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In Dreams (9)
In Dreams - 9
현대 AU/ 환생/ 여성향
빌보는 소린의 얼굴을 차마 제대로 볼 용기가 나질 않아 애써 고개를 돌려 소린을 외면했다. 빌보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도저히 올바른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정말로 내가 소린을 떠나는 것이 맞나? 빌보는 어쩌면 자신이 일종의 과대망상에 빠져, 있지도 않은 전생의 기억을 진짜라고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소린과 열렬한 열애 중이었으며,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토록 설레고 따뜻했던 감정이 하루 만에 변할 리가 없었다. 빌보는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의 눈앞의 소린을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빌보가 외면할 수 없는 기억이 있었다. 자신의 고향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왔던 한 난쟁이. 자신에게 짊어진 무거운 의무와 사명감으로 한시도 편하게 잠들 날이 없었던 두린의 왕자. 자신을 보며 죽어가는 순간에 미처 눈을 감지도 못하고 떠나가던 참나무 방패를 빌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미쳤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설령 빌보가 미쳤다고 해도, 전생의 참나무 방패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빌보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소린에게는 빌보말고도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소린 오큰쉴드는 죽는 순간까지도 아무것도 제 손에 쥘 수 없었다. 아르켄스톤마저도.
만약 그가 지금도 빌보를 기다리고 있다면, 빌보는 그를 선택해야만 했다.
천천히 돌아서서 서재를 나가려는 빌보의 등 뒤로, 소린의 참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한 가지만 물어보지. 전생이나 꿈과 상관없이, 지금의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한 적은 없었나?"
문을 나서려던 빌보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빌보의 등은 한참을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빌보가 느릿하게 말했다.
" 당신을 꽤 좋아해요. 하지만 당신이 내가 꿈속에서 보던 그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일 의외의 것으로 말을 걸 일은 처음부터 없었을 거예요."
빌보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나도 잔혹하게 소린의 가슴을 차갑게 얼리고 꿰뚫어,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말았다. 빌보는 기어코 서재에 소린을 홀로 남겨둔 채 떠났으며, 소린은 허탈한 감정에 어이없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이제 겨우 연애라는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뿐이었는데. 앞으로 아주 길고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엔딩을 맞이하다니.
열애의 끝은 그렇게 아무런 예고 없이, 허무하게 다가와 있었다.
소린은 완벽하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회사 일을 빼고 나면 그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삭막한 시절로.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최악으로 변했을지도 몰랐다. 소린에게서 온종일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하루하루 눈에 띄게 야위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린은 물론이고, 어린 필리와 킬리마저 그들의 삼촌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빌보의 야속함을 원망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재미없는 독서회를 해도 좋으니, 빌보가 삼촌에게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매일 밤마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인사를 할 때마다, 혹시 삼촌이 오늘은 웃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는 했다. 하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건 차갑고 무뚝뚝한 삼촌의 인사였다. 소린이 아침마다 조카들을 향해 웃어줄 수 없는 이유는 빌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요새 들어 매일 밤 꿈을 꾸느라, 하루도 제대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빌보가 떠났으니 이제는 더 이상 꿈을 꿀 일이 없어야 하는데, 소린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생생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소린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가 일생을 갈망해오고, 되찾기를 바라왔던 어떤 것. 꿈속의 자신은 그것을 찾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소린의 머릿속의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물건의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르켄스톤'
마치 현재의 소린이 회사를 일으켜 세우는 것에 몰두하듯, 꿈속의 소린 역시 그 물건을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혹여 누군가가 아르켄스톤을 찾아놓고 숨기는 것은 아닌지, 강렬한 의심이 들었다. 그는 어둠 속에 파묻혀 주변을 둘러보았고, 성 한 귀퉁이에서 빌보를 닮은 작은 남자가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꼼지락 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꿈속의 소린은 그를 향해 다다 가서는,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당장 펼쳐내 보이도록 다그쳤다. 화가 났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배신하고 떠날 사람이었다. 꿈을 꾸는 소린의 감정이 현실과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빌보가 손을 펼치려 하던 찰나, 소린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소린은 땀에 흠뻑 젖어 낯익은 자신의 방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통스러웠다. 왜 빌보가 없는데도, 계속 같은 꿈을 꾸는 거지? 소린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매일 잠을 설치는 것도, 계속해서 꿈을 꾸는 것도 전부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소린을 가장 괴롭게 하는 건, 그럼에도 자신이 여전히 빌보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빌보가 자신을 향해 지금이라도 달려와, 자신이 바보 같았다고. 전생이니 꿈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떠올리고 상상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매일매일 똑같은 기대를 품고 맞이하는 아침이 그의 가장 큰 고통이었다.
빌보는 소린과의 이별 이후, 자신이 맡고 있던 아르켄스톤 회사와 관련된 모든 케이터링 계약을 모조리 깔끔하게 파기했다. 발린이 이유를 물어왔지만, 빌보는 그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만 답할 뿐이었다. 발린은 그에 대해 더 캐묻지도 않았고, 위약금을 청구하지도 않았다. 그런 발린의 호의에 빌보는 가슴 깊이 감사했다. 빌보는 자신이 모아뒀던 통장의 잔고를 털어 햄페스트에게 특별한 유급휴가를 지급했다. 햄페스트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빌보를 걱정하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어쩔 작정인지를 꼬치꼬치 물어왔다. 빌보는 그런 햄페스트를 안심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짐을 꾸렸다. 빌보의 손에는 한 소설가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가 들려있었다. <어떤 호빗의 모험>을 제작한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작가의 주소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빌보의 전화를 받은 출판사 직원은, 빌보의 신원이나, 작가를 찾는 이유에 대해 캐묻지도 않고 아주 쉽게 작가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책의 저자가 5년 전부터 자신을 찾는 이가 있으면, 얼마든지 주소를 알려주라고 당부해왔다고 말했다. 빌보는 그 덕에 너무나도 간단하게 작가를 찾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빌보로 하여금 책의 저자가 전생의 참나무방패가 맞으며, 그거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소설가는, 어느 한적한 남쪽의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무척이나 작은 마을로 가기 위해 빌보는 공항에서 내려서 작은 차를 한 대 빌려야만 했다.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니었으나 찾아오는 손님이 별로 없는지, 렌터카사무실의 문을 꾹 닫혀있었다. 빌보가 한참을 서성이고 나서야, 직원이 찾아왔다. 구형 폴크스바겐을 몰고 인적이 드문 벌판을 달리면서, 빌보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어떠한 풍경을 떠올렸다. 언제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푸릇한 풀들로 가득한 곳.
" 샤이어.."
빌보는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샤이어와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서, 주소에 적힌 집으로 걸어가며. 빌보는 어쩌면, 자신이 찾아가려는 이가 전생의 드워프 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 보이는 작은 이층집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빌보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집 안에 딸려있는 작은 벤치에는 검은 머리의 한 남자가 매우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빌보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듯이 열려있는 대문 안으로, 노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걸어 들어갔다.
빌보는 남자가 비워둔 벤치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를 향해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굿모닝, 프로도."
남자는 책을 덮고, 빌보를 바라보고는 얼굴 가득 화사하게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삼촌."
소린은 오늘 저녁 연회가 열릴 예정인 홀 내부를 무감정하게 둘러보았다. 모든 것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발린이 소린의 곁으로 다가와 새로운 케이터러를 소개했다.
"소린, 이번에 새로 계약한 케이터러예요. 앞으로 당분간 우리 회사에서 주최하는 파티를 맡길 예정이죠."
"그렇군요. 잘 부탁합니다."
소린은 형식적으로 짧게 대꾸하고는, 새로운 케이터러가 세팅한 테이블을 시큰둥하게 둘러보았다. 이번에 열리는 연회가, 환경보호와 관련된 모임이라서인지 케이크에 나뭇잎 장식을 덕지덕지 해둔 모양이었다. 소린은 그 해석이 너무나도 1차원적이라,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들의 구성이며, 모양이며, 색 배치며. 빌보가 했던 것보다 어느 하나 뛰어난 것이 없었다. 빌보 배긴스. 언제나 작은 손으로 분주하게 무언가를 만들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소린의 속이 다시금 아려왔다. 빌보는 언제나 자기 일을 사랑했고, 작은 장식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살피느라 자신의 온 여가를 일에 쏟아붓곤 했었지. 그리고 소린은 그런 빌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기어코 그를 끌어안아 일을 방해하고는 했다. 소린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빌보와의 기억을 몰아냈다. 그런 소린의 시선 끝에, 나뭇잎 장식이 되어있는 우스꽝스러운 케이크가 들어왔다. 그 위에 얹어진 도토리. 도토리라니. 소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케이크 위에 있는 도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서 들어냈다. 도토리에 손을 대는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도 일단 자신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감정이 앞섰다. 휴지에 그 흉물스러운 것을 싸서 버리려던 찰나, 소린의 손에서 도토리 알갱이 하나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발밑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도토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소린의 귀에 갑자기 강하고 따가운 이명이 들려왔다.
" 윽.."
소린은 고통스럽게 자신의 귀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흔들어도 소리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고, 소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몇몇 직원들이 그런 소린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들의 웅성거림이 느껴졌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소린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소린의 귀를 따갑게 울리던 소음은 점점 누군가의 말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는데, 직원들의 말소리는 아니었다. 소린이 들은 적 없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제각각 내뱉었다.
당신은 변했어요.
당신과 위험을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그것은 어떤 배긴스도 할 수 없던 일이었죠.
독수리가 와요.
안 돼요 소린.
소린.
" 빌보.."
소린은 자신의 귓속에 울리는 수많은 목소리 중에서 빌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애처롭게 귀 기울였다. 빌보의 목소리만이 소린에게 익숙했으며, 그리웠다. 고통에 나뒹구는 그의 눈가로 한줄기 눈물이 떨어져 흘렀다. 눈물은 소린의 볼을 타고 흘러, 바닥에 깔린 카펫을 적셨다. 소린의 눈동자에,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가 들어왔다.
손에 쥔 게 뭐지?
별것 아니에요.
보여줘 봐.
베오른의 뜰에서 주었어요. 샤이어의 제집으로 돌아가면 심으려고요.
소린의 머릿속에 물감이 번지듯,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도토리를 고향으로 돌아가 심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품고 있던 한 호빗과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한 드워프. 그 난쟁이의 모든 삶의 기억들이 소린의 머릿속에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어떤 책에서도 나온 적 없고, 빌보에게서도 들은 적 없던 한 남자의 일생이었다. 그가 살아온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기억의 파도들이 한꺼번에 그를 덮쳐왔다.
소린 오큰쉴드,
소린은 마침내 빌보가 찾던 참나무 방패가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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