쟁이들이 다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빌보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쳐대며 말했다.



"어휴, 소린이라면 다 알 텐데."


"뭐?"



 빌보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소린을 닮은 그 우두머리 난쟁이가 반응을 보였다. 이곳이 톨킨의 책 속이 맞는다면, 소린을 닮은 난쟁이의 이름은 아마도 빌보가 잘 아는 바로 그 이름일 것이었다. 소린 오큰실드.



"당신 말고, 책 밖의 소린.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남자가 있어."


 난쟁이소린은 잠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는 빌보가 말하는 게 사실이든 아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회색 옷을 입은 늙은이에게 가서 따지듯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저 인간이 뭐든 상관없소. 하지만 좀도둑이 사라졌으니 이제 어떻게 스마우그에게서 아르켄스톤을 훔쳐오게 할 셈이오?"


"흠.."



 늙은이가 선뜻 명쾌한 해답을 내지 못하자 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퉁명스러운 태도로 씩씩거렸다. 빌보는 그런 난쟁이소린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꼬장꼬장한 성격이며 퉁명스러운 태도가, 빌보가 알고 있는 소린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빌보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타입이 아닌지라, 이번에도 결국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성질머리 하고는.."


 그러자 이번엔 그 화의 불똥이 빌보에게 튀었다. 그는 허리춤에 찼던 칼을 꺼내 빌보에게 들이밀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네가 오크의 첩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뭐?"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좀도둑을 순순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네놈의 목숨도 안전하지는 못할 거야."


"이봐, 나야말로 이런 곳에 1분도 더 있고 싶지 않거든?"


"우리의 보물을 되찾기 위해서는 좀도둑이 필요해. 쓸데없는 꿍꿍이는 집어치우고 그가 어디 있는지 말해."



 대화를 하면 할수록 고지식하고 의심 많은 난쟁이소린의 성격에, 빌보의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게다가 호빗, 빌보 배긴스를 찾는 이유가 순전히 자신들의 보물을 되찾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빌보를 은근히 화나게 하였다. 그의 안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건가? <호빗>은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빌보였지만, 그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빌보가 어린 시절 욕심을 부릴 때면, 벨라도나가 종종 훈계하며 입버릇처럼 하곤 했던 '참나무방패 소린'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빌보가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참나무 방패 소린의 성격은, 과연 벨라도나의 말대로였다.



"과연, 보물에 집착하다가 탐욕의 병에 걸려 죽을 만도 하네."


"......"



 빌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짓말처럼 주변이 조용해지고, 소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차. 빌보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어버렸다.


 빌보에게는 그저 잘 알지도 못하는 책 속의 인물의 결말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인생을 통째로 스포일러 당한 것과 다름이 없을 텐데.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나선 건 뾰족 모자를 쓴 회색옷의 늙은이였다. 그는 둘 사이를 비집고 성큼성큼 들어와 난쟁이 소린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 인간이 우리의 호빗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군. 하지만 그의 정체를 밝히고 있을 시간이 없네."


"..."


"그러니, 일단 그를 데리고 여정을 마저 떠나는 것이 어떻겠나. 그러다 보면 우리의 호빗 친구를 찾을만한 단서도 나타나겠지."



 소린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간달프의 제안 말고 딱히 떠오르는 해결방법이 없었다. 그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자, 간달프는 동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빌보를 향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자네의 말이 맞는다고 쳐도, 지금 우리로서는 자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방법을 알 수 없다네. 보아하니 산짐승이나 오크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만한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 일단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 어떤가?"



 빌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빌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빌보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회색의 마법사 간달프. 유일하게 빌보가 올려다볼 수 있는 큰 키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들의 뒤를 가만히 쫓아 걸으며, 빌보는 자신이 책을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리운 연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소린..'



 소린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똑같은 얼굴을 가진 존재가 지금도 빌보의 앞에서 걷고 있지만, 그는 빌보가 사랑하는 소린이 아니다. 너무도 다른 타인의 존재는 소린을 향한 그리움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만 할 따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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