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BLIND
BLIND
소린빌보/조각글
'쉿, 이제 잠들 시간이야.'
어두운 방안에 오로지 달빛만이 아스라이 비추고 있었다. 그마저도 역광이라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남자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쉿 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이 주문에 홀린 듯이, 빌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도둑일지도 몰라, 소리를 질러야 해. 하지만 이성이 외치는 것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소리 지르고 싶지 않다고 할까. 왜인지 모를 남자의 체취가 빌보의 코끝에 맴돌아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말대로 입을 다물고 있는 어린아이를 칭찬하며, 아이의 쓰다듬던 손으로 아이의 눈을 감겼다.
'이제부터 절대 눈을 뜨면 안 돼.'
빌보는 그의 말대로 착하게 눈을 감고, 다시는 뜨지 않았다.
형사들은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소년이 맹인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소년에게서 살인자의 단서를 찾으려 했지만, 소년은 눈을 뜨지도, 도움이 될만한 증언을 하지도 않았다. 혹 소년이 살인자를 돕거나 숨겨주는 것은 아닐까, 거짓으로 눈을 뜨지 못하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많은 의구심이 쏟아졌다. 빌보는 그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진술했다. 자신은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하는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물라고 하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며, 그가 눈을 뜨지 말라고 하니 그 순간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온갖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소년의 말이 거짓임을 밝혀내려 달려들었다. 형사도, 아이의 선생님도, 법의학자도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소년과 대화를 했던 정신과 카운셀러가 진단을 내렸다.
'이건 암시에요. 일종의 최면이죠. 어떤 연유로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암시를 걸었던 장본인이 아니면 누구도 풀 수 없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빌보 역시, 그의 목소리가 아니면 자신은 다시 눈을 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를 평생 만나지 못한다면, 자신은 죽을 때까지 눈 감은 채로 살아가야만 하겠지. 하지만 카운셀러도, 형사도 밝혀내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소년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가 소년의 계부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빌보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를 죽였을 테니까.
소년의 계부는 쓰레기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최악의 남자였다. 소년의 어머니는 그의 손에 죽었다. 그 외에도 그가 죽인 여자들의 목숨이 몇이었는지. 아마도 빌보덕분에 받는 지원금이 아니었다면, 소년도 일찌감치 그의 손에 맞아서 죽은 지 오래였겠지. 물론 죽지만 않았을 뿐, 계부와 살던 시절 소년의 하루하루는 지옥에서 숨을 쉬는 것과 같이 가쁘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살인자가 무슨 이유로 빌보의 계부를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빌보는 그날 달빛이 비치던 자신의 다락방 안에서 그를 만난 날이 자신의 구원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의 계부는 너무도 많은 원한관계로 얽혀있어, 용의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유일한 목격자인 소년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단서도 없었고, 범인이 너무도 치밀하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에 그렇게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소년은 그렇게 눈을 뜨지 못하고 청년이 되었다. 처음 5년 정도는 꾸준히 심리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아 서서히 치료를 받는 간격이 길어졌고,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나자 아예 카운셀러를 찾아가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비록 여전히 맹인이었지만, 빌보는 스스로 제 몫을 하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에게는 글을 쓰는 재주가 있었고, 그를 돕는 뛰어난 대리인이 있었다. 그 덕에 빌보는 자신이 혼자 먹고 살만한 충분한 인세를 받을 수 있었다. 빌보는 가끔 혼자서 그가 잘 알고 있는 집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가 주로 산책을 하는 시간은 공기가 맑고 인적이 드문 오전이었으나, 가끔은 사람들이 많은 늦은 오후에도 산책하러 나가고는 했다. 광장 한가운데 놓인 벤치에 홀로 앉아 있노라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은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온갖 소리가 뒤섞여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도 모를 정도의 감각은, 오히려 빌보를 편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빌보, 그에게는 한가지 비밀이 있었다.
형사에게도, 판사에게도, 의사에게도 말하지 않은 커다란 비밀.
빌보는 그 범인의 목소리를 그날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열한 살의 늦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광장에서. 빌보의 엄마가 아이를 버리려고 시도했던 그 날. 홀로 이렇게 온갖 소음 속에 뒤섞여 있을 때,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체취와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했다. 이 비밀을 털어놓았다면, 아마도 경찰이 범인을 잡는 일은 훨씬 수월했으리. 하지만 빌보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많은 인파 사이에 눈을 감고 앉아있다 할지라도, 빌보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찾아낼 수 있다. 그를 알아볼 수 있다.
"놀라운 일이죠. 안 그래요?"
빌보는 자신의 옆에 잠시 앉아 쉬고 있는 낯선 이를 향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아니, 낯선 이라는 표현은 수정하는 게 좋겠군. 그는 빌보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 15년 전 그 체취를 가진 사나이니까 말이야.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반응이군."
"그래요. 왜인지 당신이 다시 한 번 날 찾아올 것만 같았거든요. 15년 전 그때처럼."
빌보는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마치 남자가 웃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서서히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 빛의 공원. 주위를 감싼 수많은 목소리와 수많은 체취. 그 가운데서 확연히 구분되는 그의 향기가 빌보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숨결이 빌보의 귓가에 와 닿고,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빌보에게 속삭였다.
"그래, 이제 눈을 뜰 시간이야. 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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