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Unkindness <2>
Unkindness
2.
빌보가 방문자의 자격이 아닌, 거주민으로서 에레보르로 왔던 날 외로운 산에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빌보의 부모님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호빗치고 드물게 여행과 뱃놀이를 좋아하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뱃놀이 중 갑자기 몰아친 폭풍우에 휩쓸려, 아직 채 성인이 되지 않은 외동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빌보에게는 그를 보호해줄 친척들이 많이 있었다. 부모님의 죽음이 무척이나 슬프긴 했지만, 그래도 빌보는 자신이 샤이어에서 계속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빌보의 착각이었다. 자신만 믿으라고 신신당부하던 친척들은 갑자기 죽은 빌보의 양친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저주를 걸어 샤이어에 전염병을 퍼뜨리려 했다는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었다. 빌보는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뀐 친척들의 모습이 낯설고 공포스러웠다. 무엇이 그들을 갑자기 변심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빌보 혼자서 해명하기엔 호빗들의 의심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간달프의 손에 이끌려 샤이어를 쫓겨나듯이 떠나는 동안, 빌보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강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억울하게 빼앗긴 백엔드를 되찾고, 부모님의 누명을 벗겨드려야 했다. 작은 두 주먹이 새하얘지도록 꾹 쥐고, 빌보는 그렇게 차가운 한겨울의 에레보르로 왔다. 하지만 그날, 매서운 날씨보다 더욱 차가웠던 것은 빌보를 바라보는 에레보르의 새로운 왕, 소린의 눈빛이었다.
"산밑의 왕, 스라인의 아들 소린이시여. 이 호빗족의 아이를 기억하실 거라 믿습니다. 샤이어의 붕고 배긴스의 아들 빌보 배긴스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에레보르를 방문해 선왕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는 했죠."
"그래서, 무슨 일로 내게 그를 소개하는 건가. 회색의 마법사여."
간달프가 빌보를 소개하는 동안에도, 소린의 시선은 빌보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어째서 그가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던 빌보였다. 샤이어의 동족들도 자신을 외면했는데, 자신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먼 곳의 난쟁이가 따뜻한 정을 베풀어주기를 바랄 수는 없지. 빌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바닥만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간달프가 간곡하게 빌보의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딱 한 번 빌보가 고개를 들어 소린을 바라보았다. 스라인왕이 서거하고, 이제 막 새로운 왕이 된 젊은 난쟁이 소린이 처음으로 빌보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 시선이 어찌나 냉혹하고 싸늘한지, 빌보는 온몸이 얼어붇는 것 같은 느낌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다시금 바닥만 살폈다.
"좋소. 그를 에레보르에 머무르게 하시오. 난쟁이들에겐 이 정도 호의야 아무 일도 아니지."
뜻밖의 허락에 빌보가 놀라 소린을 바라보았다. 소린은 간달프나 빌보를 향해 어떠한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냉랭하니 사라졌다. 그 이후의 일들은 발린의 몫이었다. 발린은 빌보를 데려가 그가 머물만한 집을 내어주고, 난쟁이들의 관습에 대해 하나하나 친절히 가르쳤다. 곧 몇몇 난쟁이들이 빌보를 찾아와 자신들을 소개했다. 에레보르의 드워프들은 대체로 유쾌하고 시끄러웠다. 그들이 머무르는 동안 빌보는 잠시 잊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았으나, 저녁이 되자 지독한 외로움이 몰려왔다. 게다가 간달프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그날 밤 빌보를 홀로 에레보르에 남겨둔 채 말을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낯선 집안에 남게 되자,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폭발했다. 빌보는 텅 빈 집안이 떠나갈 듯한 큰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었다. 그의 행복한 인생은 너무도 터무니없이 사라져버렸다. 의지할 곳도 마음을 붙일 곳도 없이, 이제는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야 할까. 이대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모든 것이 꿈이지 않을까. 빌보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고, 그날 미칠듯한 고열이 그를 덮쳤다.
빌보는 그날 이후로 내리 삼일을 꼬박 앓았다. 모두 그대로 빌보가 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아프고 난 이후로는 제법 씩씩한 호빗으로 돌아와 있었다. 빌보가 말끔하게 나은 이유는 특별한 약초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엘프의 숲에서만 나는 아주 희귀한 약초로, 드워프들 중에서는 왕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귀한 것이라고 했다. 빌보는 자신을 냉랭하게 바라보던 젊은 왕을 떠올렸다. 빌보에게 약초를 보내줄 만한 왕족은 소린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난쟁이들은 그 냉정한 왕이 그럴 리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빌보는 알고 있었다. 열에 들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자신의 이마를 끌어주던 투박하고 차가웠던 손을. 그 손은 분명 소린의 손이었다. 왕이 빌보에게 준 것은 그때의 아주 작은 친절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빌보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절망밖에 없던 생사의 갈림길에서 빌보는 큰 위안을 얻었고, 그것만으로도 소린의 냉대나 무시쯤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왕의 경우는 달랐다. 소린은 자신이 아무리 매정한 말을 내뱉어도 언제나 웃음을 띠고 있는 빌보를 참아낼 수가 없었다. 빌보가 에레보르에서 자리를 잡은 지도 7년이 지났다. 꽤 오랜 수명을 가진 난쟁이에게도 7년은 그리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7년 동안 소린이 빌보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그를 무시하고나 경멸하는 모욕의 말이었다. 그런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언제나 쪼르르 달려와서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내뱉는 빌보를 보며 왕은 어쩐지 초조해져만 갔다. 그는 빌보를 볼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분이 어디서 오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엔 작정하고 빌보를 상처 주려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으나, 곧 그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을 바꾸었다. 그러나 아무리 소린이 그를 무시해도, 빌보는 언제나 자신의 곁을 맴도는 것이었다.
"아, 이런. 큰일이네."
"무슨 일이에요, 오인?'
빌보가 약재들을 정리하는 것을 돕고 있을 때, 곤란한듯한 오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리하고 있던 말린 약초를 서랍에 마저 집어넣고, 빌보가 오인을 향해 다가와 물었다. 그러자 오인이 푸른빛의 기름이 들어있는 램프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왕의 침실에 가져다 두어야 하는 램프야. 전하는 이게 없으면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시는데.. 큰일이군."
"지금이라도 가져다 두면 되잖아요?"
"이미 늦었어, 괜히 문을 열다가 잠이라도 깨우면 불벼락을 맞을 게 틀림없거든."
이리저리 서성이며 두려워하는 오인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빌보가 그를 향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가져갈게요. 그럼."
"뭐?"
"저는 발소리도 잘 나지 않고, 조용하니까. 소린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빌보의 제안을 들은 오인이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인데, 빌보가 책임을 지게 하는 건 매우 미안한 일이었다. 게다가 왕이 힘들게 들었던 잠에서 깨면 얼마나 화를 내는지, 이미 여러 차례나 겪어본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다음날 왕의 질책을 받는 것 역시 두려웠다. 오인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빌보에게 파란색 램프를 건네주었다.
"왕의 침대 옆쪽에 올려다 두면 될 거야. 이 파란 기름에 들어있는 향초가,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네. 이게 있어야지만 왕께서 그나마 악몽을 덜 꾼다고 하시더군."
"소린이 자주 악몽에 시달리나요?"
"스라인 왕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거의 매일 밤."
빌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오인에게서 램프를 받아들고 빌보는 최대한 조용한 발걸음으로 왕의 침실을 향했다. 그 앞을 지키던 호위병들은 빌보에 손에 들린 파란 램프를 보자마자, 그가 지나가는 것을 손쉽게 허락해주었다. 빌보는 아주 조심스레 문을 열고 왕의 침실로 들어섰다. 난쟁이의 왕이 머무르는 침실이라기에는 그 방은 뜻밖에 허전하고 휑했다. 방안 가득히 무거운 공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고통스럽게 뒤척이는 소린의 모습이 보였다. 빌보가 재빨리 그의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램프를 켰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뒤덮여있었다. 소린은 뒤척이며 몇 번이나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스라인. 소린의 아버지이자 에레보르의 전 주인. 빌보 역시 몇 번이나 만났던 난쟁이였다. 이 거대한 왕국의 주인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하고 따뜻한 난쟁이였다. 하지만 그는 빌보가 에레보르로 오기 일 년 전, 국경 근처를 침범했던 오크와의 전투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왕국을 지키고 있던 젊은 왕자에게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잘린 머리뿐이었다. 난쟁이들은 자신의 땅에서 오크를 몰아내고 승리했으나, 왕을 잃었다. 그리고 소린은 미처 준비되지 못한 채로 왕국을 짊어져야만 했다. 그가 느끼는 부담감과 슬픔이 매일 밤 그의 잠을 방해했다.
다행히 소린은 빌보의 인기척에도 깨어나지 않았고, 램프의 향이 방안을 가득 채우자 서서히 그의 호흡도 안정되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땀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빌보는 자신의 임무를 마쳤으니, 인제 그만 그의 방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빌보는 자신이 아팠을 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손을 가만히 그의 이마위로 가져다 대었다. 기분 탓인지, 소린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잠든 모습을 보니, 그 역시 아직은 앳된 기운이 남아있는 젊은 난쟁이였다. 빌보는 언제나 왕을 안쓰럽게 생각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지만, 그는 온전히 모든 외로움과 고독을 혼자 짊어져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내게 기댄다면 좋을 텐데."
빌보는 이 순간, 차라리 그 대신에 자신이 악몽을 꾸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빌보의 마음도 모른 채, 내일부터 소린은 한결같은 냉랭함으로 빌보를 대하겠지. 외사랑은 이렇게 괴로운 것으로 생각하며, 빌보가 소린의 이마에 놓였던 손을 슬며시 떼려고 했을 때였다. 소린의 투박한 손이 빌보의 손을 잡았다. 왕이 잠에서 깼을까 싶어 빌보는 화들짝 놀랬으나, 다행히 그는 아직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 다른 이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일까. 빌보는 그의 이마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없이 잠든 그의 곁을 한참이나 지켰다.
그러나 그것은 빌보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다.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는지, 새벽녘에 눈을 뜨자 빌보는 자신이 여전히 왕의 침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덧 램프의 불을 꺼져있었고, 빌보가 화들짝 놀라 소린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자 그가 잠에서 깨어났다.
'큰일 났다.'
놀란 빌보의 두 눈을 바라본 소린의 표정이 놀란 기색을 띠었다가, 이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낮게 방안을 울렸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소린은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빌보는 그를 향해 변명할 수백 가지 말들을 떠올렸으나,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저 흔들리는 눈빛으로 소린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빛은 지금까지 빌보가 느꼈던 어떤 것보다 날카롭고 또 싸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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