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Unkindness <3>
Unkindness
3.
왕은 고독한 난쟁이였다. 그것은 그의 조부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이 죽고 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고독할지언정 불쌍하거나 가엾게 여겨져서는 안 됐다. 왕이 조금의 허점이나 약한 부분을 보인다면 언제든 그 틈을 파고드는 악한 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에레보르가 굳건하게 유지되게 하도록 소린은 자신을 동정하는 자를 용서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겁에 질려 떨고 있는 하찮은 호빗의 입에서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죄송해요. 깜박 잊고 램프를 침실에 들여보내지 못해서 조용히 가져다 두고 간다는 게 그만…. 소린 전하께서 너무 고통스러운 악몽에 시달리시기에 잠시만 지켜보다가 나가려 했는데…. 제 실수였어요."
"악몽..?"
"전하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어요. 돌아가신 스라인님의 이름을 너무 고통스럽게 부르셔서.. "
빌보는 조심스레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며 슬쩍 고개를 들어 소린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이제껏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차가운 소린의 표정이, 빌보의 변명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린이 성큼성큼 다가와 빌보의 멱살을 잡아 올리자, 작은 호빗의 두 발은 바닥에서 떨어져 공중에서 애처로이 흔들렸다. 왕은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분노에 차 빌보를 윽박질렀다.
"누가 네게 내 침실에 램프를 들여놓으라고 했지? 오인인가?"
"아, 아녜요! 오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제가.. 제가 억지로 오인에게서 램프를 뺏어왔습니다. 정말이에요."
빌보는 필사적으로 오인을 두둔했다. 오인에게 부탁을 받기는 했지만, 분명히 이 사태는 빌보의 실수였다. 어젯밤 빌보가 보였던 순간의 동정심이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고, 소린 역시 그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다른 무엇보다 빌보가 자신을 동정했다는 사실이 그를 진노하게 하였다. 감히, 하찮은 호빗 주제에. 내가 베푸는 호의로 겨우 에레보르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미약한 존재주제에. 소린의 머릿속에 빌보를 비난할 수만 가지 말들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소린은 입 밖으로 어떤 말도 내뱉지 않고 빌보를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빌보를 쫓아내 버리고 싶었으나, 소린에게는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당장 내방에서 나가."
낮게 내리깔려 울리는 소린의 목소리에, 빌보는 힘없이 왕의 침실을 나섰다. 그래도 자신에게 호된 벌을 주거나 에레보르에서 쫓아내지 않은 왕의 친절에 빌보는 다시금 따뜻함을 느꼈다. 그는 그런 난쟁이였다.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빌보를 도와준다. 그것만 있으면 빌보는 어떤 상황도 참아내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린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빌보를 향한 친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빌보가 알지 못하는 몇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중 첫 번째 비밀은, 왕의 마음속에는 빌보가 기대하는 것 같은 상냥함이나 친절은 한 움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소린은 빌보가 나가자마자 발린을 불러 간달프의 행방에 관해 물었다.
"그는 아직도 남쪽 땅을 헤매고 있는 건가? 언제쯤 에레보르에 돌아온다고 하던가."
"마법사들이란 언제나 바람 같은 존재입니다. 자신의 행선지를 예고하거나 일정에 맞추어 나타나지 않는 자들이죠."
간달프. 회색의 마법사. 선대의 왕이었던 스라인이 그를 지나치게 아꼈던 탓에, 소린은 그의 간곡한 부탁을 함부로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7년 전 억지로 빌보를 맡겼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만 해달라고 청했다. 빌보의 부모님에게 쓰인 불명예스러운 모함을 벗겨내고 그를 백 엔드로 데려가겠다고 한 것도 간달프였다. 그때까지만 잠시 빌보를 머무르게 할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소린은 빌보로 하여금 스스로 에레보르를 떠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왕이 발린에게 새로운 명령을 전달하자, 발린의 표정이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발린은 왕의 지시에 이러쿵저러쿵 반박하지 않는 충직한 신하였으나, 이번만큼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왕에게 반문하였다.
"전하, 이 심부름은 빌보가 하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남들이 하기 곤란한 심부름을 하는 것이 그 호빗의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우리 동족들이 베푼 은혜에 보답해야만 하네. 어떤 난쟁이가 흔쾌히 엘프의 땅에 들어가겠나. 이 일은 그 호빗이 해야만 하는 일이야."
소린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들은 어둠 숲의 엘프들에게 서신을 전달해야 했으나, 엘프의 땅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난쟁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어둠 숲까지 가는 길에는 거미들이 진을 치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위험한 지역이 있었다. 빌보 혼자만 그곳으로 보내는 것은 그에게 죽으러 가라고 명령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발린은 소린이 빌보에게 지나치게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발린은 왕의 서신을 받아들고 문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왕에게 신중하게 물었다.
"빌보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러나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린은 그의 침묵을 뒤로 한 채, 빌보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러 떠났다. 왕은 발린의 질문에 침묵했으나, 사실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냥 빌보가 싫고 거슬리다고만 생각했지, 왜 하필 그렇게까지 그가 싫은지에 대해서는 소린 스스로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다른 그에게 질투를 느꼈던 것도 열등감을 느꼈던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린 시절의 일일 뿐이었다. 그 시리던 겨울 에레보르를 찾아오던 빌보의 신세가 어떻던가. 그는 가족도 집도 명예도 잃은, 갈 곳 없는 작고 허약한 호빗일 뿐이었다. 소린의 동정과 호의가 없다면 당장 몸을 의지할 곳조차 구하지 못할 비참한 호빗.
간달프가 빌보를 데려왔던 그 날, 소린은 내심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해맑게 웃거나, 사랑받은 아이의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일 일도 없을 것이다. 빌보에게 남은 건 비참하게 엎드려 소린의 동정을 갈구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불쌍한 표정이 보고 싶어, 소린은 처음으로 자신의 아래 엎드려있는 빌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잠깐 고개를 들었던 빌보와 시선이 마주쳤다. 소린의 예상대로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슬픔과 고통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의 눈은 올곧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자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소린은 더욱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겁에 질린 듯 빌보의 고개는 이내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그러나 잠시 스쳤던 그의 올곧은 눈빛이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소린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 눈을 생각하면 소린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왕은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해야 한다. 그런데 빌보의 눈빛은 자꾸만 소린의 마음속에 있는 아주 깊은 무언가를 자극했다. 그래서 소린은 빌보를 철저하게 짓밟기로 했다.
빌보에게 어떠한 친절이나 따뜻한 눈길을 건네지 않는 것은 물론, 그를 철저하게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난쟁이가 있으면, 먼 곳으로 임무를 주어 몇 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소린이 빌보를 향해 행한 것 중에 가장 잔인한 행동은 따로 있었다. 몇 년 전쯤 샤이어에 있는 빌보의 친척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한 적이 있었다. 빌보의 부모님을 모함해 빌보의 재산을 빼앗았던 그 친척이었다. 그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저지른 악행에 대해 사과하고, 빌보에게 백 엔드를 다시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빌보가 에레보르의 난쟁이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소린에게 서신을 보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소린이 휩싸였던 감정은 한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유모를 초조함과 두려움, 분노가 그를 옭아맸다.
'그 호빗에게 아무것도 되돌려줘서는 안 된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소린은 그렇게 빌보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가족도 친구도 집도 명예도, 모두 돌려줄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목숨마저 위협할 위험한 임무를 전달하려 했다. 소린이 행한 모든 비밀은 오직 발린만이 알고 있었다. 발린은 빌보의 방앞에 다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빌보에 관해서 만큼은 소린의 행동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완벽한 주군이었다. 그리고 발린은 소린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발린의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노크를 하기도 전에 빌보가 스스로 방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혼자 울기라도 했는지 그의 눈은 조금 충혈이 되어있었으나, 빌보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이 씩씩했다.
"어서 오세요 발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왕의 심부름을 해줘야겠네."
왕의 심부름-!
빌보의 얼굴빛이 묘한 색으로 상기되었다. 기대인가 두려움인가-. 소린이 빌보에게 심부름을 맡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빌보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부름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서신을 다 읽어보고 난 뒤에도 빌보는 당황하지 않았다.
"제가 혼자 하기엔 불가능한 심부름이네요."
"자네가 원치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네. 자네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일을 돕는 거지, 전하의 하인이나 신하가 아니질 않나."
"소린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거겠죠. 내가 이 일을 포기하고, 스스로 에레보르를 떠나는 것이요."
빌보의 말에 발린이 소스라치게 놀라 손사래를 치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에레보르를 떠나다니! 고작 왕의 심부름 하나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소린이 간달프의 손님을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빌보를 향한 소린의 이상한 증오를 생각하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걱정 말아요 발린. 나는 이 심부름을 할 거고, 내 발로 에레보르를 떠나지도 않을 거니까."
"자네는 왕을 원망하지 않는군."
발린이 묻자, 빌보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보의 얼굴 가득 왕을 향한 신뢰와 사랑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발린을 놀라게 하였다. 빌보가 에레보르에 와서 소린에게 받은 것이라곤 한결같은 냉대와 무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왕의 어떤 점이 이 호빗으로 하여금 저러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인가. 발린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빌보를 향해 물었다.
"왜지?"
"소린은 비록 내게 냉정하게 굴지만, 정말 내가 위험할 만한 일은 시키지 않는 친절한 난쟁이예요. 실제로 어제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날 쫓아내지 않았고…. 그리고 내가 그의 따뜻함을 느낀 사건은 따로 있어요."
"그게 뭔가?"
"내가 에레보르로 처음 왔던 날,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잖아요. 기억해요. 발린?"
빌보의 물음에 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빌보를 발견한 것이 바로 발린이었으니까. 빌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소중한 추억을 회상하며, 애틋한 목소리로 그때 받았던 소린의 친절에 관해 이야기했다.
"난 똑똑히 기억해요. 그때 사경을 헤매던 내 이마를 짚어주던 투박한 손길을. 믿을 수 있겠어요 발린? 그때 날 낫게 만든 약초는, 왕족만이 구할 수 있는 고귀한 약초였어요."
"...!!"
발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빌보의 어깨를 부여잡고 그답지 않게 큰소리를 내며 외쳤다. 그것이 빌보가 왕의 구박을 참아냈던 이유였냐고.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왕을 믿고 위험한 임무를 받아들려는거냐고. 빌보는 발린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발린은 그런 빌보의 표정을 보며 절망감에 무너져내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빌보를 위해서 그의 착각을 깨부숴줄 필요가 있었다. 발린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고 있는 빌보를 향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진실의 말을 전해주었다.
"빌보.. 그날 왕은 자네에게 약을 보내지 않았네. 그 약초는.. 내가 동생을 시켜 몰래 훔쳐오도록 한 거야."
"....그..그럴리가."
"빌보. 왕께선 단 한 번도 자네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없어. 그건 자네의 착각이었을 뿐이야."
빌보의 낯빛이 그 어느 때보다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믿기 힘든 진실을 맞이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빌보가 왕을 사랑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작은 친절 하나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거짓일 리가.
"그날 분명 누군가 앓아누운 내 이마에 손을 짚어주었어요. 그건 발린 당신의 손도 아니고, 간달프의 손도 아녔다고요. 분명한 젊은 드워프의 손이었는데.."
"...아마도 그건 내 동생 드왈린이었겠지."
발린이 전해준 진실에 빌보의 모든 것이 부서졌다. 진작에 조각난 마음을 겨우 이어붙이고 있던 접착제가 사라졌다. 왕은 그에게 작은 친절조차 허락한 적이 없었다. 빌보의 마음을 붙이고 있던 것은 친절이 아니라, 착각일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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