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에버애프터

[소린빌보] Anniversary

Anniversary

에버애프터 생일 단편

 


 빌보가 에레보르에 온 이후 처음 맞는 그의 생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소린은 에레보르 성벽 근처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과연 그의 사랑하는 작은 호빗에게 무엇을 선물해주면 좋을까. 물론 이번 빌보의 생일이, 소린과 빌보가 만나고서 처음 돌아오는 생일은 아니었다. 외로운 산으로 여정을 떠나는 중간에 한 번, 빌보가 샤이어로 돌아간 이후로도 몇 번 정도 그의 생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일은 빌보가 맞이했던 이전의 생일들과는 달랐다. 소린과 빌보가 연인이 된 이후로는 처음 맞는 생일이기도 하고, 에레보르도 어느 정도 상당한 부분 재건한 시점이었기에, 이번엔 제대로 거창하게 빌보의 생일을 챙겨주고 싶은 것이 소린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이 기회에 에레보르의 다른 난쟁이들에게 빌보의 위치에 대해서 확실히 각인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내심 품고 있었다. 빌보와 함께 했던 13명의 드워프들을 제외한 다른 드워프들은, 솔직히 빌보를 왕의 애완동물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호빗이란 종족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빌보가 어떤 호빗인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길이 없었으니까. 또한, 소린은 예전부터 생각해왔듯이 빠르면 몇 년, 길어도 10년 안에는 어떻게든 왕위를 내려놓고 샤이어로 떠날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왕궁의 재력을 지금만큼 자유로이 쓸 수는 없을 테니, 그 전에 빌보의 생일파티를 무엇보다 거창하고 성대하게 치러주고 싶었다.


 소린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 커다란 양피지를 꺼내, 빌보의 생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계획이 어찌나 거창했던지, 소린은 아침 일찍 집무실에 틀어박혀서 해가 질 때까지도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까만 밤이 내려앉고, 달빛이 에레보르의 외벽을 비출 때 소린은 자신의 집무실을 나와 발린을 찾아갔다. 발린. 그는 요 몇 년간 에레보르에서 가장 바쁜 난쟁이 중의 한 명이었다. 에레보르의 성벽을 다시금 튼튼하게 다듬는 것부터, 성안에 가득한 용의 냄새를 지우는 일, 오랫동안 멈춰있던 용광로의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는 것까지 에레보르에 관한 일 중에 발린의 손이 미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발린은 그의 왕이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신경 쓰고 처리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나이 든 몸을 이끌고도 불평 하나 없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온종일 틀어박혀 뭔가 심각한 문제와 싸우는 것 같던 소린이 늦은 밤 그를 찾아와 어마어마한 길이의 양피지문서를 꺼냈을 때, 발린은 처음으로 그의 왕을 향해 불평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 지금까지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이런 걸 준비하고 계셨습니까."


 발린의 핀잔에 소린은 살짝 무안한 듯이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발린이 받아든 문서에는 빌보의 생일을 맞이하기 위한 계획이 1번부터 98번까지 매우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에레보르 입구에서부터 침실까지 금가루 길…. 에레보르 모든 길목에 크리스탈로 장식된 난간 설치……. 모든 조명을 도토리 모양으로 세공…. 모든 문을 샤이어식의 둥근 문으로 개조.. "


 발린은 양피지문서를 소리를 내 읽더니, 몇 줄 읽어보지도 않고는 그대로 그것을 접어버렸다. 발린의 반응에 소린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발린은 마치 어린 자식에게 훈계하는 듯한 말투로 왕을 향해 말했다.


 "소린..  일단 이 모든 것들의 실현 가능성은 제쳐놓고. 빌보의 생일이 얼마나 남은 지는 알고 계신 겁니까? 고작 일주일가지고는 이 중에 하나도 할 수 없어요."

 "... 그럼 저기 마지막에 적혀있는 특별한 보석을 만들어주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무안하게 수염을 긁으며 소린이 조심스레 꺼낸 말에, 발린이 접었던 양피지를 꺼내 마지막 항목을 살폈다. 그곳엔 빌보의 머리사이즈에 맞는 작고 빛나는 은빛 보석 가득 장식된, 서클릿의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마치…. 왕관 같이 보이는군요."


 발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소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소린이 적어온 계획은 어찌 보면 생일파티라기보다는 대관식에 어울릴 법한 것들이 아닌가. 왕님이 아무래도 이번에 빌보에게 청혼이라도 하려는 생각인가 보다 싶어, 발린은 다시금 서클릿의 도안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여러 가지 종류의 보석이 들어가는군요. 과연 전부 다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재료만 다 구한다면 빌보의 생일이 오기 전에 완성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간 무리를 한다면, 여기 이 항목과 저것, 그리고 이것까지도 준비할 수도 있겠군요."

"어쩔 수 없군. 그것만이라도 준비해주게."

"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일만으로도 벅찬데, 과연 제가 이런 것들까지 준비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저도 이제 예전과 같지 않은 늙은이라.."


 그제야 소린은 발린을 향해 약간 미안한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발린이 너무나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소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또 새로운 일을 추가하다니. 소린의 표정을 보고 기회를 잡았다 싶어, 발린은 금세 짓궂게 그의 왕을 향해 제안했다.

"빌보의 생일이 돌아올 때까지 제 몫의 업무를 좀 도와주신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영리한 발린의 제안을 듣자마자 소린이 당연하다는 듯이 별생각도 없이 대꾸했다.

 "물론이지. 얼마든지 처리해야 할 일들을 내게 넘기게. "


 소린과 발린이 정신없이 일과 빌보의 생일선물 준비에 흠뻑 빠져있던 며칠 동안, 정작 빌보는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쁜 소린은 요즘따라 얼굴 한 번 보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에레보르에 오자마자 킬리와 필리가 벌였던 침실소동 덕분에 빌보는 줄곧 소린과 한 침실을 쓸 수 있었지만, 둘이 함께 잠드는 시간은 현저히 적었다. 소린은 빌보가 잠들어있는 시간에 들어와 쓰러지듯이 잠들고, 그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사라졌다. 빌보는 소린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밤을 수두룩하게 겪었다. 게다가 샤이어를 떠나온 지도 벌써 수개월이 지난 뒤라, 빌보는 약한 향수병 증세마저 보이고 있었다. 필리와 킬리가 수시로 들러서 빌보를 데리고 에레보르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고, 다른 드워프들도 언제나 빌보의 방문을 환영해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너무 귀찮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열 명의 드워프들은 물론, 늘 노는 것만 같아 보이는 필리와 킬리 역시도 어마어마한 업무들을 떠안고 있었으니까.

 한때는 빌보도 대장장이 일이나 금속을 세공하는 일을 배우는 게 좋을까 싶어 시도를 해봤지만, 호빗의 서툰 담금질 솜씨가 난쟁이들의 기준에 찰리가 없었다. 게다가 소린은 빌보가 무언가 힘든 일을 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빌보가 대장간에서 일을 배운다는 걸 안 그 순간, 바로 호되게 호통을 쳤지. 빌보의 작은 손이 혹여 거칠어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해주는 그 마음이 고맙기는 했지만, 빌보는 마치 자신이 방안에 장식된 보석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린의 옆에 장식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빛나기만 해야 하는 보석.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빌보의 마음에 새로운 불안감이 엄습했다. 소린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감각이, 마치 예전에 그가 아르켄스톤에 집착하던 감각과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빌보는 작은 머리통을 가로저어 쓸데없는 생각들을 떨쳐내버렸다. 괜히 부정적인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소린을 찾아가 업무를 방해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빌보는 소린의 집무실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소린의 집무실 문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똑똑똑-


 어찌나 일에 열중하고 있던지 소린의 귀에는 빌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빌보는 문앞에서 잠시 발을 몇 번 통통 두드리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그 작은 머리통을 방안으로 빼꼼 내밀었다. 그제야 소린이 빌보를 발견하고 하던 일을 멈추었다.


 "일하는 곳까지 찾아오다니. 별일이군. 빌보."


 소린은 뜻밖의 시간에 자신을 방해하러 찾아온 연인을 다정한 눈빛으로 마주 보며 눈이 휘도록 웃어 주었다. 평소 근엄하고 무뚝뚝하던 소린이 가끔씩 보여주는 웃음에는 아직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빌보였다. 부끄러운 듯이 헛기침을 하고 빌보가 조심스레 소린의 책상 근처로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좋은 오후예요 소린.  당신이 일하는 걸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난 그저.."

"그저?"


 소린이 빌보를 뚫어지라 바라보자 빌보는 잠시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며 핑곗거리를 찾다가, 창가 구석에 놓인 의자에 덥석 앉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빛이 잘 들어서. 그냥 그거 때문에 온 거예요. 그러니,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던 일을 마저 하길 바래요."


 소린은 당장에라도 자신의 사랑스러운 호빗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정말로 많이 쌓여있어서 아쉬운 마음을 감추고 다시 일거리로 시선을 옮겼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를 가만히 듣던 빌보는 문득 소린의 집무실이 꽤 어지럽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할 일 없이 멀뚱히 일광욕을 하는 것보다는 정리라도 도와주는 게 낫겠다 싶어, 빌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양피지 문서들을 좀 모아두려고 이것저것 뒤적이던 빌보는, 뭔가 왕관의 도안 같은 그림을 발견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런 그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왕관뿐만 아니라 반지와 목걸이, 벨트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그림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빌보가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는 것을 느낀 소린이 하던 일을 멈추고 빌보에게 다가왔다. 소린은 빌보가 보고 있는 그림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빌보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거칠게 가로챘다.


"소린.. 이게 다 뭐..."

"너는 알 것 없는 것들이다. 빌보 배긴스.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지?"


 긴장한 탓에 소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뚝뚝하고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의 말투가 어땠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빌보는 소린의 말에 약간 움츠러들며 한발 물러섰다.


" 뭐…. 좋아요. 하지만 중요한 서류라면, 좀 더 잘 보관해두는 게 좋겠어요."

" .."

"어.. 그럼 전 간식을 먹으러 갈 시간이라. 먼저 실례할게요."


 약간은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한 빌보가 어색한 핑계를 대며 소린의 집무실을 나가자, 소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모든 계획이 탄로가 날 수도 있던 다급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위기를 덮는 데 급급했던 나머지 소린은 상처받은 빌보의 표정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빌보로 하여금 엉뚱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빌보는 소린이 다시 황금의 병에 빠졌을 거라고 확신해버렸다.


 '어떡하면 좋지?'


 빌보는 소린의 집무실에서 나와 침실까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달렸다. 순식간에 얼굴색이 굳어 화를 내는 소린이라니. 빌보는 그런 소린의 모습을 예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스마우그가 죽고 난 뒤 황금이 가득한 에레보르에서! 그때 그가 어떻게 병에서 나았더라? 빌보는 작은 머리로 필사적으로 과거의 일들을 생각했다. 예전에 소린을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고를 반복했다. 빌보가 그때 느꼈던 참담한 기분들이 또다시 그의 마음속을 잠식했다. 이제는 다시 느낄 일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빌보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침대로 몸을 던지고는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조금 울어버렸다.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고 냉정하게 말하던 소린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울렸다.

 그렇게 잠깐 울고 일어나니, 빌보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차츰차츰 정리되어갔다. 작은 호빗은, 소린의 병이 다시 본격적으로 도지기 전에 자신이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빌보는 우선 발린을 찾아가기로 했다. 저녁을 야무지게 꼭꼭 씹어 먹은 뒤, 빌보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씩씩하게 발린을 찾아갔다. 발린은 웬일인지 평소 머물던 자신의 집무실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었다. 다른 난쟁이들에게 물어물어 발린이 대장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빌보는, 발린이 그를 막을 새도 없이 거침없이 대장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내  그곳의 난쟁이들이 만들고 있는 물건을 한눈에 목격하고야 만 것이다.


"맙소사."


 발린이 아찔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깜짝 선물이었는데 완성되기도 전에 본인에게 들켜버리다니, 소린이 알면 얼마나 화를 내며 호통을 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에 발린의 머릿속이 바삐 돌아갔다. 하지만 발린이 뭐라 해명을 하기도 전에 빌보가 내뱉은 말은 늙은 드워프를 더욱더 아찔하게 만들었다. 빌보는 그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역시.. 소린이 다시 그 병에 걸린 것이었군요. 하지만 발린, 당신은 그를 말렸어야 했어요. 아무리 그가 화를 내고 윽박질렀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보물을 만들면 만들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병들어갈 뿐이라구요."

"... 뭐?"


 잠시 빌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발린이 침묵을 지키다가 그답지 않게 얼빠진 말투로 되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빌보가 발린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소린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대장간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발린을 노려보는 소린의 얼굴이 어찌나 악마와 같이 무섭고 험악하던지. 발린은 필사적으로 서로의 오해를 풀어줄 말들을 생각했지만, 불행히도 발린의 말보다 빌보의 행동이 빨랐다.


"세상에 이렇게 무서운 표정이라니. 소린. 오 소린.."


 빌보가 소린의 양팔을 붙잡고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소린은 빌보가 자신의 선물에 감동했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작은 호빗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이어 빌보가 소린을 향해 어마어마하게 큰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제발 정신 차려요!! 전에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또 황금과 보석에 집착하다니!!"

"..?"

"소린, 부디 내가 다시 당신을 잃는 일이 없게 해줘요."


 소린은 빌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린과 빌보를 번갈아 바라보자, 발린이 그제야 둘에게 다가가 차분히 사건을 정리했다.

 

" 빌보.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왕께서는 황금의 병에 다시 걸린 게 아니라네. 그는…. 보석에 집착해서 이런 것들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건 자네의 생일선물이야."


체념하듯 내뱉은 발린의 말을 듣자마자 빌보와 소린 둘 다 빠르게 상황판단을 내렸다.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소린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빌보를 향해 말했다.


"내가…. 내가 또 예전처럼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나?"


빌보 역시 소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 생일선물이라뇨? 난…. 보석을 달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자넨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군. 마스터 호빗."

"소린. 나는 이런 생일선물이 필요하지 않아요. 호빗들은 그저 그들의 생일에 즐거운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면 만족한다고요. 왜 모든 걸 재화로 해결하려는 거죠?"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마음이 담긴 선물이 왜 이런 값비싼 보석이어야 하냐고요!"


 소린과 빌보는 어느덧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있었고, 눈치 빠른 발린이 근처에서 일하던 난쟁이들을 다른 곳으로 내보내고 둘을 말리기 시작했다.


"일단 둘 다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발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진정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더 격앙되고 거칠어져 갔다.


"그리고 호빗이라니. 내 이름은 빌보예요!"

"누가 그걸 모르나!! 사소한 일을 꼬투리 잡지 말게 좀도둑 선생. 대체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지? 내가 지금껏 보여줬던 것들이 자네에겐 보이지 않았나? 기가 막힐 노릇이군."

"좀도둑이라고요?"


 빌보가 잔뜩 화가 나 붉어진 얼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소린 역시 참담한 심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빌보에게 자신이 아직도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쓰라렸다. 빌보 역시 서글프긴 마찬가지였다. 왜 소린은 아직도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렇게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이나 고개를 돌리고 서 있었고, 빌보가 먼저 소린을 향해 말했다.


"소린. 난 아무런 선물도 받고 싶지 않아요. 난 그저 그럴 시간에 당신이 내게 한 번 더 얼굴을 보여주길 바랬다고요."


 그리고 조용히 빌보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빌보가 떠나고 소린 역시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은 빌보의 생일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빌보의 생일이 되기 전까지, 이틀 동안 둘은 대화다운 대화라고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빌보는 소린과 마주치지 않으려 슬그머니 손님방에서 시간을 보냈고, 소린 역시 최대한 많은 시간을 그의 집무실에서 보냈으니까. 화났던 마음은 금방 가라앉았지만 서로 먼저 사과를 건네지 못하는 이유는 꽤 단순했다. 소린은 사과라는 행위 자체에 서툴렀으며, 빌보는 소린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빌보의 생일이 다가왔다. 많은 난쟁이가 빌보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우르르 식당 한 쪽에 자리를 잡았음. 킬리와 필리가 어디선가 빌보를 찾아서 데려와 의자에 앉혔고, 금세 떠들썩한 생일파티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작 소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난쟁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소린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빌보의 생일인데."


 드왈린이 발린을 향해 물었음. 발린은 곤란한 듯이 가만히 웃기만 했다. 설명하기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소린이 없는데도 빌보의 생일파티는 시작되었고, 보푸르가 일어나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쟁이들은 여느 때처럼 큰 목소리로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며 흥을 돋웠다.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난쟁이들의 진심 어린 생일 축하에, 빌보는 크게 입을 벌리면서 소리를 내 웃고, 음식에 대해 말하고, 샤이어에서의 생일이 어땠는지에 대해 연설했다. 그러나 빌보의 속마음은 점점 엉망진창으로 뒤엉켜가고 있었다.


'왜 여기에 소린이 없는걸까..'


 샤이어에서 빌보의 생일에 있었던 우스운 일들에 대해 말하던 빌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샤이어에서 소린을 그리워하며 보냈던 몇 번의 생일에 대한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샤이어와 에레보르의 거리 때문에 소린이 너무 멀리 있어서 슬퍼했는데, 지금은 그와 같은 에레보르에 있는데도 예전보다 더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 것만 같았다. 빌보가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리자, 모든 난쟁이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빌보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좀도둑이 고향이 그리워진 모양이군."


글로인이 빌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하자, 오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럴 만도 해요. 그가 샤이어를 떠나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리고 킬리가 빌보의 곁으로 다가가 침울하게 울고 있는 호빗을 달래며 말했다.

"배긴스. 그럼 삼촌에게 부탁해보는 건 어때? 샤이어에 다녀오겠다고."

 킬리의 말에 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킬리. 샤이어가 그리운 게 아니라.. 난.. "


 그리고 빌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의 손이 조심스레 빌보의 어깨에 와 닿았다. 빌보가 고개를 들자 그곳엔 빌보가 그리워하는 그의 왕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소린은 아무런 말없이 빌보의 옆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빌보와 소린 사이에는 어떠한 말도 없었지만, 서로의 누그러진 눈빛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소린.. 저번엔 아무래도 내가 잘못.."


 빌보가 먼저 사과를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소린이 빌보의 말을 가로막고 모두를 향해 외치듯이 말했다.


"빌보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난쟁이들이 언제부터 요정처럼 재미없게 생일을 맞이했나!"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킬리와 필리가 튀듯이 일어나서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흥 많은 난쟁이들은 그에 맞춰 포크와 나이프로 박자를 맞추고, 음식을 던지며 떠들썩하고 순식간에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빌보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방금까지 서럽고 외로웠던 마음이 소린의 얼굴을 보자마자 신기할 정도로 쉽게 풀어지는 게, 빌보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식탁 아래로 소린의 손이 다가와 작은 빌보의 손을 단단하게 꽉 잡았다. 빌보는 소린의 손을 자신도 힘주어 마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직 눈가에 남아있던 눈물을 닦으며 푸시식 웃었다. 빌보가 웃자 소린의 입가에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지어졌고, 그 둘의 미소를 보고 나서야 발린 역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흥겨웠던 밤이 지나고, 소린과 빌보는 나란히 손을 잡은 채로 그들의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이동하는 동안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맞잡은 손으로 충분히 서로의 마음이 흘러넘쳐 와 닿고 있었다. 소린은 그들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빌보를 침대 귀퉁이에 앉히고는 자신의 무릎을 굽혀 빌보 앞에 마주 앉았다.


"소린?"


 빌보가 놀라서 소린을 일으키려 했으나, 소린은 가만히 빌보의 무릎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자신의 연인을 향해 말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네가 어떤 호빗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군."

"아니에요. 소린. 어리석은 건 나였어요. 내가 바보같이 당신을 오해해서.."


 빌보가 손을 휘저으며 소린의 말을 막으려 했으나, 소린은 그런 빌보의 양손을 잡고 빌보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샤이어가 그리운가?"

"오, 소린…. 틀려요. 난 아까 그래서 울었던 게 아니에요. 물론 샤이어에서 가져온 롱바텀연초가 다 떨어져 가는 건 무척 불만이긴 하지만."


 빌보의 솔직한 대답에 소린이 슬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빌보. 약속하지. 몇 년 안에 이곳을 정리하고 너와 함께 샤이어에서 지내겠다고."


 빌보는 소린의 말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눈꺼풀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말았다. 소린의 마음이 감동적일 정도로 와 닿아, 눈가에 곧 촉촉한 빛이 머금어졌다. 소린에게 에레보르가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빌보였다. 그런 그가 자신을 위해 에레보르를 내버려두고 샤이어로 가려는 결심까지 했다니. 이것보다 더 감동적인 생일선물이 어디 있을까. 빌보는 소린에게 잡혀있는 두 손바닥을 펴서 소린의 얼굴을 감쌌다.


"소린. 아까 당신이 오기 전에 깨달은 사실이 있어요."

"뭐지?"


 소린이 묻자 빌보가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그와 이마를 맞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샤이어가 아니라,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예요."


 빌보의 말에, 이마와 함께 맞닿은 코를 살짝 부비며 소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가까이에 항상 있는데, 그립다니?"

"소린…. 내게 좀 더 자주 당신의 얼굴을 보여줘요. 하루에 몇 번씩 사랑한다 말하고, 키스해줘요. 그리고 더는 혼자 이 넓은 침대에서 잠들게 하지 마세요. 내가 외롭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당신을 내게 줘요. 또, 쓸데없이 내게 무언가를 선물해주겠다고, 당신을 바쁘게 만들지 마요. 다시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소린의 표정이 순간 무안한 빛을 띠며 굳어버렸다. 며칠 전의 말다툼이라도 떠올린 것이겠지. 빌보는 그런 소린을 향해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만일 이것들을 약속해준다면, 당신이 에레보르를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천천히 재건해나가도 나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요.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당신을 따라 에레보르로 왔을 리가 없잖아요."


 어느새 소린의 굳었던 얼굴이 다시금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소린은 엄숙하고 단호한 왕의 목소리로, 자신의 눈앞의 호빗을 향해 말했다.


"약속하지."

 그리고는 능숙하게 빌보를 침대 위로 쓰러뜨리며, 짓궂은 연인의 표정으로 소린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 당장 약속을 이행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빌보?"

"무슨.... "


 처음엔 소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던 빌보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성질 급한 드워프는 호빗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그를 향해 열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생일선물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걸. 빌보는 행복한 마음으로 소린의 목 뒤로 팔을 둘러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둘 사이의 작은 다툼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물론 소린이 결국 호화스러운 서클릿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빌보가 알게 되면  두 번째 다툼이 시작되긴 하겠지만, 소린은 당분간 빌보에겐 비밀로 하기로 했다.






에버애프터 시리즈로 넣을까, 외전으로 뺄까 하다가 외전으로 올립니다:D
빌보의 생일이야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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