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그의 술버릇에 대하여
그의 술버릇에 대하여
About his drinking habits
달빛이 비치던 승전의 저녁. 에레보르에서는 떠들썩한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더이상 에레보르에는 용의 위협도, 오크와의 전쟁도 없었다. 그들은 마음껏 떠들고 먹고 마시며,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었다. 중간중간 인간이나 마법사가 있기는 했지만, 그 축제를 채우고 있는 대부분은 전부 난쟁이들이었다. 그리고 승리를 축하하는 난쟁이들 사이에 홀로 섞여 있던 작은 호빗의 머릿속에 문득 하나의 궁금증이 떠올랐다.
'소린도 술에 취할까?'
그동안 오크들의 추격을 피하며 험난한 여정을 떠나왔기에, 원정대의 일원들이 편한 마음으로 술에 취할만한 날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술을 마실만한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리븐델이나 베오른의 집에서 그들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약간의 음주를 즐길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난쟁이들이 술에 취했다고 할지라도 소린은 절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원정대의 리더였으며, 언제나 적의 습격이나 위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모든 전쟁은 끝났고, 그들의 오랜 적도 죽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에레보르의 새 왕이 술에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빌보는 연회장 한쪽에서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하는 필리와 킬리를 향해 다가가 물었다.
"혹시 당신들 삼촌이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빌보의 말에 킬리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기억을 더듬었다. 킬리의 기억 속에서는 도통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지, 그는 자신의 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난 기억이 나질 않는데, 혹시 형은 본 적 있어?"
"아니. 네가 못 봤다면 나도 못 봤겠지. 빌보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소린도 술버릇이 있나 궁금해서요."
빌보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두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나 아 빌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 아무래도 형제의 호기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들은 다시 자리로 가서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는 빌보를 쪼르르 따라와서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소린의 술버릇에 대한 화제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삼촌의 술버릇이 뭐일지 궁금한데? 한번 오늘 알아볼까?"
"하지만 킬리, 삼촌은 우리보다 먼저 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맞아. 삼촌의 주량이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필리와 킬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빌보의 마음속에 갑자기 묘한 호승심이 생겨났다. 샤이어에 있을 때 몇 번이고 마을의 호빗들과 주량대결을 했지만, 어느 호빗도 빌보를 이긴 적은 없었다. 난쟁이들의 주량이 얼마나 센지는 모르겠지만, 빌보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볼 만한 대결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쓰러져갔던 과거의 호빗친구들을 떠올리며 의기양양해진 빌보가 필리와 킬리를 번갈아 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좋아요. 오늘 당신들에게 소린의 취한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겠어요."
빌보는 겁도 없이 소린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으며 그에게 술을 권했다. 모두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작은 호빗에게로 쏠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을까? 삼촌의 주량이 만만치 않은데."
"맞아. 저번에 드왈린이 얘기했지. 둘이서 몇 통의 술을 비웠다고 했어."
아니나다를까. 몇 시간이 지나서 먼저 술에 취해버린 건 그 자신만만하던 호빗이었다. 소린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호빗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뜸 나타나 주량 대결을 하겠다고 하더니, 이렇게 손쉽게 나가떨어질 줄이야. 소린의 어이없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빌보는 자꾸만 헤실 거리면서 소린을 향해 웃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보처럼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자꾸만 해대는 호빗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지만, 소린은 애써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짐짓 엄숙한 표정을 유지했다.
"지긍.. 술에 취하지 않으려구 그러는 거죠? 대체 뭥.. 무슨 술버릇이 있길ㄹ.. 있길래. 굳이 치하.. 아니 취하지 않으려고 하능 거죠?"
"자네는 술에 취하면 웃음이 헤퍼지는 군 빌보 배긴스."
"맞아요. 그게 제 술브.. 술버릇이죠."
소린의 지적에 빌보는 다시금 헤실헤실 웃으며 테이블에 머리를 떨궜다. 빌보가 테이블에 머리를 찧지 않도록 소린이 잽싸게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받쳤다. 소린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런 소린의 속도 모르고 빌보는 여전히 바보같이 웃으며 손을 쭈욱 뻗어 소린의 볼을 잡아당겼다.
"당싱도 웃어봐요- 저번에 왜 이렇게.. 이렇게 날 보면서 웃었자나요. 이러케.. 이.. "
그리고 그런 빌보의 행동을 보던 난쟁이들이 전부 경악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뭐? 소린이 저렇게 웃었다고?"
"아니 그보다 좀도둑이 지금 너무 무례하게 굴고 있는 게 아닌가?"
"왕께서 이러다가 큰 호통을 치고 말 거예요."
소린의 귀에까지 그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자, 소린은 빌보의 손을 슬쩍 치우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는 빌보는 지나치게 취해있었다. 이번에는 소린의 수염을 잡아당길 기세로 빌보가 손을 뻗었다. 다행히 소린이 빌보의 손목을 잡아 세워 그 끔찍한 상황만은 막았지만, 슬슬 소린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몇 명 난쟁이들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난 아무래도 너무 많이 마신것 같아. 이만 들어가서 자야겠군."
"나도."
"나도 이만."
어느덧 홀에는 소린과 빌보, 만취해서 곯아떨어진 봄부르와 필리 킬리를 빼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빌보는 급기야 벌떡 일어나 소린의 무릎에 걸터앉아서 계속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한테 내가 불망.. 아니 불만이 참 많았는데. 이 기회에 다 말해야겠어요!"
킬리와 필리의 눈에 그런 빌보의 모습이 들어오자 지금까지 먹었던 술이 전부 사라질 만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마시던 술잔을 내팽개치고 잽싸게 달려와 빌보를 소린의 무릎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정신 차려 보긴스!"
"사..삼촌. 빌보가 술에 많이 취해서 이러는 거니까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허둥지둥 당황하며 빌보를 끌어내리려는 킬리와 필리를 소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는 자신의 무릎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적대는 빌보를 가뿐히 둘러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킬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삼촌을 바라보았다.
"삼촌?"
"좀도둑이 과하게 취한 것 같으니 내가 침실로 데려다 놓도록 하지."
"아, 저희가 도울게요. 삼촌."
소린은 빌보를 향해 뻗는 킬리와 필리의 손을 무시하고, 무뚝뚝하게 턱짓으로 테이블 저편에 곯아떨어져 있는 봄부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는 봄부르를 침실로 옮기는 게 좋겠다."
읔-
삼촌의 명령에 필리와 킬리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소린이 가볍게 빌보를 둘러업고 사라지자 필리와 킬리가 투덜거리며 코를 골고 있는 봄부르를 향해 다가갔다. 킬리가 끙끙거리며 봄부르의 한쪽 팔을 어깨에 둘러멨다. 봄부르를 침실까지 옮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마찬가지로 낑낑거리며 봄부르의 다른 한쪽 팔을 들던 필리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며 킬리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삼촌도 좀 취하신 거 같지 않아? 얼굴이 빨갛던데."
"어? 그러게."
"불쌍한 빌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삼촌의 술버릇을 볼 기회였는데, 먼저 나가떨어지고 말았군."
필리와 킬리의 동정을 한몸에 받고 있던 호빗, 빌보 배긴스는 짐짝처럼 들쳐 업혀 이동하는 동안에도 계속 소린을 향해 투덜투덜 불만사항을 털어놓았다. 사람은 가끔 망가질 때도 있어야 한다느니, 소린 당신은 너무 근엄한 척을 한다느니. 가끔 술에 취해서 주정도 부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주변 사람에게 의지하기도 해야 한다느니. 소린은 빌보가 소리를 지르거나 울먹이거나 웃거나 하는 일 따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묵묵히 그를 침실까지 옮기는 임무에 충실했다. 그리고 마침내 빌보의 침대 위로 만취한 호빗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동안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내 술버릇에 대해서는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남 앞에서 별로 취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라네. 빌보."
빌보는 자신의 체격보다 묘하게 크고 넉넉하게 제작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소린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그게 뭔데요?"
소린은 허리를 숙여 지긋이 빌보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계속 실없이 헤실 거리던 빌보가 자신을 뚫어지라 보는 소린의 시선에 민망해졌는지, 웃음을 거두고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소린은 천천히 크고 두꺼운 손을 뻗어 빌보의 뺨을 잡아 자신을 보도록 돌려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입술을 겹쳤다. 이런 키스가 처음은 아니었는지, 빌보는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아 응수했다. 술을 너무 마셔서 입안에서 알코올 냄새가 진동할 것 같다든지, 키스할 때마다 턱에 닿는 수염이 까끌거린다던지하는 잡생각들이 잠시 빌보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소린이 두 번째 키스를 시작하자 전부 뇌리에서 사라졌다. 부드럽게 맞닿았던 두 번째 키스가 끝나자, 빌보는 불현듯 까르르 웃으며 소린을 향해 허탈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이게 술버릇이에요? 이런 건 감출 필요가 없잖아요. 아니다, 남들 앞에서 보이긴 좀 그런가."
그리고 웃으며 조잘대는 빌보를 향해 소린이 다시 한 번 짧게 입 맞췄다. 몇 번이나 키스할 셈이냐고 머릿속으로 투덜거리던 빌보는 그제야 소린의 술버릇의 실체에 대해 깨달았다. 끊임없이 키스하는 것이 그의 술버릇이구나 싶어, 빌보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궁금했던 소린의 술버릇을 완벽하게 알아낸 자신이 뿌듯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언제부터 취해있던 거예요? 지금 술주정하는 중 맞죠?"
"그러네."
소린은 슬쩍 빌보가 앉아있는 침대에 손을 얹고 빌보를 향해 다시 한 번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빌보는 약간 당황한 듯 뒤로 손을 집으며 물러섰다. 굳이 자신을 침대 위에 앉혀놨을 때가 돼서야 술버릇이 발동됐다는 점이 왠지 미심쩍었지만, 어쨌든 소린도 빌보만큼 많은 술을 마신 건 틀림이 없었으니. 빌보는 손바닥으로 소린의 입을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둘 다 취했으니 이제 오늘은 이만 잠드는 게 어때요? 내일 후회할 짓은 하지 말고."
"후회할 짓? 어떤?"
소린이 점점 다가오며 묻자, 빌보는 아까보다 더 당황하며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침대가 미묘하게 큰 치수인 것도 수상했다. 에레보르에 머무는 동안 빌보가 편히 쉬길 바란다며, 자신 전용으로 소린이 친히 준비해준 침대인데 왜 이렇게 큰 거지? 그리고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정도로 빌보가 침대 머리맡까지 가자, 소린이 또 한 번 빌보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이제까지의 키스와 달리 진득하고 깊숙하게 소린이 파고들자, 빌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으응하는 신음이 새 나왔다. 힘이 풀려 쓰러질 것 같은 빌보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받치며, 소린은 멈추지 않고 열렬하게 키스 세례를 퍼부었고, 빌보는 서서히 자신의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다짐했다.
앞으로는 함부로 이 남자를 취하게 말지 말아야겠다고.
다음날 나란히 늦잠이라도 자는지, 둘은 아침식사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발린이 혀를 쯧쯧 차며, 어제 다들 너무 지나치게 과음을 했다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필리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발린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발린은 알고 있겠네요? 소린 삼촌의 술버릇을 본 적이 있나요?"
"오 물론이지. 예전에 몇 번 그가 취한 것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별로 재밌는 술버릇은 아니네."
킬리와 필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발린을 향해 기대에 가득 차 물었다.
"뭔데요?"
"그냥 그 자리에서 기절하듯이 잠이 드는 거네."
얼굴에 가득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필리와 킬리가 시무룩해 되물었다.
"그게 다예요?"
그리고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그들에게 확신 어린 말투로 말했다.
"맹세코 그게 전부라네. 다른 술버릇은 없지."
<Fin>
*지나친 음주는 몸에 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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