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In Dreams (完)
In Dreams - 完
빌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소린이 빌보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쳤다. 소린은 잔뜩 화가 나 있어서, 당장에라도 빌보를 아파트 아래로 밀어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소린의 얼굴에, 빌보의 두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소린은 빌보의 눈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 인생이 고통뿐이었다고?!"
"소린..?"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차라리 축복일 거라고?"
"어…. 음. 혹시 프로도를 만났어요?"
빌보가 두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묻자, 소린이 또 한 번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함부로 남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나 해서 찾아갔지! 그 자식 얼굴을 보자마자 한방 갈겨줄 생각으로"
"뭐라구요? 프로도를 때렸어요?!'
이번엔 빌보 역시 소린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지를 수밖에 없었다. 새벽 두 시에 벌어지는 시끄러운 소음에, 결국 옆집 남자가 짜증스럽게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하지만 그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소린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의 집으로 쏙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빌보는 일단 소린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현관문을 닫았다. 이 이상 밖에서 소란을 피웠다가는, 당장에라도 경찰이 출동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린은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히도록 인상을 쓰며, 소파 위에 팔짱을 끼고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가 푹 꺼지는 것을 보자, 빌보가 그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소파를 바꿔야 할지도. 빌보는 주방으로 다가가며 소린을 향해 물었다.
"커피 마실래요?"
"물이나 줘."
작고 오래돼서 덜덜거리는 소음이 나는 냉장고로 다가가 물을 꺼내며, 빌보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했다.
"뭔가 오해했나 본데, 프로도는 내 조카였던 아이예요. 그래서 그 애가 내 얘기를 소설로 쓸 수 있었던 거죠. 소린, 설마 진짜로 그 애를 때린 건 아니겠죠?"
"때리지는 않았네. 멱살을 잡고 바닥에 한번 패대기치기는 했지만."
"뭐예요?"
빌보가 유리잔에 든 찬물을 소린의 얼굴에 끼얹을 기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어느새 소린이 자신의 뒤에 다가와 서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자기도 모르게 당황하여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소린은 어느새 화가 누그러진 것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어딘지 침울한 목소리로 빌보를 향해 낮게 말했다.
"내 인생은 고통뿐인 삶이 아니었다. 내게는 긍지가 있었고, 명예가 남았지."
"소린..?"
"그리고 진실한 우정을 나눈 친구를 만났는데, 그게 어떻게 고통뿐인 삶이지?"
빌보의 손에 들린 유리잔 속의 물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빌보의 눈빛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좀 아까 소린이 프로도의 소설을 가리켜 '남의 이야기'라고 말했었다. 빌보는 자신이 품은 기대감이 섣부른 것일지도 몰랐지만, 소린을 향해 용기 있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난 너에게 일주일 전 어이없이 차인 불쌍한 한 남자지. 아르켄스톤이라는 철강회사의 CEO이며, 인간이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대답에, 빌보의 표정이 순식간에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물잔을 쥔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힘없이 아래로 떨궈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유리잔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빌보의 손을, 소린이 붙잡았다. 그는 빌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지만 과거에는 산밑 왕 스로르의 아들인 스라인의 아들, 소린 오큰실드였지. 물론, 드워프였고."
빌보는 온몸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소린은 빌보의 손에서 물잔을 뺏어 냉장고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빌보는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이 품었던 기대감이 현실로 다가왔으나,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소린은 주저앉은 빌보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마주하고 말했다.
"프로도 배긴스가 너의 조카이자 양자였고, 널 찾기 위해서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들었어. 물론 그를 찾아간 건, 내가 전생의 모든 기억을 되찾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빌보. 나는.."
소린은 잠시 목이 메는지 숨을 고르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곧 빌보를 향해 진지하고 확고한 말투로 자신이 하고 팠던 말을 건넸다.
"자네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내게는 축복이 아니라네. 그건 황금의 병보다도 더 무서운 저주야.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 말게."
전생에서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늘 꿈꾸며 그리워했던 소린이 바로 그의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빌보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이 고여있는 두 눈으로 소린을 마주 보았다. 소린 역시 고작 일주일 전에 헤어졌던 빌보를, 마치 아주아주 오랜만에 만난 듯한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린은 빌보의 떨리는 손을 따스하게 잡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좀도둑양반. 내가 너무 오랫동안 헤매다가 찾아온 모양이군. "
소린이 자신을 좀도둑이라 부르자, 이제껏 애써 버티고 있던 빌보의 눈물샘이 왈칵 터져버렸다. 빌보는 어린애처럼 와앙 울어버렸고, 많은 눈물이 빌보의 두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얼굴이 온통 엉망진창이었는데도, 빌보는 시선을 피하거나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소린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으면 그가 사라지고, 꿈에서 깨어버릴까 봐 소린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빌보는 울먹이느라,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으로 소린을 향해 답했다.
"당신은 흑.. 원래 길을 잘 못 찾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소린은 다정한 눈빛으로 빌보의 얼굴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빌보 배긴스. 그는 전생에는 소린의 친구였고, 이번 생애에서는 소린의 연인이었다. 소린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지금 그의 눈앞에는 친구이며 동시에 연인인 빌보 배긴스가 있었다. 이것은 기묘하면서도, 어쩌면 기적 같은 놀라운 인연이었다. 그들은 전생의 기억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그 계기를 만들어 준 빌보의 꿈에 얼마나 감사를 해야 할는지. 소린은 자신의 큰 손으로 빌보의 양 볼을 감싸고, 천천히 그를 향해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앞으로는 널 기다리게 하지 않겠네"
마주 닿은 이마로 전해지는 소린의 따뜻한 체온이 빌보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빌보는 눈을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보증할 수 있어요?"
"물론이지. 내게는 날 믿고 보증해줄 호빗이 있거든."
두 사람은 전생에서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소린은 천천히 빌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모든 것을 기억한 이후에 처음으로 하는 키스는 무척이나 미묘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척 행복하고 안심이 되는 온기였다. 이 온기를 되찾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돌아왔던가. 두 사람에게는 앞으로 나누어야 할 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소린이 죽고 난 이후의 빌보의 생애에 대해. 소린이 현재 살아왔던 삶에 대해. 소린과 빌보가 앞으로 나누어야 할 미래에 대해. 며칠 밤을 새워도 다 할 수 없을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들에겐 이제 아무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으니 문젯거리가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Fin
'호빗(Hobbit) > In Dreams(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린빌보] 냉장고를 바꾸는 방법 (4) | 2015.04.11 |
---|---|
[소린빌보] In Dreams (10) (4) | 2015.02.25 |
[소린빌보] In Dreams (9) (4) | 2015.02.23 |
[소린빌보] In Dreams (8) (0) | 2015.02.17 |
[소린빌보] In Dreams (7) (1) | 2015.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