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In Dreams (5)
In Dreams - 5
어처구니없이 도둑으로 몰린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보다 더 빌보를 경악하게 만든 사실은 소린이 자신의 마음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소린이 에그타르트에 대해 더 추궁하지 않는 점이나, 자신의 벌게진 얼굴을 애써 모른 척 해주는 점이 그러한 빌보의 생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소린은 자신의 터무니없는 실수로 빌보가 오해를 샀다며, 사과의 뜻으로 한사코 거절하는 빌보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다. 빌보는 사과고 뭐고 그냥 도망쳐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상대방의 호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님을 알기에 소린의 고급세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란히 차 뒷좌석에 앉아서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건 빌보였다.
"저.. 미스터 소린. 당신이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는데요 "
소린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 빌보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건 당연하겠지만, 전 정말 당신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꿈에서 당신을 봤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구요. 알아요, 내가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일 거라는 거. 하지만 난 열다섯 살 때부터 당신이 나오는 꿈을 꿨다구요. 정확히는 지금 당신 나이 또래를 한 남자의 꿈이지만... 어쨌든 확실한 점은 내가 당신의 사진이나 인터뷰를 보고 나서 그런 꿈을 꾼 게 아니라는 거죠."
빌보는 담담하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자신에 대한 소린의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소린은 화내거나 재촉하는 일이 없이 창문을 바라보며, 가만히 빌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빌보는 소린이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빌보는 이제는 농담 섞인 말투로 편하게 주절거리기도 했다.
"뭐. 사실 말도 안 되는 꿈이긴 해요. 동화 같은 꿈이었거든요. 어쩌면 판타지 영화일 수도 있고. 당신은 드워프였고, 난 호빗이었어요. 당신이랑 내 키가 지금의 반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구요. 지금 당신은 그렇게 큰데, 우습죠?"
빌보의 말을 들은 소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빌보를 돌아보았다. 소린의 반응에 빌보가 당황하며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곱씹어 보았다. 그 순간 차가 멈춰 섰고, 운전기사는 빌보의 집 앞에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소린 표정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여, 빌보는 일부러 차 문 앞에 내려서서 잠시 그의 말을 기다렸지만 되돌아오는 건 잘 가라는 인사뿐이었다. 꿈속의 소린과 달리, 현실의 소린은 너무도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빌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오래되고 허름한 아파트로 들어섰다.
빌보는 긴 꿈을 꾸었다. 난쟁이들을 따라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여정을 떠나는 꿈이었는데, 여행에 익숙하지 않았던 자신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마다 꿈속의 소린은 좀도둑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며 화를 냈고, 빌보는 익숙한 심장의 고통을 느꼈다. 그 감정은 현실에서 소린이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때 느꼈던 감정과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 날 처음으로 꿈속에서 오크를 보았다. 소린은 그 오크에게 맞서려고 혼자 걸어나갔고,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빌보는 그런 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익숙하지도 않은 칼을 들고 달려나가 소린을 감싸고 오크의 앞에 맞섰다. 오크의 눈이 번뜩였고, 빌보의 온몸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빌보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 그곳에서 끝난 까닭에, 꿈속의 자신과 소린의 생사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빌보는 한참이나 침대위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꿈에서 본 오크의 눈빛과 빌보가 느끼던 공포의 감정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날은 소린의 회사에서 주최하는 셀러브리티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따라 빌보는 말이 없었다. 셀러브리티들이 참석하는 꽤 규모 있는 행사였던 탓에 빌보의 업체 말고도 다른 업체들이 함께 파티를 준비하느라 유난히 분주해서 다행히 빌보의 침묵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햄페스트만큼은 빌보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빌보의 손길은 평소처럼 빠르고 섬세했으나, 그의 표정만큼은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햄페스트는 그런 빌보의 모습이 낯설어 괜히 중간중간 실없는 농담을 건네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곧 빌보의 표정을 풀어지게 만들 한 사람이 찾아왔다. 웬일로 발린이 아니라 소린이 모임의 준비상황을 살펴보러 직접 내려온 것이었다. 그는 빌보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가와서 다시 한 번 저번 일의 사과를 건넸다. 빌보는 자기는 정말 괜찮다며 손사개를 쳤는데, 그의 얼굴에서 아까까지 보이던 근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햄페스트는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낯설었다. 왠지 자신마저 어색해질 것 같은 간지러운 기운에, 햄페스트는 차라리 위층의 음식들을 체크하고 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햄페스트가 자리를 비켜주고 근처에 아무도 없게 되자, 빌보가 조심스레 소린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전해준 에그타르트는 입에 맞으셨나요?"
"훌륭하더군."
별다른 수식어도 없는 무뚝뚝한 칭찬이었지만, 빌보는 그의 칭찬이 얼마나 값어치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은 현재의 소린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 이렇게나 그에 대해 잘 알고있는 듯한 기분이 들다니. 소린은 이 상황이 낯간지러운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파티음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직원 한 명이 타르트가 들어있는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 오늘은 사과타르트인 모양이군."
소린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사과타르트를 하나 집어 들었고, 순간 빌보가 깜짝 놀라며 소린의 손을 붙잡았다. 빌보에게 잡힌 손에서 찌릿한 느낌이 들어, 소린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사과타르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소린은 그런 자신이 낯설고 당황스러워 어쩔 줄몰라하고있었는데, 그런 소린은 안중에도 없이 빌보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오늘 사과타르트를 만들지 않았어요."
" 뭐? "
오늘 행사의 디저트파트는 빌보의 업체에서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다른 음식이라면 모를까, 빌보가 만들지 않은 디저트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소린은 경비원을 불러, 좀 전에 사과타르트를 두고 갔던 직원을 쫓으라 명령했다. 잠시 행사장 안에 시끌벅적하게 소란이 일었고, 경비원들은 곧 그 직원을 붙잡았다. 당연히 그는 케이터링 업체의 직원도, 아르켄스톤의 사원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사과타르트에는 독극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소린을 비롯한 셀러브리티들을 향한 테러를 계획하던 정신이상자였다. 그가 붙잡히고 난 이후에야, 빌보는 놀란 가슴을 겨우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소린이 독극물이 든 타르트를 먹을 뻔했다. 자신이 빠르게 그를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꿈속에서처럼 쓰러져있는 소린의 창백한 얼굴을 봤을지도 몰랐다. 어젯밤에 꾸었던 불길한 꿈이 다시금 떠오르자 빌보는 몸을 떨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소린이 빌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빌보는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초조해 하며 그를 향해 물었다.
" 괜찮아요, 소린? 어디 다친 데는.."
그러나 빌보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헉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빌보를 향해 다가온 소린이 그대로 빌보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던 것이다. 이번엔 빌보의 몸이 아까와는 다른 감각으로 떨려왔다.
"소린?"
"네가 내 목숨을 구했군. 빌보."
소린의 목소리가 감격에 겨워 떨려왔다. 그리고는 빌보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뜨거운 체온에 빌보의 심장도 달아올라 터질것만 같았다. 어찌할 줄 몰라하는 빌보를 향해 소린은 거듭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빌보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소린의 체온이 와 닿자 빌보는 어렴풋하던 자신의 감정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린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자 빌보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려 작게 미소 지었다. 소린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빌보에게 어떻게든 사례를 해야겠다고 했다. 당연히 빌보는 그 제안을 거듭 거절했다.
"사례는 정말 됐어요. 뭐. 정 고마우면, 언제 저녁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이지, 정말 그걸로 괜찮겠나? 다른 사례를 얼마든지..."
"아니요. 정말 그거면 돼요. "
빌보는 오늘 꾸었던 꿈과, 꿈속에서 보았던 오크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꿈에서 받았던 경고 때문에 더욱 예민하게 소린이 먹을지도 모르는 디저트들을 체크했는데, 그 덕에 소린의 목숨을 구했다. 게다가 그와 사적으로 만날 기회마저 만들었다. 아침부터 가라앉았던 빌보의 기분은, 저녁에는 하늘을 날 것같이 기쁘게 변했다.
그리고 이틀뒤 저녁, 그들은 정말로 저녁 식사 자리를 함께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린이 수소문해서 찾아간 고급스러운 프랑스 요리 식당은 끔찍하게도 맛이 없었다. 소린은 굳은 얼굴로 요리를 몇 번 깨작대다가 결국 기분 나쁜 듯이 포크를 내려놓고야 말았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보답하는 중요한 식사자리인데, 정작 음식이 맛이 없으니 불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빌보는 소린의 눈치를 보다가, 그가 포크를 내려놓자 조심스레 자신도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표정이 잔뜩 굳어있는 소린을 향해 조심스레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음.. 소린. 괜찮다면, 제가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해도 될까요?"
"오늘은 내가 너에게 보답해야 하는 자리인데 그럴 수는 없지."
소린의 말에 빌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음식을 대접받는 것보다는, 대접하는 쪽이 더 즐거운걸요. 날 기쁘게 만들고 싶다면 부디 제가 당신에게 요리를 대접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 아무 맛도 안 나는 푸아그라보다는 괜찮을 거라고 장담할게요. "
빌보가 자신의 접시를 가리키며 농담을 하자, 소린도 굳은 표정을 거두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소린은 기분 좋게 빌보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마치 신혼부부처럼 사이좋게 마트에 들러 음식재료를 쇼핑했다. 소린은 다른 재벌이나 CEO들과 달리 서민들의 생활에 익숙했고, 빌보는 그런 그의 모습에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꿈속에서만 보던 존재가 점점 자신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빌보를 참을 수 없게 들뜨게 했다. 빌보 뿐만 아니라 소린 역시 평소답지 않게 들뜬 모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자신을 위협하거나 가식적으로 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러싸여있던 까닭에, 소린은 한번 신뢰를 준 사람에 대해서는 금방이고 벽을 허물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 소린은 경호원도 없이 빌보의 집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빌보가 만든 저녁을 함께 나눠 먹었다. 즐거운 저녁 식사가 끝난 이후에는 맥주를 함께 마시기 시작했는데, 소린은 그날 자기 인생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술에 취한 빌보는 끊임없이 신기하고 맛있는 안주들을 만들어 왔다. 소린은 이미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어느 하나 맛없는 메뉴가 없었기 때문에 술 마시는 것을 전혀 멈출 수가 없었다. 소린이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느꼈을 당혹스러움은 과음으로 인한 자업자득이었다.
" ...내가 지난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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