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런어웨이 피앙세(연재)

[소린빌보/연재] 런어웨이 피앙세 02

 

Runaway Fiance

 

 

2.

 

 

 시작은 빌보가 그렇게도 혐오스러워하는 로맨스 드라마처럼 달콤했다. 빌보는 아직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책을 단 하나도 출간하지 못한 상태였고, 카페를 매일같이 들락거릴만한 금전적인 여유도 없는 가난한, 하지만 결코 행색이나 마음만은 궁색하지 않은 20대 후반의 작가지망생이었나. 28살의 빌보 배긴스의 생활패턴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그는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눈을 떠서 달걀프라이와 크로와상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렇다고 빌보의 아침잠이 지금보다 적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난한 지망생인 그는 그의 플랫에서 10분정도거리에 위치한 공원의 벤치에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커피를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언제든 그에게 쾌적한 공간을 제공하는 이 야외 작업실은, 불행히도 해가 지고 나면 이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공간이었다. 물론 비가 오는 날이나, 날씨가 지나치게 추운 날에도 빌보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는 5월말 이었고, 일 년 중에 공원을 이용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계절이었다. 가벼운 에코백에 대학시절부터 애용하던 그의 랩탑과 물병을 담고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도 손수 만들어서 챙겼다. 그의 아이디어가 오롯이 담겨있는 이름 없는 노트와 요즘 가장 흥미롭게 읽고 있는 중견작가의 두툼한 추리소설을 낳고나니, 에코백을 둘러맨 어깨 한쪽이 제법 묵직해져있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공원 구석진 곳에 덩그러니 위치한 벤치로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을 때, 그 곳에 자신보다 먼저 누군가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빌보는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빼앗긴 일이 처음은 아니었던지라, 빌보는 가까운 나무그늘아래 자리를 잡고 주저앉아 그가 곧 벤치를 떠나기를 기다렸다.

 


 보통 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짧은 휴식만을 취하고 곧 벤치를 빌보에게 내어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가 곧 일어나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자는 그 큰 덩치로 벤치에 오도카니 앉아 가만히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옷차림이 화창한 5월에 공원을 방문한 사람의 것으로는 전혀 보이질 않아서 빌보는 순간 그가 악마나 사신과 같은 초현실적인 존재가 아닌가싶은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온몸을 검은색 정장으로 휘감은 남자는, 자신이 입은 옷처럼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악마나 사신이 아니라 그저 장례식을 치르고 온 것이겠지.

 빌보는 주변의 온화한 풍경과 동떨어져있는 그의 행색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표정이 침통한 것을 보니, 가까운 이의 장례식이었던 모양이다. 절친한 친구였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이었을지도 모르지. 자연사나 병사라기보다는 예측하지 못한 사고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살해를 당했을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그가 다녀온 장례식의 장본인이 죽는 일에 저 남자가 일조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세상이 무너진 듯한 침통한 표정으로, 바로 2미터 옆의 빌보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넋을 놓고 있을 리가 없으니.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소설가인 빌보의 상상력이 빚어낼 결과일터, 저 무고한 남자에게 살인방조의 의심을 덧씌우는 무례한 짓은 그만두기로 하고, 빌보는 가방 안에서 소설책을 꺼내 읽으며 그가 자리를 뜨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빌보가 책 한권을 다 읽을 때까지도 그가 벤치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빌보에게는 대단히 불행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차피 공원은 런던시민 모두의 것이지 빌보의 사유재산이 아니었으니, 빌보가 그를 향해 짜증이나 불만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어야겠지만 그럼에도 빌보는 지금 상당히 불만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저렇게 멍하니 앉아 있을 거라면, 자기 집 소파나 지하철역이나, 하다못해 화장실에 앉아있어도 상관없을 텐데 왜 이다지도 화창한 5월의 공원에서 저러고 앉아 빌보의 자리를 빼앗고 있는 건지. 덩치라도 작으면 말을 안 하겠지만, 워낙 산만한 체구로 벤치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으니, 빌보가 비집고 들어가기도 상당히 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빌보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 있었고, 그가 뭐라 생각하든 말든 빌보는 그에게 말을 걸어 벤치의 절반이라도 확보할 작정으로 주저앉아있던 나무그늘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기요.”


 그렇게 가운데서 있지 말고, 한쪽 옆으로 좀 비켜주실래요? 저도 벤치를 이용할 권리가 있는 런던시민이니까요. 라고 말을 꺼내려던 빌보는, 저기요라는 말 한마디만을 던진 채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서 툭 떨어진 한줄기 눈물을 목격한 탓이었는데, 다 큰 성인 남자가 우는 것을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당황스러운 감정마저 들 정도였으니. 그런 그에게 자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신랄한 말들을 건네는 건 아무리 불만에 가득 찬 빌보라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있는 빌보를 알아챘는지, 급히 눈물을 닦으며 벤치의 한쪽을 내어주었다.

 일단 자리를 비켜주니까 같은 벤치에 앉기는 했으나, 그 또한 상당히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이었다. 빌보는 차라리 아까 그 나무그늘에 계속 앉아있을걸 그랬다며 후회를 표현하는 문장들을 수십 가지나 떠올렸다. 다 큰 성인 남자들이 그다지 크지도 않은 벤치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꼴이라니. 그것도 한 남자는 시커먼 상복을 입고, 두 눈가에 눈물까지 매달고 있는 채로.

 

 어색함 때문에 마치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남자는 빌보를 의식한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울지 않으려했지만 그는 그 후로도 두 번 정도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무릎위에 랩탑을 꺼내서 3줄쯤 글을 써내려가던 빌보는, 결국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의 존재감을 지나치지 못하고 랩탑을 그대로 닫아버렸다. 빌보는 자신의 에코백에서 아침에 챙겼던 햄 샌드위치를 꺼내 과감하게 반쪽을 소린에게 내밀었다. 그 의도를 알지 못해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자신을 바라보는 소린에게 빌보가 씩씩하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먹어요. 먹고 기운 차려야 울기도 하고, 털고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니까. 나도 열네 살 때, 스팅이 죽어서 3일 내내 울었던 적이 있어요. 아, 스팅은 내가 기르던 강아지 이름이에요. 웰시코기였죠. 근데, 3일내내 아무것도 안 먹고 울다가 그대로 황천길가서 스팅이랑 재회할 뻔 한 위기에 처했는데…….”

“저기…….”

“아, 거절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이건 내가 먹어야하는 점심이지만, 나는 반쪽만으로도 충분해요. 당신은 덩치가 커서 반쪽으로는 좀 모자랄 수도 있겠지만, 그것까지 고려해주기엔 나도 점심은 먹어야하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오, 햄 샌드위치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의 햄으로 직접 만든 건데. 물론 훈제 햄이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기엔 내 주머니사정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남자가 무언가 말하려 할 때마다 쏟아지는 빌보의 수다에,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 더 빌보에게 말문이 틀어 막힌 이후에나 겨우 그는 자신이 원래 하고팠던 말을 꺼낼 수 있었는데, 그는 그저 물을 먼저 마시고 싶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울고 난 이후에는 목이 메기 마련이니까. 그 말을 듣고 난 빌보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붉어졌고, 나중에 듣기로는 그 순간이 그가 빌보를 사랑하게 된 순간이라고 했다. 물론 한 번에 사랑에 빠졌다기보다는, 그 순간의 호감이 그로 하여금 빌보에게 저녁식사를 제의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급속하게 사랑으로 번져간 것이었지만. 그 남자의 이름은 당연히도 ‘소린’이었으며, 둘은 매우 빠르고 열렬하게 사랑에 빠졌다.


 물론 그 연애가 3개월로 끝날 거라고는 당시의 빌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 소린은 근처 무역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회사원이었고, 업무의 특성상 해외에 체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의 절친한 동료가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업무차 모로코에 가 있었고,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 동료의 죽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이후였다. 워낙에 소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동료였다. 단순한 직장동료를 떠나서, 어쩌면 결혼을 하고 노인이 된 이후까지도 계속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어느 장례식이나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있기는 매한가지지만,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강도에게 찔려 죽은 젊은 남자의 사연을 그 누가 안타깝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의 죽음이 소린의 인생에 커다란 결정을 하게 만든 건지도 몰랐다.

 


 소린은 자신의 인생 또한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와 사랑에 빠진지 이제 막 두 달이 된, 지금 소린의 눈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해산물이 들어간 크림파스타를 먹고 있는 빌보와도 언제 어떻게 헤어지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 공원에서 빌보를 만났을 때도, 빌보는 누구보다 뿌듯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었다. 그 미소에 홀린 듯이 저녁식사 제의를 했고, 그때도 빌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스테이크를 썰었었지.

 소린은 본디 먼저 고백을 하거나, 로맨틱한 데이트를 제안하는 일에 서툴렀다. 연애경험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일하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 사랑을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도 두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을 때 호감을 표현하는 일에는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 소린 오큰쉴드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스킨십을 하는 것에도 소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소극적이지 않다는 것이 적극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상대가 원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에로틱한 남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빌보야 뭐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창작자였으니, 그들의 관계진척은 곧 육체적인 친밀함으로 이어졌다.

 

 그날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소문대로 부드러운 맛의 크림파스타를 자랑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가까운 호텔 룸으로 향했다. 소린은 질색을 하지만, 빌보가 언제나 선호하는 장미향의 입욕제가 풀린 욕조에 함께 몸을 담그고, 어린아이처럼 거품을 튀기다가 곧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농밀한 키스로 이어진다. 코끝에 간질간질한 장미향이 맴돌지만, 그게 입욕제의 향인지 빌보의 체취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아득해져왔다. 귀엽게 튀어나온 코 끝에 입을 맞추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두 손으로 감싸니 빌보의 두 뺨이 장밋빛으로 붉게 물드는 것이 소린의 눈에도 보였다. 소린은 부끄러운 듯 가만히 눈을 감는 빌보의 이 표정이 언제나 좋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구사하지만, 자신에게로 전해지는 감정에는 유난히 수줍어하는 남자였다. 사랑스러운 마음과 거칠게 그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뒤엉켜 휘몰아치며, 아랫배에 피가 몰리며 당겨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속내가 어떻건, 소린의 섹스는 언제나 로맨틱하고 신사다웠다. 빌보가 녹진하게 흐믈거릴 정도로 정성들여 그의 어깨며, 손등이며, 가슴이며, 물 밖으로 드러나 있는 빌보의 모든 신체에 입을 맞추었다.


“그동안 만났던 상대들한테도 전부 이렇게 정성을 들였나요?”

“물론이지. 몸을 섞을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럼, 그 사람들이랑 달리 내게만 해줄 수 있는 특별한 건 뭐가 있죠?”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섹스보다 가장 황홀한 섹스를 하면 되지. 지금 당장.”


 소린의 말에 빌보가 웃으며 팔을 둘러온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혼이 쏙 빠질 정도의 섹스를 수십 번도 넘게 했는데, 오늘은 그보다 더 황홀한 밤을 보내게 해주겠다니. 과연 내일 빌보가 침대에서 허리를 펴고 일어날 수 나 있을 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인의 과거 행적에 질투를 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빌보는 이따금 이렇게 자신이 특별하다는 증언을 소린에게 요구하고는 했다. 격렬했던 정사를 마치고 자신의 품안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연인에게, 과연 어떠한 특별함을 선사할 수 있을지 소린은 밤새 고민을 했다.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상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빌보는 소린에게 특별했다. 빌보에 대한 애정, 특별함을 요구하는 빌보의 요구, 그리고 갑작스러웠던 동료의 죽음 등이 아마도 소린으로 하여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과감한 결정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린은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빌보에게 프러포즈를 건넸다.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실행한 적 없고, 시도할 생각조차 한 적 없었던 가장 특별한 결정이었다. 장소는 호텔 룸 침대 위였고, 두 사람은 갓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몰골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반지도, 예쁜 꽃도 없었지만, 빌보의 표정만큼은 그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보다도 더 행복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린도, 빌보도, 이아침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아침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적어도 빌보의 인생에서 그 아침은 가장 행복한 아침이었던 것이 맞기는 했다. 빌보는 그때의 프러포즈가 파혼으로 종결된 이후부터는, 아침에 깨어있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으니까. 그는 이제 가난한 지망생도 아니었고, 굳이 낮 시간을 이용해 공원에서 글을 써야할 이유도 없었다. 몇 번인가 아침에 깨어난 적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좋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아침도 마찬가지였지.

 모처럼 꺼내 입은 하늘색 체크무늬 남방을 조심성 없이 거칠게 벗어던지고, 소파위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초조한 듯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누군가 가짜로 사귀는 척을 해달라고 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판에, 이미 결혼한 척을 해 달라? 그것도 파혼했던 전 약혼자가? 그것도 결혼식 날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달아났던 파렴치한 개자식이? 얼음과 허브티세례를 퍼붓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빌보가 더 격렬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오만가지 문장으로 소린을 향한 저주를 퍼부었다. 씩씩거리며 앉아 있다 보니 속이 타,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자 화는 조금 가라앉았지만, 이번엔 서러움이 울컥 차올랐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빌보는 6년 동안 소린이 자신을 찾아오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왔다. 택배기사의 초인종소리나, 출판사 직원의 방문이나, 집을 착각한 이들의 노크소리에마저 빌보의 가슴은 기대와 설렘으로 두근거리곤 했었다. 소린이 찾아오면 화를 내서 쫓아내야지. 아니면 당신 따위는 잊은 지 오래라는 듯이 여유 있는 태도로 한껏 비웃어줘야지. 아니면 난 이미 결혼을 했으니, 당신이 돌아와도 있을 자리가 없다고 말해줘야지. 하지만 언제나 그 상상의 결말은 소린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빌보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지, 이런 식으로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말 정도는 할 것이지.”


 소파위에 웅크리고 쪼그려 앉아, 빌보는 기운 없이 고개를 무릎위에 묻었다. 자신이 그리워했던 것만큼, 소린은 빌보를 그리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때 왜 떠나야만했던 것일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였던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기소침해져 풀이 죽어있는 빌보의 휴대폰으로 메시지 한통이 도착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전에 스팸으로 등록했던 번호들을 전부 해제했더니 드디어 출판사에서 보낸 문자가 도달한 모양이었다. 빌보는 기운 없이 손을 뻗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낯익은 번호이긴 했으나, 해밀턴이나 다른 직원들의 번호는 아니었다. 어제 빌보의 휴대폰으로 걸려왔던 전화번호였다.

 

- Please.


 그 번호의 주인은 소린이었던 모양이다. 가타부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애원하는 말도 없이, 한 단어만 보내는 것이 여전히 소린다웠다. 그 번호를 다시 스팸번호로 등록하려던 빌보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혹시, 어쩌면. 이게 계기가 되어서 소린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생각이 빌보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맙소사. 그렇게 당하고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다니. 정말 구질구질하고 끈덕진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야. 빌보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심한 생각들을 떨쳐 내려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솔직한 그의 감정이 떨쳐지기는커녕, 요상한 변명과 궤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는 것이었다.

 어차피 6년간 떨어져 있으면서도 내버리지 못한 결혼에 대한 트라우마였으니, 차라리 문제를 만든 장본인을 만나서 치료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는 변명. 가짜이긴 하지만 소린과 결혼생활을 해보면, 그에 대한 오만정이 떨어져 다시는 미련을 품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궤변. 그리고 그 생각들은 묘하게 논리적인 것처럼 보여, 빌보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그래, 이건 미련이나 사랑이 아니야. 그저 치료의 일환일 뿐이라고. 빌보는 불쑥 머리를 이 괴상한 생각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설도 날린 마당에, 그냥 출판사에 정신적 충격을 이유삼아 휴가를 요청하고 소린과 함께 가짜 부부행세를 해보는 것도 작가로서 할 수 있는 희귀한 경험이 될지도. 핑계가 생기니, 그 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빌보는 휴대폰에 찍힌 소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소린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당신 여동생이 언제 방문한다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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