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몽유병
몽유병
소린빌보/조각글
빌보 배긴스에게는 고약한 잠버릇이 하나 있었다.
처음 그 잠버릇을 발견한 것은 킬리였다. 언제나처럼 모닥불 주변에 각자 자리를 잡고 곯아떨어졌던 그 날 밤, 킬리는 빌보가 자신의 침대를 찾아서 서성이는 것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연약하고 바보 같은 호빗. 킬리는 모험 중에는 누구도 침대에서 잠들 수 없다며 빌보를 향해 웃음기 어린 훈계를 했지만, 곧 그 훈계가 쓸데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빌보는 눈을 감고 잠이 들어있는 상태였으니까. 샤이어에서 데려온 좀도둑 호빗에게는 몽유병이 있었다. 빌보의 몽유병은 곧 모든 난쟁이들에게 발각되었고, 혹시 호빗이 잠결에 위험한 곳을 서성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보초를 서는 난쟁이는 밤새 오크뿐만 아니라 호빗까지 감시해야 하는 처지가 돼버리고 말았다.그리고 깊은 숲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던 어느 날. 그날의 보초는 봄부르였고, 봄부르는 저녁을 너무 푸짐하게 먹은 탓에 자신도 모르게 깜빡 졸아버리고 말았다. 불행히도 그날 빌보의 몽유병이 여지없이 발동되었고, 빌보는 백엔드에서의 푹신한 침대를 떠올리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물론 세상모르고 졸고 있는 보푸르는 빌보가 서서 돌아다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건 소린 오큰쉴드였다.
원정대의 리더로서 그는 언제나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습관이 있었다. 혹시 오크나 와르그일까 싶어서 벌떡 몸을 일으켰던 소린은 움직이는 것의 정체가 빌보라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빌보 때문에 잠을 깼던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소린은 속으로 간달프를 향한 불평을 삼켰다. 기왕 좀도둑을 소개해줄 거라면 몽유병이 없는 호빗으로 소개해줄 것이지. 소린은 자신의 근처까지 서성이며 다가온 호빗의 바짓자락을 잡아 세웠다. 빌보를 깨워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끔 명령할 셈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린은 그답지 않게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뻔했다.
푹신한 침대를 찾던 빌보가 소린의 품 안으로 겁도 없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소린이 두르고 있는 모피의 감촉이 백엔드에 있는 그의 침대를 연상시키기라도 했던 것일까. 빌보는 이제야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더욱더 소린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소린의 당혹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드워프 왕자는, 혹여 이런 꼴을 다른 난쟁이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운 표정으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모두 깊게 잠이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소린은 뻔뻔하게도 자신의 팔을 베개 삼아 자고 있는 조그마한 호빗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호빗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라, 조금 신기한 것도 사실이었다. 뾰족한 귀와 보드라운 피부가 드워프와는 확연히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린은 자신의 품 안에서 곤히 잠든 작고 따뜻한 생명체를 어느 순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상한 호빗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복수나 애환 따위는 다른 세상의 일인마냥 잊어버리게 되는 것도 같았다. 소린은 자신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는 것을 깨달았다. 어서 빌보를 깨워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린은 자꾸만 아늑하고 편안해지는 기분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침에 다른 난쟁이들이 이 모습을 보면 분명 비웃을텐데..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빌보의 온기는 샤이어의 그것처럼 따듯하고 온화했다.
다른 난쟁이들이 소린과 빌보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전에, 빌보가 가장 먼저 잠에서 깼다. 빌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이 밤새 베고 잠들어있던 이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빌보는 허둥지둥 소린의 품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누웠다. 하지만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숨기지 못하고, 패닉에 빠져 머리를 팽팽 돌려 기억을 더듬었다. 또 몽유병이었군. 미쳤어 빌보 배긴스. 소린이 자기를 뭐라고 생각할까. 다른 난쟁이들이 하나씩 깨어나고, 그 다음 날의 일정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빌보는 패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소린은 빌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이따금 마주치는 눈빛에 빌보는 제풀에 찔려 죽을것만 같았다.
다음날 밤이 되자, 빌보는 최대한 소린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도 소린의 품으로 파고든다면, 빌보는 수치심에 스스로 목이라도 매고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예 손발을 꽁꽁 묶어놓고 자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그리고 빌보가 소린에게서 가장 먼 구석에서 잠을 청하려고 할 때, 멀리서 소린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도둑은 앞으로 내 옆에서 잔다."
"네? 왜.. 왜죠? "
빌보가 당황스러워하며 반문했지만, 결국 소린의 단호한 표정에 쫄아 우물쭈물 그의 옆으로 잠자리를 옮기고야 말았다. 빌보가 주섬주섬 자신의 옆에 자리를 펴고 눕자 소린은 만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누우며 빌보를 향해 말했다.
"자꾸 밤에 돌아다니니, 내가 감시하는 수밖에."
물론 그 감시의 의미는 오크에게 들킬까 봐서가 아니라, 빌보가 혹여 다른 난쟁이를 침대로 삼을까 걱정이 되서였지만.
그것은 아직은 소린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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