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VE NEST

7.

 빌보는 그의 부모님이 늦은 나이에 어렵게 낳은 외동아들이었다. 친척들이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 활발하게 교류를 할 정도로 친하지 않았고, 어쩌다 친척들을 만나러 간다고 해도 그들이 친척의 집을 방문하면 했지 빌보의 집으로 손님들이 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기에 빌보는 이렇게나 많은 친지들이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아는 바가 없어서, 거실 한가운데 서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당황한 채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집은 진짜 빌보의 집도 아니고, 소린의 친척들은 빌보가 겪어온 어떤 남자들보다 목소리가 크고 과격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가족들 사이에서 소린이 그렇게 과묵하게 자랄 수가 있었지? 출생의 비밀이나, 아니면 성장과정상의 비밀이라도 있던 거 아냐? 빌보는 곁눈질로 그의 사촌과 대화를 나누는 소린의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드왈린이라고 했던 소린의 사촌은 그와 꽤 친밀한 사이인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린이 저렇게 또래와 대화를 많이 하는 모습은 또 처음이라, 빌보로 하여금 생소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여유도 없이, 부엌에서 빌보를 부르는 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또 무슨 그릇을 찾으려는 거야. 왜 진짜 집주인인 소린을 내버려두고, 부엌에 관한 질문을 전부 빌보에게 묻는 걸까. 빌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힘없이 부엌으로 걸어가 디스에게 넓은 유리접시를 꺼내주었다. 아무쪼록 빨리 이 정신없는 하루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게, 현재 빌보의 유일한 바램이었다.

 지친 표정으로 부엌으로 걸어가는 빌보의 뒷모습을 소린이 슬쩍 바라보았다. 역시 사촌과 팔촌까지 부르는 건 너무했나. 하지만 런던에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온 김에 모두와 함께 시끌벅적한 저녁을 보내고 싶다는 디스의 간곡한 부탁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혼자 조용히 글만 쓰면서 살아왔을 빌보에게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끔찍할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별 수 없었다. 게다가 소린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여러 친지들과 어울리는 것이 얼마만인지. 아마 아주 어린 시절 몇 번을 제외하고는, 그의 인생에서도 이런 복작거리는 가족모임은 생소한 것이었다.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드왈린으로서는, 지금 이렇게 소린이 친척들을 초대해놓고 자신의 배우자를 소개하는 상황이 영 낯선 것이었다.

“난 자네가 결혼했다는 게 거짓말인 줄 알았네.”

 사실은 지금도 거짓말 같고. 드왈린의 말에 소린이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그 이상 크게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가만히 드왈린을 마주 바라보았다. 소린의 침묵을 자신의 말뜻에 대한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드왈린이 가만히 디스와 빌보가 있는 부엌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옛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디스와 프레린도 물론 그렇겠지만, 자네는 자네 어머니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질 않았나. 그래서 다른 형제들은 다 결혼을 한다 해도, 자네만큼은 평생 독신으로 남을 줄 알았네.”

“나도 그럴 줄 알았지.”

“그 대답은 결혼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인상을 극복할 정도로, 자네의 배우자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군.”

 그랬었지. 그렇다고 생각했었네. 소린은 드왈린에게 답하지 못한 속내를 손에 들려있던 와인과 함께 삼키고,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빌보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염치없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드왈린의 말을 반대로 뒤집어보면, 소린은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정도로 빌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정말로 빌보를 마음 깊이 사랑했다면, 그 결혼식장에서 도망치지는 않았겠지. 빌보와 떨어져있던 6년간 계속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난 그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어, 우린 그냥 거기까지였던 인연일 뿐이야. 그리고 충분히 스스로를 납득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빌보를 보니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해답들이 오답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인지.

“그래, 사랑에 빠졌지.”

 빠졌었지.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소린이 다시 한 번 혼잣말처럼 되뇐 말에, 결혼 6년차인데도 아직도 화끈하다고 소린의 등짝을 치며 드왈린이 호탕하게 웃었다. 옆에서 초코쿠키를 집어먹던 킬리도 이유를 모른 채 커다란 드왈린의 다리에 매달려 함께 웃었다. 소린의 속내와 어울리지 않는 화목한 저녁이었다.

 다 같이 둘러 모여 맛있는 식사와 적당한 알코올을 즐기고, 그동안 풀지 못한 이야기들을 질리도록 나누었다. 시간은 이미 밤 열두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이쯤 되면 손님들은 진작 돌아가고도 남았을 시간이거늘, 아무래도 소린의 사촌들은 빌보의 상식과 일억 광년 쯤 떨어진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빌보가 소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는 얼굴로 거의 복화술에 가깝게 속삭였다.

“당신 사촌들은 언제 집에 돌아간대요?”

“아,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는데.”

“뭐라고요?”

 속삭이는 것도 잊을 정도로,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모두의 시선이 빌보를 향해 쏠렸다. 맙소사, 자고 간다니. 그럼 내일도 이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책임져야한다는 소리야? 빌보의 표정이 사색으로 질리자, 디스가 알만하다는 듯이 안타깝다는 미소를 지었다. 결혼생활이란 언제나 이런 예상치 못한 인간관계가 같이 딸려오는 법이지. 그나마 다행히 도리와 노리, 오리는 아침에 일찍 볼일이 있어서 슬슬 돌아가 봐야겠다며 빌보와 친척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나마 조금 줄어든 손님들을 빈 방으로 안내하고, 잠자리를 살피고 나서 빌보와 소린 역시 그들의 침실로 돌아왔다.

 소린은 침대 맡에 개어져있는 요상한 무늬의 파자마를 보며, 다시 한 번 질색을 했지만 손님들도 와 있는 마당에 그 잠옷을 안 입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짜 이 무늬는 최악인데. 구겨진 표정으로 파자마를 입는 소린을 보며, 빌보가 침대 위를 뒹굴며 까르르 웃었다. 저 어울리지 않는 꼴이라니. 어제부터 즐거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까지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의외로 화려한 무늬가 아주 잘 어울리시는 군요, 소린 씨.”

“누가 고른 건데 어련하시겠어.”

“내가 물건 고르는 안목이 워낙 탁월하기는 하죠.”

 명백하게 비꼬는 말에도 뻔뻔하게 너스레를 떠는 모양을 보니, 그래도 손님 접대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나보다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의 파자마 입은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있는 것이 영 얄미워서, 침대위로 그 큰 몸을 집어던져 빌보를 깔고 누워버리는 소린이었다. 엌-! 소린에게 깔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빌보가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아예 이 기회에 촌스러운 물건은 더 못 사게 해야겠다 싶어, 소린이 빌보의 팔까지 잡아 누르며 짓궂게 말했다.

“앞으로 쇼핑을 할 때는 내가 동의한 디자인의 물건만 사도록 하는 게 어떤가.”

“왜요? 내가 고르는 물건들이 어때서!”

“솔직히 촌스럽네. 물건 보는 안목은 내가 훨씬 고급스러운 듯 하군.”

“삭막한 거겠지. 아! 이것 좀 놔요!”

“대답하기 전까진 어림도 없지.”

 둘이 한참 푸닥거리를 하는 통에 침대에서는 요사스럽게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그러다 노크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문 앞에서 곰 인형을 질질 끌고 서있던 킬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삼촌과 삼촌의 배우자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조카의 존재를 인지했다.

“킬리? 왜, 안자고 나와 있니.”

“쉬..”

 킬리를 발견하자마자 소린을 침대 저 건너편으로 밀어버리고, 빌보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당황한 표정으로 킬리를 향해 물었다. 설마, 킬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이러는 걸 본 건 아니겠지. 빌보는 킬리를 안아들고 화장실로 향하며, 혹시 다른 이들이 깨어있거나 침실 근처를 돌아다니지는 않았나, 조심스레 살폈다. 다행히 모두들 깊은 잠에 빠진 눈치였다. 오해를 받지 않는 편이 좋은지, 아니면 오해를 받는 편이 좋은지 모르겠네. 가짜 부부관계를 리얼하게 연기하려면, 차라리 둘이 뜨거운 관계를 가지느라 침대를 삐걱거리게 했다는 편이 낫기야 하겠지만.

“비밀이에요?”

“뭐라고 했니, 킬리?”

“우리 엄마가 이런 건 비밀이라고 했는데.”

 볼일을 다 보고, 다시 빌보의 품에 안겨 계단을 오르던 킬리가 뜬금없이 말했다. 아아, 디스가 아들교육을 참 잘 시켰네. 빌보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확 달아올랐다. 5살짜리 꼬마아이에게,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란다. 너희 삼촌과 나는 네 엄마와 아버지가 하던 그런 행위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란다. 이렇게 해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빌보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킬리가 내미는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그래, 부탁이니 절대. 아무한테도 오늘 본 일은 말하지 말렴.”

“응, 빌보랑 나랑 비밀.”

 디스와 필리가 잠들어있는 방 앞에 킬리는 내려놓자, 킬리가 씩씩하게 새끼손가락을 흔들며 방으로 들어섰다. 빌보가 왠지 착잡한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서자, 방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소린이 빌보를 맞이했다. 아까 침대 밑에서 떨어지면서 부딪힌 건지 한쪽 이마가 발갛게 부어있었다.

“힘이 꽤 좋으시더군. 빌보 배긴스씨.”

“그러게 왜 쓸데없이 어울리지 않는 장난을 쳐요.”

 어지간히 그 파자마가 입기 싫었나보네. 빌보는 소린을 얄밉다는 듯이 흘겨보고 침대로 가 누웠다. 소린도 별 말 없이 빌보의 옆에 누워 얼얼한 이마만 가만히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예전에도 요란한 빌보의 잠버릇 때문에 소린은 종종 침대 밑으로 떨어지고는 했었는데, 오랜만에 그때의 기억이라도 떠올랐는지 소린이 빌보를 향해 엄포를 놓았다.

“오늘은 더 이상 날 침대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지 않길 바라겠네.”

“민다고 밀리는 게 이상한거지.”

“침대에서 그냥 이렇게 얌전히 손발을 모으고 자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인데 말이야.”

 빌보의 두 손을 가지런히 잡아 빌보의 배 위에 손수 얹어주며 소린이 어린아이를 어르듯이 말하자, 빌보가 금세 발끈하며 소린의 안 좋은 습관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소린은 대개 조용한 수면을 취하는 편이었지만 어쩌다 격렬한 정사 이후에 많이 피곤 할 때면 코를 골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피곤할수록 잠귀가 밝은 빌보로서는 그 소리가 상당한 고역이었다.

“피곤하지만 않으면, 그럴 일은 없어.”

“저런, 나와 함께 잠들었을 때는 늘 피곤했었나보군요. 매번 코를 골던데.”

“그거야 늘 섹스를 하고 잠들었으니까 그렇지. 한 번도 아니고 늘 여러 번.”

“누가 여러 번 하라고 졸랐어요? 내가 그만 하자고 해도 매번 집요 했던 게 누군데.”

“말로만 그만하라고 하면서, 아쉬운 듯이 다시 엉겨 붙던 건 누구더라.”

“엉겨 붙었다고요?”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한참을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대화가 헤어진 연인들 사이에서, 그것도 한 침대에서 베갯머리를 나란히 하고 할 만한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둘 다 귀까지 빨개져서 휙 돌아서며 말없이 눈을 감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갑자기 생생하게 떠오른 예전의 기억들을 쉽사리 잠재울 수는 없었다.

 소린은 괜스레 뒤숭숭한 기분에 뒤척이며 쉽게 잠이 들지 못했으나, 빌보는 어느새 잠들어 두 팔과 다리를 또다시 제멋대로 휘젓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테니, 잠버릇이 과격한 것도 이해는 가지만 이러다가는 언제 또 빌보의 발에 치여 소린이 침대 밑으로 낙하할지 모를 일이었다. 소린은 가만히 빌보의 팔과 다리를 들어 처음 잠들었을 때의 상태로 모아주고, 입을 벌리고 잠든 빌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재회했을 때도 느꼈던 사실이지만, 빌보는 6년이 지났음에도 그리 나이가 들지 않아보였다. 원래도 별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슬슬 제 나이에 맞게 세상의 때가 묻을 법도 하건만. 회사생활이나 다른 사회생활을 안 하고, 스스로의 세상에서 머무르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빌보의 시간이 6년 전에서 그대로 멈춰있기 때문일까. 바보 같은 말이지만, 소린은 이따금 자신의 곁에 있는 빌보가 6년 전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그때의 빌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빌보는 그만큼 변한 것이 없는데, 자신은 그때와 얼마나 많이 달라져있는지.

 잠든 빌보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자, 빌보가 간지러운지 콧등을 찡그렸다. 만약 소린도 6년 전 빌보의 연인이었던 소린 오큰쉴드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때 그 선택을 했던 결혼식 날로 돌아간다면. 과연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소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지난 시간 동안 후회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만나 가짜로나마 빌보와 하는 결혼생활은 그의 예상보다 더 만족스러웠고. 오히려 너무 만족스러워서 위험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같은 선택을 할 기로에 놓여있다고 해도, 선택은 같겠지.

-결혼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인상을 극복할 정도로, 자네가 배우자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군.

 몇 시간 전 자신에게 물었던 드왈린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사랑에 빠졌었지. 그리고 빌보는 여전히 사랑스러워. 소린은 빌보의 잠든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자신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답을 떠올렸다.

‘그래서, 난 그와 결혼을 할 수 없었네.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