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In Dreams (10)
In Dreams - 10
소린의 머릿속에서 전생과 현재의 기억들이 어지러이 뒤엉켰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아르켄스톤의 후계자로 살아온 소린 오큰쉴드 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비록 이상한 꿈을 종종 꾼 적은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이 다른 어떤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소린에게 참나무방패 소린이라는 또 다른 존재가 흘러들어왔다. 전생의 기억들은 마치 소린이 경험했던 일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의 안에 녹아들었고, 소린은 서서히 자신이 원래 누구였는지, 지금은 누구인지를 명백하게 인정했다.
소린은 스라인의 아들, 두린의 핏줄을 이어받은 산밑의 난쟁이 왕이었으며, 철강회사 아르켄스톤의 젊은 CEO였다. 어느 하나 부정할 것 없이 전부 그였다.
전생의 기억을 전부 되찾은 소린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안타까움이었다. 빌보와 자신의 시계는 언제나 엇갈려 흘렀고, 이번에도 그랬다. 소린이 조금만 더 빨리 전생을 기억해냈더라면, 빌보가 그렇게 떠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텐데. 소린은 한쪽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위를 둘러싼 직원들의 웅성거림이 이제서야 정확히 그의 귀에 들려왔다. 발린이 어느새 달려와 소린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소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발린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치의를 부르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발린을 말려봤자 소용없을 거라 판단한 소린은, 차라리 주변 직원들의 동요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요 며칠 잠을 못 잤더니, 잠시 어지러웠던 것 같습니다. 모두 그만 자기 업무로 돌아가 보도록 하세요."
소린의 명령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직원들이 자신의 위치로 신속하게 흩어졌다. 소린은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빈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던 소린의 눈에 아까 떨어뜨렸던 도토리가 들어왔다. 도토리를 보자 유년시절의 기억이 이제서야 떠올라, 소린으로 하여금 허탈한 웃음을 짓게 하였다.
어린 소린은 도토리만 보면 마치 눈물샘이 고장이 난 것처럼, 자동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아마 전생의 감정들이 도토리를 매개체로 떠오르기라도 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소린의 아버지는 아르켄스톤의 후계자가 쉬이 눈물을 보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도토리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마다, 소린은 아버지로부터 엄하고 호되게 혼이 나야만 했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도토리가 눈에 띄기만 해도 기겁을 하며 도망을 치게 된 것이었다. 소린은 점차 커가면서 소린은 자신이 왜 도토리를 싫어하는지에 대한 기억은 잊은 채, 무조건 그것은 싫고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인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 도토리를 피하는 이유에 대해 물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도토리 알레르기가 있다고 답했던 것이었다.
소린은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주머니에 가만히 담았다. 전생의 기억이 모두 떠오른 지금, 소린이 도토리를 보며 떠올릴 사람은 당 한 명뿐이었다. 빌보 배긴스. 소린은 주머니에 담긴 도토리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작은 호빗을 떠올렸다. 빌보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엉뚱한 사람을 소린의 환생이라 믿으며 자신을 떠나있었다. 소린은 궁금했다. 도대체 그 책의 저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자신과 빌보의 기억을 알고 있는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때 소린의 주치의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린은 그에게 이끌려 휴게실로 향하며,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빌보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그의 조카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프로도,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네가 환생을 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단다."
"맞아요. 우리는 발리노르에서 평안을 얻었죠. 제게는 환생할 이유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삼촌이라면 꼭 환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프로도…."
"그래서 저도 환생을 선택했어요. 삼촌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거든요.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프로도의 말에 빌보가 여전히 그를 끌어안은 채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새로운 모험을 떠나고 싶었겠지."
"맞아요. 그런데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 막상 삼촌을 찾을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썼죠. 삼촌이 언젠가 읽으면, 절 찾아올 수 있도록 말이에요."
빌보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프로도가 있었다. 빌보는 그가 환생했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었지만, 프로도라면 빌보와 소린의 이야기를 전부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빌보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프로도에게 들려줬었다. 그의 책에 실리지 않은 기억까지 전부. 그러니 그가 소린과 자신만 아는 모든 일들까지도 책에 적을 수 있었겠지. 프로도가 여전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빌보의 품에서 벗어나며, 그를 향해 궁금했던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삼촌. 참나무 방패는 만났나요? "
프로도는 여전히 깊고 푸른 눈으로 빌보를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빌보는 매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답했다.
"프로도. 내가 아무래도 엄청나게 바보 같은 짓을 해버리고 만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나요?"
"참나무 방패를 만났어. 만났었는데..."
"그런데요?"
빌보는 자신의 바보 같았던 지난 행동들을 떠올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프로도가 빌보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빌보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소린을 떠나며 했던 말들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날의 자신은 얼마나 냉정하고 단호한 말로 그에게 상처를 줬던가. 그를 향한 감정을 전부 부인하고, 모질게 소린을 떠났었다. 소린은 그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지 못했을 뿐인데, 그를 부정하고야 말았다.
"소린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어. 난…. 프로도 네가 쓴 책을 읽고, 책의 저자가 진짜 소린일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
"그를 떠났나요?"
프로도의 물음에 빌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프로도 역시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고야 말았다. 프로도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가득하였다. 빌보를 찾으려고 소설을 썼던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빌보는 프로도가 다시 만난 조카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를 위로했다.
"네 탓이 아니란다 프로도. 내 잘못이었지. 내가 소린을 믿지 못했어. 현재의 그를 다시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으면서도, 전생의 소린과 현재의 소린을 나도 모르게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그의 전생은 고통뿐이었잖니. 지금의 그는 자신이 전생에 얻고자 했던 많은 것들을 자기 힘으로 지켜내고 있어. 그는 더는 고향을 잃고 떠돌던 참나무 방패가 아니지. 차라리 모두 잊고, 지금의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게 축복일 거야."
빌보는 그의 가슴에 평생 남아있던 참나무방패 소린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던 소린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에게 전생의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의 시간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지도, 꿈을 꾸지도 않았던 것인지도. 만일 그런 것이라면, 빌보는 자신이 그로부터 떠난 것이 그리 나쁜 판단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모두 잊는 편이 행복하겠지. 나를 포함해서."
빌보는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자신이 계속 소린의 곁에 머물러서, 그의 괴로웠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이대로 소린에게서 떠나있는 편이 훨씬 좋은 일일 테지. 그래, 그편이 나았다. 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결정에 거듭 수긍했다.
프로도와의 꿈같고 행복했던 일주일이 지났다. 그들은 마치 예전 샤이어에서의 평화로웠던 날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호빗처럼 하루에 여섯 끼를 먹고, 매 순간 즐겁게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프로도는 빌보의 요리 솜씨가 예전보다 좋아진 것에 놀랐고, 빌보는 프로도가 자신보다 훨씬 나은 문장을 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프로도는 빌보에게 자신의 집에서 계속 머무를 것을 요청하지 않았고, 빌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오래된 아파트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예약해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전생에서처럼 계속 함께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을. 어쨌든 그들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재의 시간들을 쌓아가야만 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은 샤이어의 배긴스가 아니었다.
빌보는 프로도의 집 대문 앞에서 담담하게 이별인사를 건넸다.
"종종 편지하렴."
"편지라뇨. 전화나 e-mail이 있는데."
"아, 그렇지. 어쨌든 잘 지내거라 프로도."
"삼촌도요."
빌보와 프로도는 조금 아쉬운 듯, 서로의 눈을 잠시 마주 보았으나 그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빌보는 그렇게 일주일간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자신의 낡고 오래된 아파트가 있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빌보에겐 우선, 새로운 거래처가 필요했다. 그동안 아르켄스톤에서 주관하는 파티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해야만 했다. 빌보는 이 익숙한 홀로서기의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호텔에서 독립해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아마도 한동안은 소린에 대한 기억을 떠오를 새도 없이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도와의 만남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던 것과는 달리, 소린과는 현재의 생에서 얽혀도 너무나도 많이 얽혀있기에 그를 잊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전생의 기억까지 마구 뒤엉켜있으니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빌보가 그 기억들에 얽매여 있을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빌보는 자신이 잘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오래 걸릴지는 몰라도, 결국엔 그를 잊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빌보의 예감은, 그날 밤 난데없이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난폭한 방문자와 함께 모조리 깨져버리고야 말았다.
쾅쾅쾅!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이웃 주민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시끄러운 노크 소리에 빌보는 불쾌하게 잠에서 깼다. 아마도 햄페스트가 자신이 돌아온 것을 듣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빌보는 파자마 가운을 여미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햄페스트! 지금이 대체 몇 시라고 생각…."
그러나 빌보의 현관에 서 있는 사람은 햄페스트가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문앞에 서서 빌보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는, 다름아닌 소린 오큰쉴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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