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In Dreams (3)
In Dreams - 3
소린은 본래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었다. 언제나 많은 목표들로 둘러싸여있는 그의 삶에서, 잠이란 그저 다음날의 일정을 위한 충전이었을 뿐이었다. 꿈을 꿀만 한 여유도 꿈에 취해있을 여력도 없이 바쁘게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요즘 들어 부쩍 불쑥불쑥 끼어드는 꿈의 존재는 분명 불청객과도 같았다. 확실한 건 이 모든 것이 그 이상한 작은 남자의 탓이라는 것이었다. 그 작은 남자는 어설프고도 소녀스러웠다. 아니 요즘 세상에선 10대 소녀라 할지라도 꿈에서 당신을 봤다는 말로 누군가를 꼬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망상이 좀 더 깊어진다면, 소린을 찾아와 전생의 인연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남자에게 모욕을 주었던 날로부터 일주일 째 소린은 그 지긋지긋한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최근 새로운 사업확장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꿈 때문에 숙면을 취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소린의 피곤함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수밖에. 늦은 새벽, 겨우 침대에 파묻히듯이 쓰러지며 소린은 간절하게 바랐다. 오늘 밤이야 말로 그 빌어먹을 꿈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기를. 제발.
그러나 소린은 자신이 또 그 꿈속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느 때처럼 괴물과 싸우다가, 얼음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에게 발등을 찔리고, 심장 부근을 찔렸다. 소린은 자신이 또 죽으면서 꿈에서 깰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날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괴물의 칼날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순간 그 괴물의 심장을 마주 찔렀다. 칼날이 괴물의 몸을 뚫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소린의 마음속에 벅찬 환희의 감정이 퍼져갔다. 마침내 소린은 자신을 그동안 꿈속에서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괴물을 쓰러뜨린 것이다. 하지만 소린은 곧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았다. 꿈속의 소린은 얼음으로 얼어붙은 절벽 위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다 쓰러졌다.
그는 그가 꿈속에서 죽기 전에 보는 풍경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장소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깊은 애환과 그리움이 꿈을 꾸고 있는 소린을 절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사과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소린은 꿈속의 자신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꿈을 꾸고 있는 그로서는 당장 보이는 정보 외에 다른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꿈에서 슬슬 깨어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소린은 자신의 꿈에서 자신을 죽이던 괴물 외에 다른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안간힘을 쓰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작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려 애썼다. 시야가 흐려졌다. 금방이라도 꿈에서 막 깨어날 것만 같았다. 소린은 지금 깨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후회가 그 작은 사람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그 작은 남자의 안타까운 표정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죽는 것을 슬퍼하고 깊이 안타까워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소린은 그동안 숱한 죽음을 맞이하며 느꼈던 고통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차가운 꿈속에서도 제 죽음을 애도해주는 이가 있었다니. 누구인지 모르는 안쓰러운 작은 이는 몸을 웅크리고 자신이 죽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소린은 흐릿해지는 두 눈을 찡그리며, 그 사랑스러운 작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그 얼굴은 현실의 소린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빌보!"
소린은 그 작은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침대는 그의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맙소사.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린은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자신에게 어설픈 수작질을 부리던 키 작은 케이터러. 빌보 배긴스. 자신이 꿈에서 만난 건 그 남자가 분명했다.
발린은 오랜 시간 동안 소린을 보필하던 비서실장이었다. 그에게는 소린이 갖고 있지 못한 융통성과 노련함이 있었다. 발린은 소린이 어렸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의 할아버지가 세운 큰 회사를 이어받기엔 소린은 너무 어리고 부족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빛을 처음 본 순간 발린에게 어떠한 확신이 들었다. 소린이야말로 이 철강회사를 이어받고 부흥시킬 유일한 존재였다. 남들을 납득시킬만한 어떤 증거도 없었지만, 발린의 모든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린의 감각이 옳았다는 것이 점점 증명되었다. 소린의 아버지가 사고로 행방불명이 되자, 젊은 후계자는 놀라울 정도의 행동력과 카리스마로 기업의 CEO 자리에 우뚝 섰던 것이다. 회사의 모두를 납득시킨 소린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발린이 으뜸으로 꼽는 점은 바로 빠른 결정과 결단력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소린에게서는 그다운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린은 아침부터 어딘지 얼이 빠진듯한 표정으로 혼자 딴생각에 잠기느라 발린의 말을 놓치기 일쑤였다. 발린은 처음엔 그의 수면부족이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했으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셔츠만 입은 채로 창문을 열고 창가를 서성이는 걸 보며 그의 상태가 단순한 수면부족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소린은 갑자기 이번 달에 잡힌 온갖 모임들을 체크했다. 특히 누가 케이터링을 하는지를 꼼꼼하게 살폈는데, 예전에는 전혀 그가 관심을 보이지 않던 부분이었다. 소린은 그달의 모든 파티기획서를 싹 훑어보고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또 한 시간 정도 흐르자 발린을 불러 대뜸 새로운 자선파티를 당장 다음 주에 잡으라고 통보했다. 발린은 일정 상 그렇게 빨리 자선파티를 열 수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더니 또 5분이 지나자, 이번에는 파티를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발린의 머리가 아파져 왔다. 소린이 어떤 일을 결정하면서 저렇게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이전에는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 뭔가 원인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결정했다. 자선파티를 열게."
" 소린. 지금 그 결정을 19번째 번복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자선파티문제로 시간을 끄실 겁니까? 당신이 결정해야 할 다른 일들이 수도 없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역시 관두는 게 좋겠군. 자선파티는 취소하지."
발린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며, 아까 소린이 체크하던 모임들의 기획리스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곧 해답을 찾아냈다. 발린은 경험이 많고 연륜이 있는 사람이었다. 젊은이들의 이상한 행동을 그동안 많이 보아왔다는 뜻이었다. 발린은 미소를 띠며, 소린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자선파티를 준비시키기로 했다. 그리고는 새로운 기획안을 들고 소린을 찾아갔다.
" 다음 주 금요일에 말씀하신 자선파티를 준비하도록 지시해두었습니다."
" 아니, 난 파티를 관두는 게 좋다고 말했네. 발린."
" 그리고 별로 관심 없으시겠지만, 자선파티의 준비는 전에 맡겼던 그에게 맡길 계획이에요."
" ...발린."
" 기억하시죠? 킬리의 생일파티를 준비했던. 빌보 배긴스말이예요. 이렇게 갑작스러운 의뢰를 받아줄 정도의 실력 있고 친절한 케이터러는 그밖에 없으니까요."
빌보의 이름이 나오자 소린의 어깨가 잠시 움츠러들었다. 역시. 소린의 이상한 행동의 원인은 그 솜씨 좋은 케이터러였던 모양이다. 기존에 잡혀있던 파티들은 전부 다른 케이터러가 담당하기로 되어있었다. 소린은 아무래도 빌보와 만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발린은 미소를 지으며 소린의 동의를 구했고, 소린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노련한 발린에게, 소린은 너무 알기 쉬운 남자였다.
빌보는 자신의 휴대폰에 발린의 이름이 찍힌 것을 보고, 그 우연에 신기해했다. 바로 지난밤, 그의 꿈속에서 발린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발린뿐만 아니라 모르는 난쟁이들이 우르르 쳐들어왔고, 그 중에는 왠지 빌보가 아는 열두살짜리 킬리와 그의 형 필리를 닮은 듯한 난쟁이도 있었다. 물론 그들보다 훨씬 크게 자라있었고, 수염도 있었지만. 지난번 꿈에서처럼 그들은 빌보의 식량 창고를 털었고, 정신없이 먹고 떠들고 노래하며 빌보의 안식을 방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느 때와 같이 문이 열리고 소린의 얼굴을 한 난쟁이가 들어오는 장면을 꾸었다. 그들은 빌보에게 어떤 계약서를 내밀었다. 빌보는 그 글씨를 읽을 수 없었으나, 꿈속의 자신이 질색하고 기절을 한것을 보아, 분명 말도 안 되는 불공정한 계약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꿈을 꾸고 난 이후에 발린에게서 파티견적 의뢰를 받았으니, 빌보의 마음이 들썩였을 수밖에.
현실에서 발린이 빌보에게 의뢰한 일은 불공정계약은 아니었다. 비록 일정은 터무니없이 촉박했지만, 빌보는 기쁘게 그 의뢰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빌보의 마음이 들썩거린 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향해 실망감과 불쾌감을 드러내던 소린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속을 휘저었다. 소린이 던졌던 모멸스러운 말들은, 빌보에게는 별다른 상처가 되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꿈속의 인연을 운운한다면, 빌보라 할지라도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내쫓았겠지. 빌보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꿈에서 그는 고작 빌보의 집을 동료들과 함께 찾아와서, 빌보의 음식창고를 털고, 그에게 계약서를 내밀었을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더더욱 접점이 없었다. 그저 빌보는 의뢰받은 케이터링을 하러, 딱 두 번 그를 만났을 뿐이었다. 대화다운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빌보는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싹터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분명 어떤 강한 인연이 그와 자신 사이에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그 인연은 어쩌면 우정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빌보는 자선파티의 케이터링을 어떤 컨셉으로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며, 꿈속에서 소린이 어떤 음식을 잘 먹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그는 많이 먹거나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특별하게 그가 선호하는 음식을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하게 기억하기로는 달걀을 이용한 요리들을 곧잘 먹었던 것 같았다. 빌보는 그가 만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에그 타르트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특별히 가장 맛있게 만들어진 것들은 따로 포장을 해서 소린에게 건네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가 회사업무에 바쁠때 커피와 함께 먹으면 좋으리라 생각했다. 빌보의 마음이 사춘기 소년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신이 나서 주방을 뛰어다니며, 한껏 재주를 부린 결과였을까, 자선파티에 참가했던 모든 손님들은 그 날의 에그 타르트를 칭찬했다. 바삭바삭한 페이스트리 부분과, 노릇한 표면, 그리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달걀 크림이 어우러진 에그타르트는, 빌보가 생각하기에도 지금까지 그가 만든 것 중에 제일 좋은 결과물이었다. 그날은 발린이 따로 제의하지 않았음에도 빌보 스스로 파티장에 남아있기를 원했다.
빌보는 햄페스트를 잠시 돌려보내고, 홀로 파티장에서 음식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언제쯤 소린이 등장할 것인지를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파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린이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빌보가 조심스레 그를 바라보자 소린과 눈이 마주쳤다. 다행히 그의 눈빛에서 저번과 같은 모멸적인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뭐가 불만인지 빌보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정작 빌보가 열심히 준비한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한쪽에 서서 빌보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손님들에게 형식적인 인사치레만 하고는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빌보의 어깨가 실망감에 축 처졌다.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소린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할지 며칠 동안 고민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파티가 끝난 후 뒷정리를 위해 햄페스트가 찾아왔다. 그는 빌보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살피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음식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요?"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 다행이네요. 그럼 혹시 그때 그 남자 때문인가요?"
"....."
남은 음식들을 치우고, 그릇을 정리하며 빌보와 햄페스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빌보가 대뜸 말했다.
"혹시 이게 사랑인 걸까?"
- 덜컹
햄페스트가 놀라 들고 있던 넓은 그릇을 놓쳤다. 그릇이 깨지기 전에 재빨리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햄페스트는 빌보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진다고 생각했다.
"빌보, 꿈이 아니라 현실을 봐요. 당신은 지금 이곳에 있잖아요? 그 꿈속의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확실히 좀 허무맹랑하지?"
"그렇죠. 차라리 그 공상을 소설이라도 쓰면서 풀면 어때요? 당신은 글도 제법 잘 쓰잖아요."
햄페스트는 웃으며 농담 삼아 한 말이었으나, 빌보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블로그에 자신의 꿈 이야기라도 꾸준히 쓰면, 지금 빌보가 겪고있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 좋은 생각이야 햄페스트."
그날 빌보는 블로그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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