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Unkindness(完)) 15. 7. 2

[소린빌보] Unkindness <4>

Unkindness

4.



 차라리 열병이라도 난다면 좋을 텐데. 아니면, 이대로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든지.


 눈을 뜨자마자, 빌보는 자신이 태어난 이래 맞이한 가장 최악의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발린의 말을 들은 후,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빌보는 패닉에 빠져있었다. 평소라면 빌보에게 시답지 않은 잔심부름을 신나서 시켜댔을 킬리도 빌보에게 일찍 들어가 쉬는 것을 권할 정도였으니. 빌보는 선뜻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침대로부터 억지로 일으켰다. 인간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여인들이 잘도 쓰러지거나 기절하거나 하던데, 왜 자신은 이렇게 멀쩡한지. 빌보는 언제나 자랑으로 여기던 자신의 체력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물론 빌보의 체력만큼 그의 마음도 멀쩡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빌보의 심장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잔뜩 난도질이 되어있는 채였다.


 어젯밤 빌보는 자신의 작은 방으로 돌아와 베개 아래 머리를 파묻고 소리죽여 울었다. 원망, 서러움, 슬픔. 갖가지 감정이 엉켜진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으로 빌보를 옭아맸다. 개중에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도 한 가닥쯤 섞여 있었다. 열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던 상태에서 보았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 자신은 왜 그것이 소린이라고 확신했던 것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소린은 빌보에게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는데, 빌보는 무슨 근거로 그의 진심은 따뜻할 것이라고 믿었던 건지. 그 착각의 기반은 아마도 빌보의 희망 사항이었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그가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가 자신에게 아주 작은 친절을 베풀 정도의 호감은 가지고 있으리라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도저히 그의 차가운 시선을 참아낼 수 없었는걸.."


 아무도 없는 방안인 걸 알면서도 빌보는 변명하듯 혼잣말을 소리 내 내뱉어보았다. 오늘은 빌보가 처음으로 소린의 심부름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빌보는 어쩌면 이 아침이 에레보르에서 맞이하는, 아니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아침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작고 낡은 방을 나섰다.




 난쟁이들은 왕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빌보를 돕겠다며 제각각 자처하고 나섰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빌보를 도우려 했던 난쟁이는 단연 오인이었다. 소린이 빌보에게 내린 명령은 삽시간에 온 성안에 퍼졌고, 오인은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임을 금방 알아채고 말았다. 오인은 정신없이 소린을 찾아가 자신이 램프를 가져다 두는 담당이었고, 빌보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 잘못이 없다고 고했다. 그러나 소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뒤늦게 오인을 말리러 달려왔던 빌보는 그때의 소린의 표정을 똑똑히 보고 나서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소린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빌보를 향한 감정이라고는 정말 한가지뿐이었다는 것을. 경멸.


 빌보는 오인을 억지로 떼어내 문밖으로 내보내고는 왕 앞에 홀로 섰다. 유난히 왕좌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싸늘했다. 소린의 차가운 얼굴에 약간의 조소가 서렸다. 그는 빌보가 과연 어떤 태도로 자신의 심부름을 거절할지 궁금했다. 자신은 에레보르의 손님이지, 왕의 신하가 아니라고 뻔뻔한 태도로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비굴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이유로 들어, 이 위험한 명령을 거두어달라고 애걸복걸할 것인가. 빌보가 무슨 말을 하건, 소린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왕의 명령에 불복하겠다면, 에레보르를 스스로 떠나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빌보가 입을 열었다.


 "7년 전에…. 왜 날 받아줬어요?"


 호빗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왕이 기대했던 비굴한 애원도, 뻔뻔한 주장도 아니었다. 빌보는 어딘지 절박한 눈빛으로 소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왕이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대답을 내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남들이 듣기엔 별거 아닌 시시한 이유여도 좋다. 동정이어도 좋고, 안타까움이어도 좋았다. 빌보는 소린의 마음에서 마지막 희망 한줄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빌보의 마음을 이어주던 접착제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왕이 빌보에게 조금의 동정이라도 품었던 적이 있었다면 빌보는 그것만으로도 계속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빌보의 표정이 어찌나 절박하고 간절해 보이던지, 소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누그러진 목소리를 들려줄 뻔했다.


"그건..."


 소린은 자신도 모르게 왕좌에서 일어나 빌보를 향해 다가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스러질 것 같아 보이는 호빗의 어깨는 드워프의 한 손에 충분히 잡힐 만큼 말라 있었다. 누가 보면 굶기기라도 하는 줄 알겠군. 소린은 처음으로 빌보를 가까이서 바라보며 생각했다. 멀리서 지켜보았던 것 보다 호빗이라는 종족은 훨씬 작고, 약해 보였다. 이런 연약한 호빗 혼자서 사악한 자들이 가득한 숲을 지나가라는 것은 역시 가혹한 명령이겠지. 그리고 그러다가 빌보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런 명령을 내린 자신과 에레보르의 드워프들은 명예스럽지 못한 소문에 휩싸일 테고. 왕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빌보는 한층 더 불안한 눈빛으로 소린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견고한 확신에 차있던 그의 눈빛이 오늘은 잔뜩 흐려져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나 흐트러뜨리고 싶었던 빌보의 당당한 눈빛이었지만, 막상 흔들리는 빌보의 눈빛을 보니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는 소린이었다. 소린은 잡고 있던 빌보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고, 평소와 같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매정하게 말했다.


 "그때 널 받아준 건 간달프의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은인이기에, 난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만일…. 간달프의 부탁이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내 왕국에 더러운 호빗의 아이는 절대 들이지 않았을 거다."


 그의 답이 나왔다. 비록 빌보가 원하던 최선의 답은 아니지만, 이제 더는 소린에게 미련이나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빌보는 잠시 어지러운 듯 휘청거렸으나,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 중심을 잡았다. 다시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누군가의 동정이나 친절을 기대하며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빌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왕을 향해 말했다.


 "알겠어요. 당신이 부탁한 심부름…. 수락하겠습니다."


 소린은 어딘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빌보를 바라보았으나, 빌보는 그런 왕으로부터 눈길을 피하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빌보가 사라지고 홀로 왕좌에 앉아있던 소린은 문득 빌보가 지난 7년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눈길을 피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을 이루었으나, 그 기분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즐겁거나 개운치 않았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났다.


 호위도 없이 맨몸으로 어둠 숲으로 떠났던 호빗은 모두가 예상했던 곤경과 맞닥뜨렸다. 오랜만에 발견한 먹잇감을 보고 흥분한 거미들을 향해 빌보는 짧은 칼을 휘둘러보았지만, 거미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 마침 근처를 순찰하던 엘프의 경비대장이 빌보를 발견했다. 붉은 머리의 그녀는 거미로부터 능숙하게 빌보를 구출해내고는, 만일 곤경에 처한 것이 호빗이 아니라 드워프였다면 절대로 구해주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후로는 빌보에게 아무런 어려움도 닥치지 않았다. 엘프의 왕이 빌보가 전달한 서신을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며 작은 이 종족의 전령을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빌보가 안전하게 에레보르로 돌아갈 수 있도록, 빌보에게 호위병사까지 붙여주었던 것이다. 난쟁이의 땅으로 돌아올 때까지 빌보가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일은 없었다.


 그러나 빌보의 얼굴에서 예전과 같은 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요정들은 호빗이라는 종족이 원래 조용하고 기운이 없는 종족이라고 오해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빌보가 샤이어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여느 호빗 아이들과 똑같이 요정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둠 숲에 머무르는 동안 빌보의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소린이 빌보에게 남긴 상처는 깊고도 쓰라린 것이었다. 빌보 자신도 이만큼이나 소린에게 마음을 내어주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바보같이 뭘 믿고 그렇게나 소린을 사랑했었나. 그의 친절이 착각이었는지도 몰랐으면서. 호빗의 작은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져 왔다. 자신의 사랑이 보답 받기를 바랬던 것도 아닌데, 마음을 준 대가는 너무도 컸다.


 빌보가 무사히 에레보르 근처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어둠 숲의 호위병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빌보는 성벽 근처 연못가에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레보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소린이 없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제 빌보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도, 돌아갈 고향도, 의지할 친구도 없다. 비록 허상이기는 했지만, 유일하게 있다고 생각했던 소린의 친절도 사라졌다. 이젠 무엇에 마음을 의지해야 할 것인가. 빌보의 눈앞에는 캄캄한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가며, 빌보의 몸이 서서히 수면으로 기울었다. 빌보 역시 그 사실을 인지했으나, 그는 이제 완전히 지쳐있었다. 더는 희망을 품거나,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서서히 물속으로 떨어지며, 의식을 잃었다. 



<계속>



소장단행본 수량조사가 진행중입니다. 

2015/07/18 - [인포] - [수량조사 공지]

위 글의 공지를 참고해주세요.

'호빗(Hobbit) > Unkindness(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린빌보] Unkindness 完.  (2) 2015.07.24
[소린빌보] Unkindness <5>  (4) 2015.07.23
[소린빌보] Unkindness <3>  (2) 2015.07.09
[소린빌보] Unkindness <2>  (2) 2015.07.05
[소린빌보] Unkindness <1>  (0) 2015.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