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런어웨이 피앙세(연재)

[소린빌보/연재] 런어웨이 피앙세 04


Runaway Fiance

  

4.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소린의 2층집은 적당한 세월을 간직한, 따스한 색깔의 벽돌색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마치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셋 정도 키우는 배나온 가장이 살고 있을 것 만 같군. 빌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어딜 보아도 소린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이 인간이, 날 붙잡고 사기를 치나. 어디 급한 대로 아무 집이나 렌트해놓고, 자기 집이라고 거짓말 하는 거 아냐? 빌보의 미심쩍은 시선을 느꼈는지 소린이 멋쩍게 한번 헛기침을 하고, 빌보의 짐이 들려있는 박스를 거뜬하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곧이어 빌보의 볼멘 푸념소리가 이어졌다.


“내 짐은 내가 들 수 있으니, 박스를 내려놓으시죠. 미스터 오큰쉴드.”

“남편이 아내의 짐을 들어주는 쪽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미세스 오큰쉴드.”

“남... 뭐라고요? 말은 바로 하죠. 우리는 동성부부니까 어느 쪽도 미세스가 될 수 없어요. 굳이 내 성을 당신 성으로 바꾼다 치면, 빌보 오큰쉴드가 올바른 호칭이겠죠.”

“어련하시겠어. 그럼 이렇게 하지. 난 나보다 체력이 약한, 작가님의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서 박스를 옮겨주는 걸로.”

“그렇다면 좋아요.”


 이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가벼운 책을 들고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빌보를 흘낏 바라보며, 소린은 그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은 같았지만, 빌보는 예전부터 남자 애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여성 취급하는 시선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차라리 자신이 키가 작고 왜소하기에 받는 취급이라면 모를까. 어떤 이들은 그거나 저거나 어차피 도움이나 배려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빌보에게 반문하기도 했지만, 그 두 가지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명백한 차이가 있다고 언제나 빌보는 주장했다.

 

 “오, 이런 맙

소사.”

 현관을 열고 드디어 집안으로 들어선 빌보의 입에서 진심으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 집의 겉모습을 보고 소린과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집이라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외관을 배반하는 삭막한 내부의 풍경이라니. 그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널찍한 거실에는 어두운 나무색의 테이블과 검은색 소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부드러운 질감의 커튼대신 병원을 방불케 하는 하얀색 블라인드가, 아기자기한 가족사진이 걸려있는 벽지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이 빌보의 두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이 거실에서 소설을 쓰게 된다면 훌륭한 사이코드라마가 나올 수 있겠군. 아니면 밀실 살인사건이라든지.


 “제가 쓸 방은 어디죠? 설마, 그 방도 이렇게 삭막하지는 않겠죠?”

 “침실은 하나뿐인데. 디스에게 배우자와 각방을 쓰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잖나.”

 “망할..”


 헤어진 옛 연인과 한 침실에서 잠들고 함께 눈을 떠야한다니, 이 무슨 끔찍하고 어이없고 민망한 상황인지. 위층 침실에 올라가보니 당연하게도 외로이 놓여있는 킹사이즈의 침대를 바라보며 빌보는 절망스럽게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침대는 당연히 하나여야겠지. 하지만 소린과 한 침실을 써야한다는 사실보다 더 절망스러운 건 그 침실 역시 부부의 침실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다른 가구는 아무것도 없이 침대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생활감이 없는 집에서, 소린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거지?


“좋아요. 일단 밥이나 먹고, 이 말도 안 되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구요. 설마, 냉장고도 없는 건 아니겠죠?”

“냉장고는 있어.”


 식재료는 없지만. 빌보는 텅 빈 냉장고를 열어보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마음을 담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의식주라고 했건만, 의를 제와한 모든 것이 이렇게까지 거세되어있는 공간에서 한 달 이나 지내야하다니. 그것도 자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파혼한 옛 약혼자와. 차라리 지금이라도 해밀턴에게 전화해서, 출판사에 감금당해 기계처럼 소설을 쓰는 길을 택할까. 냉장고에 잠시 얼굴을 묻고 있다가, 그 냉기가 얼굴을 온통 싸늘하게 식혔을 때야 겨우 빌보는 현실적인 결론을 내렸다. 일단, 마트에 가자.

 


 

 때마침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주부와 남편, 아이들이 마트를 시끌벅적하게 메우고 있었다. 빌보는 이런 생활감이 넘치는 북적거리는 공간을 좋아했다.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대화를 엿듣고, 다양한 삶의 표정들을 살피는 것은 작가로서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으니까. 이렇게 마주쳤던 얼굴들이 빌보의 소설에서 목격자가 되고, 제보자가 되어 그의 세계를 현실감 있게 메꾸어주는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는 했다. 물론 불행히도 빌보의 소설은 스릴러라서, 되도록 주연급 캐릭터의 모델이 되지 않는 편이 저런 소시민들에게는 행복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시트콤이나 행복한 가족소설이 어울릴 것 같은 풍경 속에 유일하게 빌보의 스릴러 소설의 주인공으로 안성맞춤인 남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트를 밀고 있었다. 소린은 장보기에는 영 관심이 없는 듯 한손으로는 카트 손잡이를, 한손으로는 휴대폰을 들고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얄미워. 자신은 10분 째 어떤 우유가 더 좋을지, 어떤 치즈가 더 소린의 입맛에 맞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저렇게 누가 봐도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표정으로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는 소린이라니. 빌보는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저지방우유를 카트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자기가 먹을 걸 고르고 있는데, 좀 관심이라도 가지는 게 어때요?”

“난 별로 가리는 음식이 없는데.”


 웃기고 있네. 조금이라도 자기가 싫어하는 재료나 향신료가 들어가면 금방 포크를 내려놓는 소린의 까탈스러운 식성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빌보로서는 그의 말이 그저 우습게만 들릴 뿐이었다. 보나마나 6년 내내 자기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같은 메뉴만 줄 창 시켜먹으며 단조로운 식생활을 유지했을 소린의 모습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빌보는 까다로운 시선으로 주부들 사이에 섞여 신선한 식재료들을 쏙쏙 잘도 선별해 카트 안에 집어넣었다. 소린과 가짜결혼생활을 하는 한 달 동안 드는 모든 생활비는 소린의 크레디트카드로 결제하기로 했으니, 평소 선뜻 구매하지 못했던 비싼 재료들을 마음껏 펑펑 사들이는 빌보였다.


“대체 이 많은 식재료들을 누가 다 먹어치운다고..”

“성인 남자 두 명의 식사량을 우습게보지 말아요. 게다가, 당신의 여동생 가족들이 오는데 이 정도는 한 끼면 사라질걸요. 이 마트를 앞으로 몇 번 더 들락날락 거려야할지 난 장담할 수 없군요.”

“디스가 오면 식사는 밖에서 사먹으려고 했는데.”

“당신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조카들에게 바깥음식을 먹이겠다고요? 삼촌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신경해서야.”

 

 드디어 빌보가 식품관을 다 돌았고, 소린은 슬슬 아파오는 두 다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마트의 계산대로 카트를 밀었다. 그러나 그 카트를 막아 세우며, 빌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직도 더 사야할 것이 남아있었나. 그리고 소린의 불길한 예감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빌보는 카트의 한쪽을 끌어당기며, 생활용품이 있는 코너를 가리켰다.


“베개커버와 이불, 쿠션, 소파커버까지 전부 새로 사야해요.”

“왜 굳이. 그 정도로 더럽게 사용하지는 않았어.”

“나도 알아요. 오히려 너무 깨끗하게 사용해서 문제죠. 도대체 어떤 가정집에서 그렇게 칙칙한 커버를 사용하겠어요. 우리는 이 집에서 함께 살았던 적이 없습니다― 라고 당신 여동생에게 광고라도 할 셈이에요?”

“......”


 자신에게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는 소린을 향해 통쾌한 복수심마저 느끼며, 빌보는 경쾌한 걸음으로 생활용품코너를 향해 걸어갔다. 이 꽃무늬는 너무 할머니 냄새가 나는군. 이 땡땡이 무늬는 너무 유치하고. 오, 저 머그잔은 무섭도록 내 취향인데? 빌보는 마치 진짜 신혼집이라도 꾸미는 것 마냥 들떠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지치지도 않고 쇼핑을 계속했다. 소린의 귀찮음은 슬슬 한계치에 다다랐으나, 얼굴 가득 신이 난 표정이 역력한 빌보의 얼굴을 보니 이정도 귀찮음 쯤은 잠시 참아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 쇼핑이 거기서 두어 시간쯤 더 연장되자,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는 했지만.

 


 토끼모양의 탁상시계를 사느냐 마느냐로 한번, 생각보다 지나치게 많이 나온 물건들의 총액 때문에 마트의 계산대에서 한번, 빌보의 말을 듣지 않고, 소린이 무리하게 주차된 차를 빼다가 모서리가 긁혀서 또 한 번, 그리고 차안에서 저녁식사 메뉴를 정하면서 또 한 번. 그들은 오늘 저녁에만 총 네 번을 서로 소리를 높이며 싸웠다. 연애를 하던 시절에도 사소한 일로 몇 번 씩 다툰 적이야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시시콜콜한 일들을 계기로.

 소린의 집, 아니 이젠 두 사람의 집으로 잠시 바뀐 2층집 마당으로 차가 들어서고, 일부러 오기를 부리듯 양손 가득 무거운 비닐봉투를 들고 빌보가 쿵쾅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저렇게 심통을 부리면,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남자가 따로 없다니까. 소린역시 불쾌한 기색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나머지 짐들을 들고 빌보의 뒤를 따라갔다. 쇼핑을 지나치게 오래하는 것도,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들이는 것도 다 참을 수 없었지만, 소린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저 말도 안 되는 물건들이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집안에 놓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빌보의 물건 고르는 안목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세련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촌스러움의 결정체. 그가 즐겨 입는 체크무늬 남방부터, 가방, 신발에 이르기까지. 그가 미술가가 아니라, 글 쓰는 직종에 종사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디스에게 화목한 부부의 모습을 가장해서 보여줘야 한다고 해도 그렇지, 소린은 디스가 자신의 취향이 변했다며 웃는 얼굴을 상상하고 질색을 하며 어깨를 떨었다.


“좋아. 다른 건 다 양보하도록 하지. 커튼도 그 말도 안 되는 하늘색으로 바꿔달아도 되고, 소파 커버도 빌어먹을 땡땡이로 바꾸던지 말든지 알아서 해. 침대 커버……. 그래 불 끄고 눈을 감으면 그 거지같은 꽃무늬는 안보일 테니. 그것도 맘대로 하게.”

“거지 같.. 뭐라고요?”

“하지만,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건 안 돼.”


 소린은 거실의 선반 한가운데에서 그 존재감을 당당히 과시하고 있는 토끼모양의 탁상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이 집에 있다면, 딱 좋아할만한 모양의 깜찍한 탁상시계였다. 하지만 소린도, 빌보도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왜 저런 흉물스러운 시계가 남들도 다 보는 거실에 있어야한다는 건지. 빌보도 내심, 저 시계는 조금 너무했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앞에서 자신의 취향을 한껏 비웃었던 소린의 어휘선택에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기에,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저 시계가 어때서요? 토끼는 예로부터 화목한 가정의 상징이었다고요.”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뭐, 당신이 문학적 상징과 다양한 토속신앙에 대해 뭘 알겠냐만. 어쨌든, 6년차 부부라면 살면서 싱글일 때의 취향과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이런 취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면, 평생 싱글인 게 낫겠군.”

“아하, 그래서 당신이 결혼식장에서 그렇게 달아났었군요.”

“이 말도 안 되는 인테리어를 보니, 차라리 그때 파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빌보의 말문이 순식간에 막혔다. 소린도 아차 싶은 표정으로 말을 멈추고 빌보의 표정을 살폈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빌보가 당장에라도 토끼시계를 박살내버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빌보의 마음도 소린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파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상처 입는 자신을 인정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빌보는 평소 그의 말투와 다르게 깊숙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린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내 생각에도 우린 그때 파혼하길 잘한 것 같군요.”

“빌보..”

“만일, 그때 당신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결혼하고 한 달도 못되어 내가 도망쳤을 것 같네요. 수고를 덜어줘서 고맙군요.”


 빌보는 장봐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던 그 상태 그대로 탁자위에 팽개쳐두고, 2층에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독기 어리게 쏘아붙이던 말투와는 별개로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소린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역력했고, 소린 역시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침대위에 엎어져서 우울한 표정으로 씨근덕거리며 힘들어할 것이 분명한 빌보였다.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6년 전 명백한 잘못을 한 것도, 아쉬운 부탁을 한 쪽도 자신인데 그 잠시의 울컥함을 참지 못하고 빌보에게 싫은 소리를 하다니,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것이 너무도 실감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소린의 아버지. 세 자녀 중에도 유난히 아버지의 외모를 닮은 소린이었다. 비단 외모뿐만 아니라, 사람냄새나지 않는 삭막한 인테리어와 깔끔한 가구를 선호하는 취향, 깊게 울리는 듯한 저음의 목소리,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을 싫어하는 성향까지. 디스는 종종 소린을 보면 오빠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소린은 제 아비를 판에 박은 듯이 닮아있었다. 그리고 뭔가 화가 나거나 울컥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는 신랄한 비난을 내뱉는 모습까지, 소린의 아버지가 이미 소린에게 지긋지긋하게 보여주었던 모습이었다.


“이래서, 결혼을 안 하려 했던 건데.”


소린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텅 빈 거실에 울려 퍼졌으나, 그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쓸쓸히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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