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에버애프터(2)
에버 애프터
Ever After
2.
난쟁이들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소린의 모습을 보자, 빌보의 얼굴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빌보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몇 번인가 눈을 끔벅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환영이 아닌가 싶어 미동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돌처럼 굳어있는 빌보를 킬리와 필리가 튀어나와 부둥켜 안았다. 빌보는 더더욱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봐 보긴스, 완전히 굳어있잖아?"
"우리의 깜짝 계획이 그에겐 너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필리, 이 깜짝 계획을 세운 건 형이었지."
"아냐 킬리. 난 빌보가 우리의 장례식장에 찾아왔을 때 눈을 번쩍 떠서 호빗을 기절시키자고 했었어."
킬리와 필리가 웃으며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았으나, 빌보의 귀에는 단어하나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빌보는 그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느새 자신의 앞에 다가와 있는 소린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그들이 살아있는 거지? 분명 내 눈으로 그들의 죽음을 목격했는데?'
빌보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꾸고 싶었다. 행여 눈이라도 깜박이면 이 꿈에서 깨어날까 봐 빌보는 그저 멀뚱멀뚱하게 서 있었고, 그런 빌보의 머리 위로 소린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빌보. 킬리와 필리의 장난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기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렸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널 속인 셈이 됐군."
소린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빌보가 겨우 눈을 한번 깜빡이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 어떻게 다들 무사할 수 있는 거죠? "
그리고 그때, 빌보는 자신이 잡고 있는 소린의 옷자락 속에서 무언가 다른 감촉이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빌보는 소린의 옷을 들추자, 은색으로 빛나는 낯익은 갑옷이 보였다.
"미스릴?"
빌보의 말에 킬리와 필리 역시 짓궂게 자신들의 옷을 슬쩍 들춰냈다. 그들의 옷 속에서도 미스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킬리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선조들이 모리아에서 발견한 미스릴의 양이 얼마나 굉장했는지…."
킬리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빌보는 바다에 나자빠지듯이 주저앉았다. 빌보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뒤흔들며, 나머지 드워프들의 얼굴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오리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난쟁이들은 전부 속임수에 넘어간 빌보를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잠깐, 그럼 모두들 알고 있던 거예요? 그런데도 내게 아무도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 잠깐! 간달프, 간달프도 알고 있나요?"
발린이 웃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빌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런 망할 난쟁이들 같으니! 빌보는 부루퉁한 얼굴로 일어나 자신의 짐들을 챙겨맸다.
" 난 샤이어로 돌아가겠어요. 어떤 난쟁이도 백엔드에 방문할 수 없어요. 두 번째 아침식사시간이건 티타임시간이건. 아무리 노크를 해도 절대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 "
예상한 것보다 더 화난듯한 빌보의 반응에, 모든 드워프들이 당황하며 술렁였다. 자기는 처음부터 이런 계획에 동참할 마음이 없었다고 발뺌하는 글로인부터 그저 어깨만 으쓱거리는 비푸르까지. 그리고 모든 난쟁이의 눈빛이 일제히 소린을 향했다. 어떻게든 해보라는 무언의 압력이 섞여 있는 그들의 눈빛을 소린은 헛기침을 하며 곤란해 했다. 그들의 장난에 동참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쨌든 소린도 본의 아니게 빌보를 속이는 작당에 일조한 셈이니. 소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뒤돌아서 있는 빌보를 향해 다가갔다.
"마스터 호빗. 화가 많이 났겠지만.."
그리고 소린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빌보가 뒤돌아서 소린의 품에 안겼다. 안겼다기보다는 몸을 내던져 부딪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빌보는 에레보르가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게 다 꿈은 아니겠죠?"
"빌보.."
"만일 이게 꿈이거나 환상이라면, 그때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소린은 자신의 옷깃을 부여잡고 아이처럼 엉엉 우는 빌보의 뒤통수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킬리와 필리도 빌보를 향해 다가와 끌어안았으며, 덩달아 코끝이 찡해진 다른 난쟁이들도 모두 모여들어 그들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간달프 역시, 먼발치에서 감동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제껏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프로도가 갑자기, 간달프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왜 빌보삼촌은 샤이어로 다시 돌아온 거죠? 그대로 그의 친구들과 에레보르에 머물렀어도 괜찮잖아요. 물론 삼촌이 샤이어를 미치도록 그리워했을 거라는 건 저도 이해하지만.. "
"아, 그건 말일세.."
간달프는 웃으며 천천히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열세 명의 드워프가 한 명의 호빗을 둘러싸고 대성통곡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그들이 모두 진정해갈 때쯤 소린이 빌보에게 물었다.
"그럼 샤이어로 돌아가는 건 관두는 건가?"
그러나 빌보는 그때까지도 분이 다 풀리지 않은 상태인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들을 조금 골탕먹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쎄요. 당신이 살아있는 건 기쁘지만, 사실 샤이어의 내 정원을 너무 오래 비워둔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다른 사촌들이 내 물건에 손댄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아, 물론 지금은 저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왜 내 곁에 머물고 싶다는 거지?"
근엄한 척 표정을 꾸미고는 있었지만, 눈가에 한가득 장난기가 가득한 소린이 되물었다. 그러자 빌보가 말문이 막혀 당황하며 답했다.
"그야.. 당신은…. 내. 나의.."
소린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뒤틀었고, 빌보는 고개를 푹 떨구고 귀까지 시뻘게져서 더 이상을 말을 잇지 못했다.
"어쨌든 난 예정대로 샤이어로 돌아가겠어요!"
빌보는 어느 정도 허세와 복수심을 섞어서 소린을 향해 소리쳤다. 자신이 곤란했던 것만큼 소린 역시 어느 정도는 당황하기를 바랬다. 소린이 허둥대며 자신을 잡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던 빌보의 기대와 달리, 소린은 아무렇지 않게 빌보에게서 빗겨서며 말했다.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게 빌보 배긴스. 어차피 우리의 계약은 이미 끝나지 않았나."
"뭐라고요? 잠깐..!"
당황한 빌보의 등을 떠밀며, 소린은 그에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의 일이 정리될 때까지는 샤이어가 차라리 안전하겠지."
"정리라니, 무슨 소리예요?"
"너는 알 것 없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빌보는 얼떨결에 샤이어로 떠밀려 돌아갔다. 간달프와 함께 샤이어로 돌아가는 내내 빌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소린이 어째서 자신을 돌려보냈는지. 그리고 샤이어에 도착할 즈음, 빌보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기적과 같이 재회했는데, 어떻게 아무런 미련도 없이 자신의 등을 떠밀 수 있지? 어느새 자신이 먼저 샤이어로 돌아가겠다고 선포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빌보는 씩씩거리며 백엔드를 향했다. 그리고 곧 자신의 물건듯이 전무 경매에 부쳐지고 있는 진풍경을 목격했다. 결국, 자신이 진짜 빌보 배긴스임을 입증하기 위해 계약서까지 들이밀고서야 겨우 그의 집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소린오큰실드가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빌보는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그냥 친구예요!"
엉망진창이 된 집안으로 들어서서 빌보는 천천히 생각했다. 친구? 참나무 방패 소린이 내게 친구인가?
빌보는 소린이 아조그의 칼에 맞아 쓰러졌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오열하던 그 순간, 빌보는 깨달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서 소린 오큰쉴드는 친구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하지만 그때는 소린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마음을 인지하자마자 묻어버려야만 했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록 소린은 지금 에레보르에 있지만, 그는 이제 살아있다. 빌보에게는 그 사실 하나가 구원이고, 위안이었다. 빌보는 씩씩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엉망이 된 자신의 집을 둘러보았다. 곧 찾아올 난쟁이 친구들을 위해, 백엔드를 정리하고 팬트리를 채워놔야만 했다.
그렇게 빌보가 샤이어로 돌아오고 몇 번의 해가 지나갔다. 에레보르의 난쟁이들로부터는 어떤 편지도 방문도 없었다. 빌보는 그동안 엉망이 된 지을 고쳤으며, 베오른의 뜰에서 가져온 도토리도 그의 집 뒤뜰에 심었다. 도토리에서 싹이 터서 어느덧 자그마하게 솟아올랐지만, 그때까지도 난쟁이들은 백엔드를 방문하지 않았다. 처음엔 자신이 그들에게 했던 말 때문인가 싶어서, 얼마든지 샤이어를 방문해도 좋다는 편지를 몇 번인가 보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빌보는 자신이 에레보르를 떠나 샤이어로 돌아오던 날 봤던 소린의 모습이 환상이라고 믿게 됐다. 자신이 소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억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평화롭고 반짝이던 샤이어의 삶이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난쟁이들과 함께했던 외로운 산으로의 여정만이 빌보의 그리움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빌보는 침울하게 자신의 일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빌보의 집으로 반가운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것은 그의 오랜 친구 발린이 드디어 빌보의 작은 집을 방문한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빌보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를 위해 신선한 토마토와 치즈, 버섯이 들어간 수프, 난쟁이들이 즐겨 먹을 만한 고기요리를 준비했다. 발린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지만, 빌보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기대감이 있었다. 발린에게서 소린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발린의 입에서 사실 소린은 죽었고, 그가 살아 돌아온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그리고 곧 누군가 백엔드의 문을 두드렸다.
"어서 와요 발린."
빌보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빌보의 눈앞에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빌보를 몇 번이고 혼자서라도 외로운 산으로 달려가고 싶게끔 하였던 그의 산밑왕.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빌보를 미치도록 그립게 만들었던 그의 참나무 방패 소린이 빌보의 눈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굳게 다문 입술과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하지만 빌보를 향한 눈빛만은 여전히 다정한채로. 그리고 놀랍게도 소린이 먼저 빌보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소린이 당신께 봉사하겠습니다."
빌보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그의 입을 작은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소린이 자신의 눈앞에 찾아와 있었다.
"여전히 이 집은 찾기가 힘들군. 이번엔 표식도 없어서 정말 찾아오기 힘들었어."
빌보는 투덜거리고 있는 소린을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었다. 빌보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건드리자, 소린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빌보. 생각보다 시간을 내기 어려웠어. 필리나 다인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완전히 샤이어에서 살 생각이었는데, 에레보르의 모든 난쟁이가 펄쩍 뛰더군."
"소린.."
"그들의 고집이 너무 완강해서, 차라리 자네를 에레보르로 다시 데려오기로 했어."
빌보는 소린의 팔을 꽉 잡고, 뭔가 결심한 듯한 단호한 표정으로 소린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계속 후회했어요. 꼭 하고 싶은 말을 못했거든요. 이제 더이상 해야 할 말을 못하는 건 사양하겠어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사랑해요. 이제는 당신과 조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빌보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자신을 향해 내뱉는 말들을 듣자, 이번엔 소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소린은 빌보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작은 호빗을 끌어안으며 답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간달프의 이야기를 듣던 프로도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눈을 내리깔았다. 부모님의 러브스토리를 듣는다면 마치 이런 기분이겠지? 하지만 프로도는 뭔가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간달프. 제가 기억하는 삼촌은 어쨌든 이곳 샤이어에서 혼자 지냈는데요? 서로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던 그들은 왜 떨어져서 살아야 했나요? "
"뭐..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프로도 너 때문이었단다."
"저요?"
간달프의 말에 프로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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