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런어웨이 피앙세(연재)

[소린빌보/연재] 런어웨이 피앙세 03

 

Runaway Fiance

 

3.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한껏 허세와 오만함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으나, 소린은 그것이 전부 빌보의 연기임을 알 수 있었다.

- 내일, 아까 그 카페에서 보도록 하지.

간단한 대답으로 빌보와의 두 번째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그 사이에 둘 사이에 별다른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일절 오가지 않았다. 빌보는 여전히 거짓말이 서툴렀다. 고작 3개월 동안 만난 사이치고는 소린이 빌보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은 상당히 많았다. 빌보가 자신의 속내를 감추거나 꾸미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던 탓도 있고, 소린이 그만큼 자신의 연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살피고 파악했던 탓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해도, 6년 동안 저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라니. 이걸 한결같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몇 시간 전 얼음과 허브티를 뒤집어써 흠뻑 젖었던 얼굴은 가을 햇빛에 금방 흔적도 없이 말라있었다. 그래도 혹시 얼룩이 생길지도 몰라, 재킷과 셔츠를 벗어 세탁기 안에 던져 넣자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거울너머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 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남자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소린은 빌보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비겁함. 소린을 아는 주변인들은 그 단어와 소린을 쉽사리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다. 회사에서 그가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은 언제나 정면 돌파였고, 상사나 바이어를 상대할 때도 비겁하게 굽실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소린 오큰쉴드였다. 흡사 어딘가의 왕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태도는 언제나 품위 넘치고 고고했다. 그러나 연애와 회사업무는 그 본질이 달랐다. 비단 연애뿐만이 아니라, 단순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는 언제나 한 발짝 물러선 태도를 고수했다. 모두가 번듯한 그의 외모와 진중한 말투, 예의와 기품을 잃지 않는 태도에 호감을 가졌으나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의 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린은 자신과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남자였으나, 그들이 자신이 그은 선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연애관계는 종종 상처받은 상대방의 이별선언으로 끝이 나고는 했는데, 단 한번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빌보 배긴스뿐이었다.

 빌보 외에도 소린의 마음의 벽을 허물만한 이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빌보와의 첫 만남을 가지던 그날 소린이 애도하던 죽음의 주인공, 루커스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눈치가 빨랐기에, 소린이 어떠한 상처 때문에 사람들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하려한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차피 그들은 직장동료였고, 서로 다른 성벽 탓에 이성적인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섣부르게 가까워질 필요가 없었다. 소린은 이정도로 신중한 친구라면, 서서히 시간을 두고 자신의 영역 안에 들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뒤늦게 그의 묘지를 다녀온 날, 빌보를 만났다.

 

 빌보는 굳이 따지면 루커스와는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소린이 그어놓은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남자가 빌보 배긴스였다. 물론, 빌보는 소린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빌보는 그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소린이 보이는 애정을 받아들이는 일에만 충실한 남자였고, 모질지 못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단점을 품고 있었다. 방문판매를 권하는 사람들에게도 홀랑 넘어가기 일쑤였고, 거지들도 쉬이 지나치지 못했다. 하긴, 검은 상복을 입고 우중충하게 앉아있는 무서운 남자에게도 자신 몫의 샌드위치를 나눠줄 정도의 오지랖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런 그가 다시 찾아온 소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을 거라는 것쯤은 소린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심 소린은 빌보가 변해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신의 이런 못된 부탁쯤은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었으면 했는데, 여전히 모질지 못하고, 여전히 미련이 가득한 그 모습이 소린의 죄책감을 강하게 자극했다.

 차라리 변한 모습을 보여줘서, 날 실망하게 했다면 좋았을걸. 아니면 결혼이라도 했다면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소린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세면대에 물이 가득 차 넘칠 지경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수도꼭지를 잠갔다. 소린 역시 그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미련을 정리하는 것조차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빌보가 정리해주기를 무의식중에 바라고 있었다니. 자신의 한심함에 그는 거울에 쿵-하고 머리를 박았다.

 

 

 빌보가 자주 가는 카페의 알바생은 아마도 지금 세상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어제 그 카페의 단골인 빌보가 덩치 큰 남자를 향해 얼음세례를 퍼붓는 진풍경을 보여주고 카페를 떠났었는데, 오늘은 그 장본인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시험공부라도 하듯이 페이퍼를 달달 외우고 있으니. 그녀는 빌보가 작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아마도 빌보가 새로운 담당자와 함께 일하게 된 것이리라 추리하고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업무에 열중했다. 빌보로 말하자면, 대학 졸업이후 이렇게까지 열심히 무언가를 외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종잇조각에 고개를 파묻고 연대기를 외우고 있었다. 그때와 다른 것은, 그가 외워야 하는 게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문학가들의 연대기가 아니라, 자신과 파혼한 이후 6년간 소린이 지냈던 행적에 대한 연대기라는 점이지만.


“그래서 5년 전 여름부터 4년 전 봄까지는 스페인에 머물렀군요.”

“정확히는 안달루시아였지.”

“그리고 그때 교통사고로 생긴 흉터가 오른쪽 어깨에 남아있고.”

“아니, 왼쪽.”

“가족관계는 남동생 프레린, 여동생 디스. 디스의 아들들은 필리가 10살, 힐리..”

“킬리.”

“그래요, 킬리. 킬리가 다섯 살.”


 연애할 때도 몰랐던 소린의 모든 것을, 갑자기 이렇게 주입식으로 외우고 있다니. 자기 꼴이 퍽이나 우스워, 빌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소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긴 했으나, 순순히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와 가짜 부부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거래조건으로 무언가를 받자니, 딱히 소린으로부터 받고 싶은 것도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돈은 이미 나름대로 부족함 없이 벌고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필요하지 않고. 지금 제일 간절한 건 사망한 노트북에 담겨있던 소설이지만, 그건 소린의 능력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빌보가 소린에게 얻어낸 것은 알리바이였다.

 

 어젯밤 빌보는 드디어 해밀턴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의 표정은 썩은 토마토처럼 새파랗게 질려 곧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빌보는 그런 해밀턴을 겨우 달래며, 지금 당장은 한번 날려버린 소설을 다시 쓸 자신이 없으니, 그건 잠시 묻어두고 새로운 글을 구상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건넸다. 해밀턴은 이미 혼란에 빠져, 어떻게 편집장에게 해명을 해야 할 지 벌써부터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어쨌든 빌보는 자신의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는데 취재가 필요하니, 두어 달 정도 시간을 달라고 말했고, 그 취재대상은 다름 아닌 무역회사. 그리고 그 알리바이를 만들어준 것이 소린이었다. 물론, 빌보는 소린의 업무나 신작구상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지만. 빌보에게 필요한 것은 결혼에 관한 PTSD를 치료하고 날려버린 노트북에 대한 애도를 표할 휴식시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소린의 집으로 들어가 가짜 부부행세를 하는 것은 절대 휴식이 될 리가 없다는 걸, 바로 오늘 아침에 실감하고 말았다. 소린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두툼한 페이퍼를 빌보의 앞에 건넸고, 빌보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소린을 올려다보았다. 뭐 계약서라도 쓰자는 건가? 물론, 그 페이퍼는 계약서가 아닌, 소린에 대한 인적사항이었고 빌보는 그 내용을 달달 외워야만했지. 그리고 매우 불공평하게도 소린이 외워야하는 빌보에 대한 인적사항은 작은 메모지 하나뿐이었다. 6년 전에 비해 빌보가 달라진 것은, 그의 이름으로 된 책이 두어 권 나왔다는 것. 그리고 예전처럼 아침부터 공원에 나가서 작업을 하는 대신에, 자신의 방 한편에서 노트북을 켜고 밤새 글을 쓴다는 점뿐이었다.

 

 다행히 글을 쓰는 것 말고도 암기에 관한 뇌세포가 아직은 쌩쌩하게 살아있었던 모양인지, 빌보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소린에 대한 모든 사항들을 숙지할 수 있었다. 과연 이렇게 정보를 암기하는 것으로 그의 여동생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플랫에서 자신의 짐 몇 가지들을 박스에 담아 소린의 차에 실으며, 빌보는 문득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지금 여동생의 몸이 안 좋아서, 그녀에게 충격적이거나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달해줄 수 없는 건 그럭저럭 이해하겠는데, 왜 파혼을 했을 당시 가족들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았던 거지? 자신의 비겁한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아니면, 다시 빌보와 합치려는 마음이 있기라도 했었던 건가?


 이런, 또 자기 좋을 대로 미련을 품다니. 빌보는 틈만 나면 엉뚱한 방향으로 사고를 확장시키는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익숙한 듯이 소린의 옆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고, 빌보는 6년 전과 다른 차안에서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낯선 거리를 지나, 낯선 집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지금부터 한 달 동안 빌보와 소린의 집이 될, 어쩌면 진짜로 빌보의 신혼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소린의 2층집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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