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런어웨이 피앙세(연재)

[소린빌보/연재] 런어웨이 피앙세 08


Runaway Fiance


8.





  드왈린과 발린이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디스가 소린의 집에 머문 지도 사나흘쯤 지났다. 그건 빌보가 그 집에 머문 것도 그 정도쯤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럭저럭 디스와도 친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소린과도 예전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가볍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마냥 즐거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젠 빌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린의 얼굴이 결혼식장의 그 굳은 표정이 아니라 아침에 부스스하게 일어난 멍한 얼굴이라는 점은 상당한 발전이겠지. 빌보는 이런 식으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안에 트라우마처럼 남겨져 있던 파혼의 기억이 옅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특히 요 며칠사이 빌보의 단짝이 된 건 뜻밖에도 다섯 살배기인 소린의 조카 킬리였다.


 킬리는 다섯 살짜리답지 않게 영특하고, 또 그 나이에 맞도록 미친 듯이 활발한 아이었다. 아침부터 2층과 1층 계단을 우당탕거리며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온 집안을 휘젓다가도, 빌보와 눈이 마주치면 일전의 비밀을 기억해내고는 손가락으로 쉿-!하는 모양을 만들며 두 눈이 휘어져라 웃어 보이고는 했다. 상당한 비율로 빌보를 성가시게 할 때가 더 많기는 했지만, 가끔씩 저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빌보의 마음속에서 있지도 않은 부성애가 피어나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킬리는 빌보가 사다놓은 토끼모양 탁상시계를 특히나 좋아해서,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시계 앞으로 다가가 토끼에게 굿모닝 인사를,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굿나잇 인사를 단 하루도 빼먹는 법이 없었다. 그때마다 빌보는 옆에 있는 소린을 찌르면서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한껏 우쭐거리고는 했다.


“거봐요. 저 시계 사오길 잘했죠?”

“자네 취향이 5살짜리와 똑같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

“하여튼 한마디도 안 지는군요.”


 소린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킬리는 이 집안에서 빌보와 가장 죽이 잘 맞는 친구임이 틀림없었다. 킬리 같은 아이라면, 아이를 입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할 정도였으니.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디스도 킬리도 하물며 소린마저도 빌보를 그리 괴롭게 만드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빌보를 힘들게 만드는 건 킬리의 형, 10살짜리 필리였다. 


 필리는 그리 시끄럽거나, 사고를 치는 아이는 아니었다. 보통 열 살짜리 아이들이라하면 짓궂고 장난스럽고 활발하다고 알고 있는데, 필리는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도 어른들의 말에 반항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게임기를 꺼내서 소파로 쪼르르 달려가서 게임을 하는 것이 주요한 일과였다. 동생과도 크게 싸우지 않고, 가끔 킬리가 놀아달라며 귀찮게 굴 때는 게임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동생과 마당으로 달려가 공놀이를 할 줄도 아는 꽤 괜찮은 형이었다. 저 정도면 무척 어른스럽고 성숙한 아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필리의 어른스럽고 예리한 시선은 이따금씩 소린과 빌보가 품고 있는 위화감을 날카롭게 파헤치고는 했다. 




 바로 오늘 아침, 빌보는 모두를 위해 스크램블 에그를 준비했다. 이제는 단골이 되어버린 근처 마트에서 이른 아침부터 가장 신선한 달걀을 부랴부랴 사서 볼에 담고, 함께 사온 신선한 우유와 생크림을 섞어 팬에 올렸다. 아이들의 입맛을 고려해서 팬이 달궈져있는 동안 치즈도 듬뿍 넣어 더욱 고소한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 식탁에 올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킬리와 디스의 환희에 찬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오, 빌보. 내가 치즈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죠?”

“여자들의 9할은 전부 치즈를 좋아할걸요.”


 필리도 유난스럽게 반응은 안했지만, 치즈가 듬뿍 들어있는 스크램블에그가 마음에 드는지 말없이 열심히 스푼을 놀리고 있었다. 그 식사자리에서 느끼한 아침식사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건 오로지 소린뿐이었다. 소린은 영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 스크램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옆에 놓인 샐러드만 열심히 집어먹다가 이내 곧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소린은 치즈가 많이 들어간 음식은 느끼하다고 싫어했었지. 빌보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소린의 식성을 어렵게 떠올렸다. 


“미안해요. 당신은 치즈 많이 들어간 건 별로였었죠? 잊고 있었네요.”

“뭐.. 가끔은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음식투정을 하지는 않나보네. 다음부터는 이런 요리를 할 거면, 소린 몫의 음식은 따로 만드는 게 좋겠다고 빌보가 생각하고 있을 무렵,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필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함께 계속 살았으면서, 삼촌의 식성도 잘 몰라요?”


 두 사람은 순식간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쩌지?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디스도 필리의 말을 듣고 의문이 생겼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린과 빌보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크게 번질 수도 있을 텐데. 빌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재치있게 먼저 대답을 한 건 소린이었다.


“빌보는 내 식성을 잘 모른단다.”

“왜요?”

“그건, 내가 그동안 별로 음식투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디스가 놀란 듯 자신의 오빠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와는 물론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만, 자신의 기억속의 소린은 음식에 관해서 상당히 까탈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남자였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재료나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이 나오면, 바로 식사를 그만두거나 음식을 준비한 가정부를 불러 타박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빌보에게는 별로 음식투정을 하지 않았다니. 사랑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디스가 의미심장하게 제 오빠를 보며 웃음을 짓자, 소린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디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는 빌보도 마찬가지였지만, 거기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 일이 잘 해결되나 싶었는데, 한번 불이 붙은 필리의 의구심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필리는 평소와 다르게 계속 빌보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원래 빌보를 졸졸 쫓아다니는 건 킬리의 몫이었는데, 오늘은 필리라니. 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킬리와 달리, 필리는 빌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니 빌보가 느끼는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실 디스가 의구심을 품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빌보와 소린의 생활은 해괴하기 그지없었지. 온 집안에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누가 봐도 최근에 막 구매한 것 같은 커플물품들이 어색하게 놓여 있었으니. 


 게다가 가장 이상한 건, 그 집에 소린의 흔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빌보가 생활한 흔적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필리는 그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 수 있는 영리한 아이였다. 필리는 자신의 숙모가 작가라는 걸 엄마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왜 숙모가 쓴 책이 한 권도 없는 거지? 필리는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자신의 삼촌을 향해 다가가 물었다.


“삼촌, 왜 이집에 빌보의 책은 없어요?”

“뭐?”

“빌보가 쓴 책이 뭔지 궁금한데, 집안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서요.”


 계단 근처에서 킬리와 놀아주고 있던 빌보의 귀에도 필리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이건 정말 합리적인 의심이다. 열 살짜리에게 이렇게 허점을 찔릴 줄이야. 빌보는 명색이 스릴러소설 작가이자, 추리소설 마니아인 자신이 이렇게 바보 같은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무릎을 치며 통탄했다. 노트북이나, 아이디어 노트,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들의 초판들, 그리고 만년필 따위를 방에 가져다놓는 일은 했으면서 왜 자신이 쓴 책을 가져다 둘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빌보가 떨리는 얼굴로 소린을 바라보았으나, 소린도 이번에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듯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삼촌은 빌보가 쓴 책을 읽기는 했어요?”

“그야 물론이지.”

“근데 왜 집에 책이 없어요? 그 책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정말 내 책을 읽기나 했을까. 아니, 그랬을 리가 없지. 소린은 원래 소설보다는 철학이나 경제학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으니. 연애를 하고 있을때 빌보가 쓴 습작들을 보면서 표현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했던가, 화법이 너무 장황하다고 했던가. 문학적인 감각은 요만큼도 없는 실용의 극치를 달리는 남자가, 파혼한 전 애인의 책을 굳이 꼬박꼬박 찾아 읽을 리는 없겠지. 빌보의 책이 나름대로 꽤 넉넉하게 팔린 건 맞지만, 영국을 뒤흔들 정도의 베스트셀러인 것도 아니다보니 지나가다 읽었을 리도 만무하고. 빌보는 이래저래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필리의 질문에 괴로운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요 얄밉도록 영리한 꼬맹이 같으니. 


“빌보의 책이 없을 리가 없지. 배우자의 책인데, 당연히 서재에서 가장 소중한 곳에 보관해뒀지.”

“서재 어디에요?”

“따라오너라.”


 소린의 뒤를 필리가 쪼르르 따라가자, 빌보도 놀란 표정으로 슬금슬금 그들의 뒤를 쫓았다. 소린은 자신의 책상 옆에 자물쇠가 달린 책장 한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며 빌보의 눈치를 살피던 소린이, 천천히 자물쇠를 열고 책장 문을 열자 그 안에 정말로 빌보의 책들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필리는 빌보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흥미가 식은 듯 서재를 나가 자신의 게임기를 집어 들었고 킬리도 자신의 형의 곁으로 달려가 게임하는 것을 구경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서재에 덩그러니 남은 소린만 머쓱한 듯이 애꿎은 뒷목을 큰 손으로 슥슥 쓸었다. 세상에, 이게 정말 내 책이 맞는 거야? 빌보는 놀란 표정으로 책들을 꺼내 정말 자신이 쓴 책이 맞는지를 살펴보았다. 틀림없는 빌보의 책이었고, 그중에 어떤 책은 빌보의 친필 사인마저 되어 있었다. 뭐? 사인? 빌보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휘둥그레 해지며 소린을 향했다.


“이건 언제 받았어요?”

“뭐가 말인가.”

“사인회 딱 한번 했을 때 빼고는, 사인해 준 적 없는데?”


 설마 그 사인회에 소린이 왔었던 건가? 빌보는 황급하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빌보의 책 중에 가장 판매량이 좋았던 두 번째 소설이 출간되고, 빌보는 딱 한번 출판사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사인회를 했던 적이 있었다. 별로 남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당시 막 빌보의 담당이 되었던 해밀턴이 너무 의욕적으로 설득을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딱 한번 조촐한 사인회를 참석했었다. 처음 경험하는 행사였던지라, 워낙 정신도 없었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볼 경황도 없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소린을 못 알아봤을 리가 없었다. 혹여 지나가다가 비슷한 체구의 남자만 봐도 화들짝 놀라며, 소린이 아닐까 쫓아가서 얼굴을 살필 정도로 파혼의 충격에 휩싸여있던 빌보였으니. 


“내가 직접 받은 건 아니고,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했었지.”

“…왜요?”

“글쎄. 아마도 직접 갔다가, 멱살을 잡히거나 뺨을 맞고 싶지는 않아서?”  

“아니요, 그게 아니라 왜 내 책을 사러 왔냐고요.”


 소린은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이, 빌보의 손에서 책을 도로 빼앗아 원래 있던 책장에 조심스레 꼽아 넣었다. 빌보의 눈빛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소린도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마땅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빌보도 생각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직접 오지는 않았어도, 빌보의 모습을 지켜보기는 했다는 말인데. 왜? 내 소설의 광팬이라, 파혼을 한 전애인의 책이지만 기필코 사인을 받아야겠다고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어디 얼마나 잘 살고 있나 궁금해서 와봤나? 그랬으면 그때 내 모습을 보면서 조금쯤 후회를 했을까? 내가 나름 성공한 작가가 되어있어서? 아니,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르지. 내 인생에서 가장 적은 몸무게를 찍었을 때가 그쯤이었던 것 같으니.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눈빛으로 초췌해진 작가를 보며 뿌듯함이라도 느꼈을까? 아니면, 날 안쓰럽게 여기지는 않았을까. 내게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당시의 감정이 마치 지금의 것처럼, 빌보의 온몸을 감싸왔다. 빌보가 잠시 떨리는 두 몸을 자신의 팔로 감싸며, 절박한 표정으로 소린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소린은 아직도 빌보에게 답해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묵묵히 책장의 자물쇠를 잠그며 소린은 마치 자신의 마음마저 잠가버린 듯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오랜 침묵이 지난 후에 가까스로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고작 한 단어뿐이었다.


“글쎄.”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대답만을 남긴 채, 소린이 빌보를 지나쳐 서재를 빠져나갔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글쎄‘ 라는 한 단어가 마치 소린과 자신 사이에 흐르는 미적지근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때 소린이 무슨 감정으로 책을 샀든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빌보 역시 소린의 뒤를 따라 서재를 나서며, 아직도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흔들리지 말자, 미련을 갖지 말자며 스스로를 몇 번이나 다독이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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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문에 워낙 바빠서, 업로드가 좀 늦었습니다 ㅠㅠ

다들 명절 잘 보내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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