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Unkindness <1>
Unkindness
1.
외로운 산 아래 에레보르 왕국에는 낯선 종족의 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빌보 배긴스'이며, 그는 간달프의 손에 이끌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종종 에레보르를 방문하고는 했다. 샤이어의 작은 마을에서 언제나 바깥세계를 궁금해하고 있던 작은 호빗 소년은 처음으로 보게 된 낯선 풍경들이 전부 신기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난쟁이들의 빛나는 왕국 에레보르였다. 최초로 눈에 담은 그 웅장하고 화려한 에레보르의 모습에 마음을 뺏긴 어린 호빗은, 그 이후로 종종 간달프와 함께 위대한 드워프의 왕국을 찾아왔다.
간달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중간계의 어떤 종족보다도 호빗을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빌보 배긴스를 가장 아꼈다. 그는 직접 빌보의 부모를 만나, 당신들의 아이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것을 권했다. 그 덕에 빌보는 호빗치고는 이례적으로 중간계의 이곳저곳을 직접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에레보르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드워프의 젊은 왕자를 만날 수 있었다. 드워프의 왕인 스라인의 아들 소린은 차가운 남자였다. 젊고 미남이었지만, 그다지 웃는 일이 없었고, 언제나 딱딱한 말투로 간달프를 상대했다. 그들이 몇 차례나 마주치는 동안, 소린이 간달프의 옆을 따라다니는 작은 호빗에게 말을 걸거나 시선을 주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엔 왕자의 모습에 관심을 보였던 빌보는, 그의 차가운 반응에 곧 흥미를 잃었다. 빌보의 시선이 다시금 소린을 쫓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몇십 년이나 지났을 때였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빌보는 채 성인이 되기 전에 샤이어를 떠나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난쟁이들의 호의 덕분에 빌보는 에레보르에 언제까지나 머무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살 새로운 집도 얻었다. 빌보는 난쟁이 왕의 호의에 마음 깊이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당시 에레보르의 새로운 왕은 다름 아닌 소린 오큰실드였다.
"오리, 부탁했던 문서의 필사본이에요."
"이런, 고마워요. 빌보.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빌보가 오리에게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를 건네자, 오리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오리는 몇 번이고 빌보를 향해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빌보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칭찬을 듣는 것에도 어느덧 익숙해진 빌보였다. 난쟁이들 사이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한 지도 7년, 빌보는 에레보르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능숙한 심부름꾼이 되어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저곳에서 빌보를 찾는 드워프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고, 빌보는 작은 몸으로 열심히 그들의 일을 도왔다.
왕은 빌보가 딱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지원을 해주었으나, 그것을 넙죽 받아 평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빌보는 그래서 스스로 이런저런 잡일들을 도우며 심부름꾼을 자처했고, 이제는 빌보가 아니면 안될 정도로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난쟁이들이 잔뜩이었다. 그중에서도 오리는 빌보의 단골손님이나 다름없었다. 빌보만큼이나 깔끔하고도 빠르게 글씨를 쓸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빌보도 그 일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언제든 오리의 부탁은 기꺼이 수락했다. 하지만 정작 빌보가 가장 좋아하는 심부름은 따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발린의 심부름을 하러 가야 할 시간이네요."
"맞아요. 오, 서둘러야겠네요. 창고에서 말린 찻잎도 챙겨가야 하거든요."
한껏 들떠서 상기된 표정으로 들떠 달려가는 빌보를 바라보는 오리의 얼굴이 근심으로 물들었다. 오리는 도저히 빌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시무시한 왕의 서재로 차를 가져가는 일이 뭐가 그렇게 신나고 즐거울까. 특히 그 왕은, 빌보를 상대해주지도 않을뿐더러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를 경멸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차가운 난쟁이인데.
똑똑-
빌보가 노크를 하고 왕의 서재로 들어갔으나, 소린은 언제나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 번쯤은 시선을 마주쳐줄 법도 하건만, 왕은 언제나 시리도록 차갑고 매정했다. 빌보는 익숙하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문을 열고 다가가 소린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햇살이 참 좋네요. 소린전하. 그래서 오늘의 차는 특별히 햇살의 향을 듬뿍 담아 말린 꽃차로 준비했죠. 제가 올봄부터 공들여서 말렸으니, 기대할 만할 거예요. 엘프들의 차와는 비교도 안 될걸요."
"..."
빌보가 혼자 열심히 재잘거리며 찻잎을 꺼내 끓인 물을 붓고, 왕의 옆에 놓인 테이블에 가져다 두는 순간까지. 소린은 단 한 차례도 빌보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매일 이런 식이긴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소린이 더욱 야속한 빌보였다.
'이번엔 정말 열심히 만든 차였는데.'
빌보는 햇살이 드는 창 아래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책을 읽고 있는 소린의 모습을 두 눈 깊숙이 담았다. 비록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이마 끝부터 발끝까지 왕족으로 태어나 자란 이의 고귀함이 가득 흘렀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와 곧은 시선은 언제나 책을 향해 있었고, 단 한 번도 빌보를 향한 적이 없었다. 소린은 에레보르의 어떤 난쟁이보다도 가장 빌보를 싫어하는 난쟁이였으니까.
따뜻한 샤이어의 햇살 아래서, 유복하고 부족함 없이 자란 빌보는 온몸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의 기운을 뿜어냈다. 누구를 만나도 주눅이 들지 않았으며, 어떤 대화를 던져도 막힘이 없이 이어갈 수 있는 재치가 있었다. 어찌 보면 소린과 빌보는 꽤 비슷한 태생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부모님의 깊은 관심, 부유한 환경, 모든 이들의 존경. 하지만 소린은 빌보가 가지지 않은 것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무와 부담. 소린의 어깨 위에는 어린 시절부터 너무도 많은 것들이 얹혀져 있었다. 아무런 의무없이 그저 사랑만 받아도 괜찮던 호빗의 아이와는 달랐다.
젊은 소린이 에레보르에서 철없이 밝은 빌보를 만나자마자, 빌보의 존재는 소린에게 깊은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다. 빌보에게는 왕국을 책임지고 다스려야 하는 의무도, 왕의 권위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속박도 없었다. 그러나 소린의 어깨 위에 짊어진 것들의 무게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사하고 난 이후에 더욱더 그를 짓눌러만 갔다. 소린은 매일 밤 악몽을 꾸며 고통 속에 잠들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마다 들려오는 빌보의 목소리는 밝고 행복하기만 했다. 그것이 소린을 더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소린은 빌보가 에레보르에 머무르고 있는 내내 단 한 번도 따듯한 말이나 시선을 건네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빌보는 대답이 없는 매정한 왕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왕의 서재를 나섰다. 모두가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빌보에게는 이 심부름을 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원래 이 일을 해야 했던 발린이 바쁜 것이 무척이나 고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빌보에게는 이 시간만이 왕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허락된 유일한 시간이었다. 빌보는 몇 년 전에 이미 평생 왕을 사랑하며, 그 곁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비록 왕이 그를 경멸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을 다 주기에 충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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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부작 목표로 연재합니다. 냉정한 젊은 왕 소린을 짝사랑하는 빌보로 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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