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단편

[소린빌보/단편] 잔소리




잔소리





 서로 함께 살게 된 지도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갔다. 3년 동안 늘 그래 왔듯이, 빌보는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일을 한다. 굳이 더 부지런한 쪽을 고르라면 소린이었지만, 그는 일주일째 몇 년 만에 얻은 귀중한 휴가를 즐기는 중이었다. 몇 년째 웹에 장편 SF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빌보는 프리랜서답지 않게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빌보의 모습은 조금 지루했다. 소린은 커피를 내리고 있는 빌보의 등 뒤로 다가가 불쑥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드랍고 통통한 빌보의 옆구리 살을 꼬집어본다. 빌보는 놀란 기색도 없이 커피잔을 하나 더 꺼내며 소린을 향해 물었다.


"커피 마실래요?"

"...됐네."


 소린은 조금 시들해져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긴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뉘었다.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빌보는 소린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서면 금세 얼굴을 붉히고는, 허둥대며 말을 돌렸다. 둘 곳 없는 눈알을 데루룩 굴리며 애써 소린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귀여워 온종일 그를 괴롭히는 것만으로 휴일을 다 보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잠자리에서 소린이 내뱉는 아저씨스러운 야한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맞받아치고, 소린을 똑바로 보며 잔소리를 내뱉고는 했다.


 그래, 잔소리.

 누가 글 쓰는 게 직업인 남자가 아니라고 할까 봐, 빌보의 잔소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30년 넘게 각자의 삶을 살아오던 두 남자가 한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에, 그들은 다른 신혼부부들만큼이나 사소한 일로 징하게도 다투곤 했다. 소린이 한번 왁 하고 화를 내고 금방 식는 타입이라면, 빌보는 은근한 잔소리를 길고 꾸준하게 내뱉는 타입이었다. 같은 남자인데도 사용하는 어휘나 단어의 폭이 어찌나 다른지, 빌보는 소린이 듣도 보도 못한 문장으로 그를 비난해왔다. 소린도 처음에는 빌보가 화를 내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지만, 잔소리의 끓는점은 점차 낮아져만 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빌보는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오래된 컵들을 보며 또다시 잔소리를 시작했다. 빌보는 소파보다는 자신의 방 책상이나 정원에 나가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티비와 소파가 있는 거실은 자연스레 소린의 공간이 되어있었는데, 소린은 컵을 개수대에 가져다 놓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보통의 남자였다. 수북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컵들을 집어서 개수대로 옮기는 것은 언제나 빌보의 몫이었다. 컵들을 깨끗하게 설거지하고 고이 선반에 올려두고, 내친김에 주방을 청소하는 동안 빌보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고 소린을 향해 잔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이건 좀 지루하군.'


 하지만 다투는 건 피곤하다. 잔소리도 잔소리지만, 사소한 다툼이라도 벌어져 이것저것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소린은 절대로 빌보를 이길 수 없었다. 몇 달 전 소린의 친지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을 때도 그랬다. 소린의 사소한 실수에, 빌보는 무심코 평소처럼 그를 향해 장황한 잔소리를 쏘아댔다. 그들의 놀란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게 펼쳐졌다. 그들이 가장 놀란 건, 빌보의 잔소리보다도 그것을 묵묵히 듣고 있는 소린의 모습이었겠지. 3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동안 소린은 빌보에게 많이도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러한 일상이 무척이나 지루하고 권태롭게 느껴졌다. 그래, 권태기인가.


"정말 성가시군."


 소린이 무심코 소리내어 뱉은 말에 빌보의 잔소리가 뚝 끊겼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빌보의 얼굴이 너무 새하얗게 질려있어, 소린 역시 당황하고야 말았다. 빌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테이블을 마저 닦았지만, 행주를 쥐고 있는 작은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소린의 실수였다. 소린은 얼른 그에게 해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미약하게 잔인한 마음이 솟았다.


 '뭐라고 변명할 텐가. 솔직히 그의 잔소리가 성가신 것은 사실이 아닌가.'


 소린은 이 기회에 뭔가 빌보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식의 작은 충격을 줘서라도 빌보의 지나친 잔소리가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묵묵히 테이블을 마저 닦고, 행주까지 깨끗하게 빨아서 널은 뒤 빌보는 더이상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고 자신이 읽던 책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소린은 역시 좀 지루하다고 생각하며, 리모컨을 집어 들어 티비를 틀었다. 별다를 것 없는 수요일 오후였다.




***


 다음날 소린은 느지막이 일어나 빌보를 찾았다. 여느 때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그의 모습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잠시 외출이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그날 저녁이 되도록 빌보가 돌아오질 않았다. 설마, 가출이라도 한 건가. 소파에 깊숙하게 몸을 묻고, 소린은 어제의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그다지 크게 싸운 것도 아니고, 심하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도 아니다. 즉 빌보가 가출을 하거나 화낼만한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곧 돌아오겠지. 빌보가 나간 지 아직 10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소린은 대수롭지 않게 소파에 진득하니 누워 이른 잠에 빠졌다.




 소린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차가운 빙판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빌보가 있었다. 별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3년 동안이나 자신의 곁에서 잠을 청하던 연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소린은 자신이 지금 꾸는 꿈속에서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소린은 빌보와 오랜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연인도 아니었고, 함께 한집에서 살지도 않았다. 그러나 원하는 것은 같았다. 꿈속에서의 소린은 앞으로 빌보와 함께 많은 일을 함께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빌보는 그의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소린은 그런 그의 모습을 편하게 바라보고. 지나치게 잦은 빌보의 식사회수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고, 그를 위해 소중한 보물을 선물하기도 하고. 하지만 소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빌보는 자신이 생각한 모든 일들을 혼자서 해야만 할 것이다. 혹 누군가 다른 소중한 이를 만나서 그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일구어나갈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소린은 아니었다. 왜냐면, 꿈속의 남자 곧 숨이 끊어져 영원히 잠들어야만 했으니까. 소린이 지금 지겹다고 느끼는 지루한 일상은, 그들에게는 간절함이요 절박함이었다.




쿵-

 소파에서 꼴사납게 굴러떨어지며, 소린은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머릿속에서 다급한 지령이 떨어졌다.


'당장 빌보를 찾으러 가야 한다.'


 이대로 빌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소린이 조금 전 꿈에서 느꼈던 안타까움은 고스란히 현실이 되어버릴 것이다. 자신은 지금껏 얼마나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었던 건지. 꿈까지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소린은 다급하게 외투를 꺼내 들며 3년 전 빌보에게 처음 자신의 마음을 전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고, 그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서 대뜸 고백도 하기 전에 같이 살 것을 권유하던 그 비 오던 날. 바보같이 3년 만에 그때의 감정을 모조리 잊고 있었다니. 비싼 구두가 구겨지도록 아무렇게나 발을 집어넣고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소린이 그 허둥거리는 꼴로 멀리까지 나갈 필요는 없었다. 빌보가 양손 가득 식료품이 들어있는 봉투를 들고 현관으로 걸어오고 있었으니.


"소린, 이 시간에 어디 가요?"

"자네야말로, 어딜 다녀온 거지?"

"머리를 자르러... 아, 나간 김에 서점도 들렀고 슈퍼마켓도 갔다 오느라 늦었어요."


 그러고 보니 언제나 목덜미를 살짝 덮고 있던 곱슬머리가 확연히 짧아져 있었다. 소린이 자신의 머리를 빤히 바라보자, 빌보가 묻지도 않은 말에 변명하듯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그게. 분위기 전환이 좀 하고 싶어서요. 혹시.. 권태기라도 와서, 당신이 지루해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허전해진 목덜미를 머쓱하니 긁적이며, 빌보가 고개를 떨구었다. 소린은 빌보의 손에 들린 슈퍼마켓 봉투를 무심하게 뺐어 들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빌보가 현관문을 닫으며 따라 들어오는 소리를 확인하고, 소린이 무심하게 내뱉었다.


"아무것도 바꿀 필요 없어. 자네는 그냥.. 지겨울 정도로 똑같이 평생 이곳에 있어 주게."


 별다른 사과의 말도, 따뜻한 애정표현도 아니었다. 그러나 소린의 말은 분명 빌보의 기분을 나아지게 만들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은, 3년째 그의 곁을 지켜온 빌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그저 그것으로 충분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적당히.




***



 열흘간의 휴가가 끝나고, 소린의 앞에는 또다시 지옥 같은 출근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린은 그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빌보에게 자신의 넥타이의 행방을 물었고, 빌보는 가만히 옷장의 깊숙한 곳에서 그의 남색 넥타이를 꺼냈다.


"소린,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제발 자기 물건들은 제자리에 좀 놓아요. 난 당신이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아다 주는 집요정이 아니잖아요. 아무 넥타이나 매고 갈 성격도 아니면서, 대체 왜 넥타이를 늘 아무렇게나 던져두는 거..."


 또다시 시작된 빌보의 잔소리에 소린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소린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빌보의 입을 다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따로 있음을. 빌보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그에게 진득하게 입 맞추며 소린이 말했다.


"알겠으니, 나머지는 저녁에 침대에서나 마저 듣도록 하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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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나귀님께 리퀘 받았던 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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