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에버애프터(3)
에버 애프터
Ever After
3.
"저 때문에 그들이 떨어져 있어야 했다구요?"
"둘이 다투는 일은 꽤 많았지만, 빌보가 너를 샤이어에서 키워야겠다고 통보했을 땐 정말이지 에레보르 성이 그대로 무너지는 줄 알았지."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간달프."
"하지만 그들은 무척 사이좋은 부부였어."
"부부요?"
프로도가 턱이 빠질 기세로 입을 벌리고 있건 말건, 간달프는 계속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있었다. 프로도는 간달프가 일부러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고 느꼈지만, 어쨌든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머릿속 한구석에 접어둔 채 얌전히 간달프의 이야기를 좀 더 듣기로 했다.
"우선, 빌보가 에레보르로 돌아왔던 날의 이야기부터 다시 하도록 하겠네."
***
에레보르의 난쟁이들은 그들의 왕이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세상 모든 것에 감사했다. 아울레는 물론 지나가는 개미 한마리에게 조차도. 그러나 그들의 머릿속에는 곧 짓궂은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아직 소린이 죽은 줄고만 알고 있는 작고 불쌍한 호빗을 놀래키기 위한 거짓장례식이라는 말도 안되는 계획이. 그들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모든 걸 준비하고, 빌보가 장례식장에서 눈 뜬 소린을 보고 기절하는 장면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빌보가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저런 내막을 전혀 모르고 부상이 회복되기까지 꼼작없이 누워있던 소린은, 부상이 낫자마자 그의 좀도둑을 찾았다. 그리고 이제 막 샤이어로 떠나려는 빌보를 에레보르의 성문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오, 빌보 배긴스. 발린과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소린에 대해 쉽사리 입을 여는 것 조차 못하는 안쓰러운 호빗을 어떻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린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빌보를 부서져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동안의 내막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소린은 샤이어로 떠나려는 빌보를 붙잡지도, 따라가지도 않았다. 아직 소린에게는 에레보르에서 마무리 지어야하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이봐 사촌, 전투 중에 머리라도 다친 거야? 난쟁이 수염 맙소사. 지금 소린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다인의 목소리가 에레보르성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다인 뿐만 아니라 다른 드워프들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왕, 참나무 방패 소린만이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모두를 향해 말했다.
"왕위를 다인에게 넘겨주겠다고 말했다."
발린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발린이 알고 있는 소린은 절대 왕국을 포기할 난쟁이가 아니었으니. 소린은 언제나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두린의 핏줄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자신의 손이 아닌 사촌의 손으로 에레보르를 재건하게 둘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린의 결정이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발린은 스마우그가 떠난 이후 미쳐가던 소린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어쩌면 소린은 에레보르의 황금에서 조금 멀어질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발린은 스스로 내린 결론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린에게 물었다.
"그럼 에레보르를 떠나서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청색 산맥?"
그러자 소린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그답지 않게 눈을 내리깔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듯한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답했다.
"...샤이어."
대부분의 난쟁이는 소린이 뭐라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필리만큼은 삼촌이 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샤이어!! 빌보를 만나러 가려는 거군요!"
순식간에 모든 난쟁이가 술렁이며 제각각 큰소리를 내며 떠들기 시작했다.
"역시 순순히 그 호빗을 보낼 마음이 없었어!"
"샤이어까지 과연 혼자 찾아갈 수는 있는 거야?"
"그냥 배긴스를 이곳으로 불러오면 되잖아?"
"빌보가 지금쯤 팬트리를 다시 꽉 채워놓았으려나?"
"빌보를 찾아가는 거라면 말릴 도리가 없지."
시끌벅적 한참을 떠들던 드워프들은 각자 생각은 다 달랐지만, 대체로 소린의 결정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인만 제외하고.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빌보 배긴스라니. 간달프와 있던 하플링을 말하는 거야? 대체 그 하플링이 뭔데 소린이 그를 찾아간다는 거지?"
그러자 좀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드워프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소린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인만 답답할 노릇이었다. 자신들의 왕이 지금 납득이 가지 않는 미친 결정을 했는데도, 가신들이 목숨 걸고 반대하기는커녕 은근한 동의의 뜻을 내비치다니.
"대체 뭐야? 그 호빗이 뭐길래?"
그리고 침묵을 깨고 킬리가 용감하게 말했다.
"미스터 보긴스는 우리의 숙모가 될 사람이에요! 안 그래 필리?"
킬리의 용감한 발언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곧 에레보르가 떠나갈 듯한 다인의 고함이 들려왔다.
" 절대 안돼! 호빗을 에레보르 왕가의 왕비로 삼겠다니!"
소린은 그 순간 예감했다. 그의 호빗을 찾아가는 데에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걸. 하지만 몇 해 동안 소린은 정말이지 놀랄만한 추진력으로 에레보르 왕국을 다시 세웠고, 다인은 소린이 제 짝으로 호빗을 맞이하려는 결정을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인은 소린에게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에레보르의 왕은 소린이 되어야만 하고, 왕위는 자신이 아닌 소린의 후계자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조건. 어쨌든, 소린은 몇 년이 지나서야 샤이어로 빌보를 데리러 갈 수 있었다.
에레보르 성에 발을 디딘 빌보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에레보르는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많은 드워프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재건한 그들의 왕국은 거의 예전에 근접하게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예전과 달리 삶의 생동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주변을 돌아보느라 부산스러운 빌보의 어깨를 소린이 가볍게 잡아 세웠다.
"발밑을 조심하게, 마스터 호빗."
"오, 난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미끄러질 정도로 서투른 호빗이 아니에요."
"알고 있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소린은 마치 아르켄스톤을 대하듯이 빌보의 허리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소린의 다정한 에스코트가 낯간지러운지 빌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성에서 일하는 다른 드워프들은 각자의 일에 전념하는 건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눈치챈 빌보는 그의 작은 손을 조심스레 소린의 손에 포갰다. 그런 빌보를 바라보는 소린의 눈가가 부드러워졌다. 온화한 공기가 둘 사이에 흘러,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둘을 필리와 킬리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저건 안 좋아."
"매우 안 좋지."
"저 둘은 어린애가 아니라고."
"아니고말고. 특히 삼촌은 더더욱."
팔짱을 낀 필리가 심각하게 말하면, 자신의 허리에 손을 짚고 있는 킬리가 진지하게 맞장구를 쳤다.
"저래서야 첫날밤은커녕 키스라도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게다가 다인 삼촌은 아직도 빌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야겠군!"
필리와 킬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장난기 많은 젊은 두 드워프는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계획을 짜고, 실행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실행한 건 빌보의 거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필리와 킬리는 빌보의 침대와 바닥을 오가며 칼싸움을 하며 뒹굴었을 뿐이었으니. 빌보를 위해 정성스레 준비했던 카펫과 오리털 침구, 나무냄새가 나는 의자들이 망가져 있는 모습을 보며 소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 이건.. 정말.. 굉장한 방이네요. 날 위해 이런 방을 준비해줘서 고마워요 소린."
빌보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채 말했다. 누가 봐도 필리와 킬리의 소행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들의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필리와 킬리가 뻔뻔하게 제안을 했다.
"어차피 방도 이렇게 된 거, 그냥 삼촌의 방에서 함께 지내는 게 어때. 빌보?"
"오해하지 마, 미스터보긴스. 그냥 삼촌의 방이 이곳에서 가장 넓거든. 그래서 제안하는 것뿐이지."
"그렇고 말고, 물론 침대도 가장 넓지만."
"필리, 킬리!"
소린이 엄하게 조카들을 향해 소리쳐 봤지만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낄낄대는 필리와 킬리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키득거리는 필리와 킬리의 뒤로 걸걸한 다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용 방이라면 성안에 충분히 많으니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지."
"아..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제 이름은 빌보 배긴스, 샤이어에서 온 호빗이죠."
빌보가 다인을 향해 인사를 건네자, 다인은 눈을 부라리며 빌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빌보가 여전히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소린의 짝이 될 빌보에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기에, 다인은 정중한 말투로 빌보를 향해 말했다.
"마스터 호빗이 쓸 방은 제가 직접 안내하겠소."
소린이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다인이 빌보의 작은 팔을 이끌고 사라졌고, 필리와 킬리는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했음에 분통을 터뜨렸다.
"손님용 방이라니!"
"안 되겠어, 빨리 다음 계획을 실행해야겠어."
필리와 킬리가 새로운 계획에 대해 논의하자, 소린이 조카들을 향해 낮게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필리, 킬리. 쓸데없는 짓은 적당히 하도록."
소린이 조카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남기고 빌보와 다인의 뒤를 쫓아 사라지고, 필리와 킬리는 키득거리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들었어?"
"적당히 하라고는 했지만.."
"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았지."
" 천하의 소린 삼촌이 말이야."
필리와 킬리는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서는 다인을 어떻게든 빌보와 소린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다인은 무척 단순하고 호쾌한 드워프라, 그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 일은 매우 간단했다. 그저 난쟁이들이 모두 모여 다시 돌아온 빌보를 위한 환영파티를 여는 동안 다인에게 열심히 술을 권하면 그만이었다. 처음엔 필리가, 그다음엔 킬리가, 그 후에는 원래 술자리를 좋아하는 봄부르를 비롯한 유쾌한 드워프 친구들이, 그다음에는 술이 강한 드왈린이, 그리고 눈치 빠른 발린이 마지막으로 다인에게 술을 권했다. 마지막으로 빌보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다인에게 술을 권하러 다가갔을 때, 이미 다인은 잔뜩 술에 취해 의자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다인이 곯아떨어지자마자 킬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빌보에게 달려왔다.
"미스터 보긴스! 이런 떠들썩한 자리는 피곤하지 않아? 샤이에에서부터 얼마나 먼 길을 떠나왔는데!"
필리 역시 그의 동생의 뒤를 따라와 빌보의 한쪽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렇고말고, 빌보는 휴식과 안정을 가장 중요시하는 호빗이거든!"
킬리와 필리가 빌보의 양팔에 하나씩 팔짱을 끼자, 빌보의 몸이 공중으로 살짝 들어 올려졌다. 빌보가 공중에 뜬 다리를 바동거리며 두 장난꾸러기를 향해 말했다.
"아니 난, 좀 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있.."
"뭐? 당장에라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오 이런, 빌보의 상태가 이렇게 안 좋은데 그를 작고 차가운 손님용 방에 재울 수는 없지."
"그럼 에레보르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늑한 방으로 안내하자."
"그런 장소라면 틀림없이 그곳이지."
"삼촌의 방!"
빌보가 무슨 말을 꺼낼 틈도 없이, 킬리와 필리가 정신없는 대화를 나누며 호빗을 납치하듯이 데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난쟁이들은 모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필리와 킬리는 언제나 그들이 있는 장소의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지. 그런데 정작 소린의 모습은 아까부터 통 보이지 않았다.
"소린은 어디 있어?"
"뭐, 자기 방에 있겠지."
"곧 빌보와 재회하겠군."
난쟁이들은 늘 그렇듯이 자잘한 일들은 잊고 다시 떠들썩한 그들의 환영파티를 이어갔다. 비록 환영파티의 주인공은 킬리와 필리 손에 끌려가 자리를 떠났지만.
***
" 뭐야? 삼촌은 어디 갔어?"
필리와 킬리가 빌보를 끌고 소린의 방으로 올라갔으나, 소린의 모습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필리는 빌보를 내려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근처에서도 인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자, 필리와 킬리는 흩어져서 삼촌을 찾아오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빌보가 그런 둘을 불러세웠다.
"음.. 필리,킬리. 아까부터 계속 무슨 생각인지는 알 것 같지만.."
"안다고?"
필리와 킬리가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치자, 빌보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두 난쟁이를 향해 단호하게 엄포를 놓았다.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당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고요. 그러니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요."
"들었어 킬리? 저 호빗이 방금 '우리'라고 말했어."
"과연.."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필리와 킬리를 향해 빌보가 가슴을 내밀며 꼿꼿하게 서서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다지 효과는 없었지만, 빌보 나름대로는 대단히 진지한 선포였다.
"어쨌든 내가 이곳에서 소린을 기다릴 테니, 당신들은 더 이상 당신들의 삼촌을 귀찮게 하지 마세요. 그는... 알다시피 신경 쓸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빌보의 말에 필리와 킬리는 의외로 순순히 웃으며 물러섰다. 그들은 이 조그만 호빗 얼마나 강단 있고, 자신이 한번 마음을 먹은 일에 물러서지 않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자신들의 숙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킬리와 필리는 여전히 떠들썩한 파티가 이루어지고 있는 홀로 떠났다. 두 드워프가 떠난 소린의 방에서 빌보는 가만히 방의 주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빌보는 킬리의 말대로 에레보르에서 가장 크고 넓을 것으로 보이는 소린의 침대 한 귀퉁이에 앉았다. 침대에서 어렴풋하게 소린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 얼마나 그리워했던 향기인가. 빌보는 마치 침대에 놓인 베개가 소린이라도 된 듯이 소중하게 끌어안고는 생각했다. 아마도 소린의 두 조카는, 자신들의 삼촌과 빌보가 스킨쉽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수줍은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서 온종일 두 사람을 엮어주기 위해 뻔히 눈에 보이는 온갖 소동을 일으켰을 테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빌보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 필리, 킬리.. 난 정말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빌보는 소린이 자신을 데리러 샤이어로 찾아왔던 그 날을 떠올렸다. 백엔드의 호빗 굴에는 서로의 마음을 막 확인한 애틋한 연인들이 있었다. 빌보는 자신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드워프를 향해 바로 달려들어 키스하지 않을 정도로 소극적인 호빗이 아니었으며, 소린은 자신에게 안겨 뜨겁게 입 맞추는 호빗을 가만히 내버려 둘 정도로 메마른 드워프가 아니었다. 이미 샤이어에서, 그리고 에레보르로 함께 돌아오면서 수많은 밤을 지내며 서로의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알아온 소린과 빌보는, 필리와 킬리의 귀여운 걱정이 필요 없는 명백한 어른이었다.
주인 없는 방에서 빌보가 그렇게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부끄러움에 몸부림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빌보는 슬슬 아직도 방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소린이 걱정됐다. 방문을 나와 어둠이 내려앉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맨발로 걸으며, 빌보는 소린이 갈 만한 장소를 떠올렸다. 아직도 시끄러운 파티가 이루어지고 있는 홀에는 가지 않았을 것 같고,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방에도 없을테고... 설마 아르켄스톤과 황금을 보관해둔 지하에 가있는 건 아니겠지? 빌보는 어쩐지 불길한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이 드워프가 또... 아냐. 그럴 리 없어."
빌보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모든 가능성을 도리질 치며 떨쳐내려 했다. 그러자 문득 빌보의 머릿속에 어떤 한 장소가 떠올랐다. 빌보의 발길이 자신을 위해 임시로 마련된 거처로 향했다. 재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자, 빌보를 위해 처음 준비되었던 방과 달리 무척이나 작고 단출한 손님용 방이 보였다. 조심스레 그 방의 문을 열자, 빌보가 사랑하는 그의 참나무 방패 소린이 조용히 그를 맞이했다.
"빌보."
"이런.. 계속 여기 있던 거예요, 소린?"
"술자리가 꽤 즐거웠나 보군."
"아니요. 난 술이라고는 구경도 할 틈이 없었어요. 난... 당신의 방에서 계속 당신을 기다렸는걸요."
빌보의 말에 소린이 얼핏 허탈하게 웃었다. 둘은 서로 각자의 방에서 엇갈린 채 서로를 기다리며 바보 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었다. 빌보는 소린의 옆자리에 다가가 익숙한 듯이 자리를 잡았고, 소린 역시 당연하다는 듯 몸을 틀어 그의 연인을 위한 틈을 내주었다. 빌보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묵직한 그의 팔을 자신의 등 뒤로 두르며 말했다.
"필리와 킬리말이, 자기들이 나서지 않으면 우리가 키스조차 하지 못할거래요."
"바보 같은 소리."
소린은 빌보의 얼굴을 향해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거리를 좁혀왔다. 숨소리마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빌보는 필리와 킬리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착한 아이들이에요. 삼촌의 연애사까지 걱정해줄 정도로. 물론, 당신이 나를 위해 마련해 준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건 그다지 착한 행동이 아니었지만요."
"그것 역시 잘한 일이지."
"잘한 일이라고요?"
빌보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린은 자신의 입술을 빌보의 입술 위에 살포시 포갰다. 소린이 이렇게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키스를 하는 드워프라는 건 빌보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 눈을 감은 빌보의 얼굴 위로 소린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금 가까워져 왔다.
"어차피 필요 없는 장소였어. 처음부터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던 거지."
"뭐라고요?"
"이제부터는 내 방의 넓은 침대에서 벗어날 일이 없을 테니까. 빌보 배긴스."
빌보는 자신의 대답은 필요하지도 않다는 듯이 입술을 덮고 말캉하게 밀려 들어오는 그의 연인을 느끼며,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에레보르든 샤이어든, 빌보의 방이든 손님용 방이든 빌보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소린의 곁이 자신이 영원히 머물 장소라는 건, 이미 오래전에 다짐했던 사실이었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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