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런어웨이 피앙세(연재)

[소린빌보/연재] 런어웨이 피앙세 05

Runaway Fiance



5.

 

 

 

 토끼모양 탁상시계를 둘러싼 다툼이 있고 두어 시간쯤 침실에 처박혀 있던 빌보가, 슬그머니 부엌으로 내려왔다. 아무리 서로 기분이 상해있다고 하더라도, 끼니는 걸러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빌보였다. 아무리 바쁜 마감을 치르고 있다하더라도, 아무리 가난한 작가지망생 시절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식사시간은 한 번도 그냥 지나쳐진 법이 없었다. 물론 아까 전 소린이 했던 얄미운 발언을 생각하면, 그가 밥을 거르던 말든 자기 몫의 식사만 차려 먹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으나, 막상 1층으로 내려와 소파에 처량 맞게 웅크리고 때늦은 낮잠을 자고 있는 소린을 보니 금세 마음이 여려지는 빌보였다.


 이렇게 마음이 약하니까 전 약혼자의 가짜 부부행세나 하고 있지. 스스로의 미련함을 탓하면서도, 차라리 미련하게 구는 편이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빌보는 가만히 두 사람 몫의 재료를 냉장고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심플하게 마늘로 향을 낸 오일파스타를 접시에 깔끔하게 담아 식탁 맞은편에 내려놓았다. 그보다 약간 적응 양의 파스타가 담긴 접시를 자신의 자리에 내려놓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삐딱하게 소린이 앉아있는 소파를 노려보았다. 소린은 진즉에 잠에서 깨었지만, 조용해진 부엌의 기색만 살피며 일어나지도 다시 잠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일어났으면 냉큼 저녁 먹으러 와요.”

“......”


 빌보의 목소리에 소린은 머쓱한 듯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소파 귀퉁이에 눌린 한쪽 머리가 삐죽 솟아 있었으나, 본인은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빌보의 옆으로 다가섰다. 가만히 식탁에 앉으려나 싶었는데, 소린은 식탁 의자를 지나쳐 아까 장봐온 꾸러미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찾는 모습을 빌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았다. 배가 안 고픈 건가, 아니면 파스타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불안한 표정의 빌보를 뒤로하고 소린이 짐 꾸러미 안에서 토끼모양 탁상시계를 꺼내들었다. 전체적인 집안의 분위기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앙증맞은 핑크색의 탁상시계를 떡하니 거실 한가운데 올려두고, 말없이 식탁에 앉아 포크를 집어 드는 소린의 얼굴을 3초간 바라보던 빌보의 입가에 은근한 호선이 그려졌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포크와 접시가 부딪히며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 이후로 더 다툴 일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바로 그날 밤 커플잠옷을 입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로 두 번째 다툼이 시작되었다. 대체 어느 틈에 산건지, 화려한 무늬가 프린팅 되어있는 실크 파자마를 침대위에 꺼내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취향은 어떻게 안 되는 건가?”

“어쨌든 부부애를 과시하려면, 이렇게 한 번에 눈에 띄는 편이 좋아요.”

“그럼 디스가 왔을 때 입으면 되겠군.”

“어제 사왔어요- 하고 광고할일 있어요? 지금부터 입어서 좀 새 거 티를 없애놔야지. 그리고 어차피 당장 입을 잠옷도 없잖아요.”

“저걸 입을 바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안 입고 자는 편이 낫겠군.”


 저 고집불통. 빌보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당장 오늘 또 2라운드를 벌이기엔, 두 사람 다 너무나 지쳐있었다. 오늘 하루만 대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 건지. 체념한 듯이 한숨을 내쉬고, 빌보는 주섬주섬 작은 사이즈의 파자마를 챙겨 입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위에 또 큰 사이즈의 파자마를 챙겨 입는 모습을 보며 소린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이 안 입는다고 하니, 나라도 입어서 구겨지게 만들려고요.”

“더울 것 같은데..”

“헐벗고 잠들어야하는 당신이야말로, 추위 조심하시죠.”


 빌보의 말에 소린 역시 오기가 난 듯 입을 꾹 다물고, 입고 있던 티셔츠를 한 번에 벗어 던졌다. 아무데나 옷을 벗어두지 말라는 빌보의 잔소리가 뒤따르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훌렁훌렁 잘도 옷을 벗어젖히는 소린이었다. 몸 쓰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몸이 왜 저렇게 좋은지. 자신의 뱃살을 떠올린 빌보가 잠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린의 상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6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그의 근육은 여전히 젊었을 때의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단단한 팔 근육에 안겨 흔들리던 밤이 얼마였고, 그의 어깨에 매달려 등 근육을 손끝으로 안타깝게 쓸어내렸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상기된 빌보를 뒤로하고, 소린이 먼저 침대위에 몸을 뉘였다.


“왜 거기 누워요?”

“그럼 침대 말고 어디에서 자라고.”

“그럼 나더러 소파에서 자라는 거예요?”

“같이 자면 되잖나.”

“내가 왜요?”


 빌보는 소린이 누워있는 침대 머리맡에서 베개를 잡아채 끌어안고, 심통이 가득한 표정으로 소린을 노려보았다. 어쨌든 손님 아닌 손님입장으로 와있는 사람을 소파로 몰아내다니. 소린의 말마따나 침대에서 함께 자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가짜 부부행세를 한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니었다. 빌보는 질질 끌리는 파자마 바지를 추켜올리며 뒤돌아서 침실을 나가려 했지만, 그런 그의 팔을 소린이 단단하게 잡아 뒤로 끌었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고 끌어당겨진 빌보가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위에 나뒹굴었다.


“뭐하는 거예요!”

“어차피 디스가 오면 내내 이 침대에서 함께 자야하니까, 번거롭게 굴지 말고 여기서 자. 새삼 한 침대를 쓴다고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더 생길 일도 없잖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막상 또 저런 말을 들으니 심란한 기분이 드는 빌보였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별다른 대꾸 없이 빌보는 침실의 불을 끄고 소린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워낙 가까이에 있는 탓에, 온기며 숨소리가 고스란히 서로에게 와 닿고 있었다. 가만히 고른 숨을 내쉬고 잠에 빠지려 노력했지만, 피로한 육체와 반대로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게 얽혀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웠던 마지막 밤은 6년 전 결혼식 전날, 빌보의 방안에서였다. 소린의 속마음이야 어땠는지 몰라도, 빌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설렘이 가득한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었다 깨어나면 소린과 부부가 되어있겠지. 우린 어떤 부부가 될까, 얼마나 행복하게 함께 지낼 수 있을까.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하겠지? 하지만 한 집에서 살을 부대끼다 보면, 서로 별다른 사과의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화해할 수 있겠지. 다음날 자신에게 닥칠 끔찍한 관계의 파국을 예상도 하지 못하고, 빌보는 들뜬 마음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우습게도 지금은 연인도 아니고, 약혼을 한 사이도 아닌데, 그때 자신이 생각했던 사소한 다툼과 은근한 화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침대를 쓰는 현실을 맞이한 것이 웃겨 빌보는 혼자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빌보는 며칠 동안 자신이 외웠던 소린의 지난 6년간에 행적에 관한 문장들을 떠올렸다. 빌보는 가만히 몸을 돌려 눈을 감고 바른 자세로 잠든 소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린, 자요?”

“......”


 소린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가만히 떨리는 그의 속눈썹을 보고 빌보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뭐, 정말로 잠들었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별로 대답을 기대하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난 나랑 헤어지고, 당신이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당신이 날 떠나간 이유가 내게 질려서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내게 외우라고 건네준 페이퍼를 보니까 그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더군요. 뭐, 물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적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빌보의 말을 듣고 있던 소린이 가만히 감겨 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렇다고 빌보를 바라보거나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빌보의 다음 질문을 재촉했다. 빌보는 소린 쪽으로 돌리고 있던 몸을 바로 뉘이고, 천장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왜 당신의 가족들에게 나와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안했어요?”

“.....”

“그것도 6년이나.”


 왜 행복하지 못했어요? 왜 날 버렸어요? 왜 도망쳤어요? 빌보의 머릿속에 묻고 싶은 이야기들이 산더미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났으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고작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 역시 대답을 듣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어차피 대답 해주리라고는 기대도 안했지만. 빌보는 가만히 한숨에 가까운 날숨을 내쉬고, 그대로 눈을 감고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내일은 그의 여동생이 온다. 그들의 앞에서 성공적으로 화목한 부부행세를 하게 된다면, 이 답을 알지 못하는 의문이 자신의 삶을 괴롭힐 일도 없겠지. 빌보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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