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단편

[킬리필리] 비밀은 어디에나



비밀은 어디에나

The secret is everywhere




 원정대에 합류하고, 드워프들과 모험을 떠나는 내내 빌보에게는 한 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그러나 빌보 외에는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날 밤도 모닥불을 피우고, 난쟁이들이 하나씩 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빌보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모두의 앞에서 소린에게 물었다.


" 저기, 예전부터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있는데요."

" 뭐지, 좀도둑?"

" 왜 필리와 킬리는 늘 같이 자는 거죠? "


 빌보의 말에 필리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모포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소린을 비롯한 다른 난쟁이들은 별것도 아닌 것을 궁금해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빌보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리고 필리가 떨어뜨린 모포를 주워 다시 자리에 잘 펼치며, 킬리가 빌보에게 말했다.


"그거야 필리가 내 형이고, 내가 필리의 동생이니까."

"호빗들도 형제와 사이좋은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곳에서 함께 잠을 자지는 않아요. 당신들 둘이 눕기에는 그 모포는 너무 비좁잖아요?"


 빌보의 말에 난쟁이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필리와 킬리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킬리가 필리를 얼마나 잘 따르는지, 킬리가 어릴 때 혼자 잠드는 걸 얼마나 무서워했는지에 대해 시끄럽게 저마다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킬리마저 보긴스가 참 쓸데없는 일을 궁금해한다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정작 필리의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창백하게 질려있는 필리와 빌보의 눈이 마주쳤다. 필리는 빌보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재빨리 자리에 누워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소린이 모두에게 조용히 하고, 얼른 잠자리에 들라고 소리쳤다. 빌보는 머리를 몇 번 긁적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 잠을 청했다. 킬리 역시 평소대로 제 형의 옆에 찰싹 붙어 곧 잠이 들었다. 고단한 여정 때문에 모두가 금방 잠이 들어서, 금세 코를 고는 소리와 색색이는 숨소리가 근방에 가득했다. 그러나 필리만은 잠들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모포 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 들켰다. 들켜버렸어.'


 필리는 자신의 표정을 보고 놀라던 빌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눈치 빠른 호빗이니, 아마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필리는 모두에게 말하지 못할 큰 비밀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제 동생을 형제애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필리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된다. 모두에게는 그저 우애 좋은 형제로만 보여야 하고, 자신의 마음을 무덤까지 몰래 가져가야만 한다. 킬리를 보는 매 순간 죄책감과 배덕 감에 괴로웠지만, 곧 필리는 능숙하게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 누구도 킬리를 향한 필리의 애정을 형제애가 아닌 다른 것으로 의심하는 이는 없었고, 그 덕분에 필리는 마음 놓고 킬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순수한 외부인의 시선이 더 예리할 때도 있는 법. 


 다음날 한숨도 자지 못한 필리가 식사 거리를 준비하러 나섰을 때, 빌보가 조용히 그에게 다가왔다.


" 필리, 음…. 있잖아요. 어제 내가 좀 실수를 한 것 같아서요. 난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했던 말인데. 혹시…. 그게 당신이 뭔가 숨기고 있던 부분을 들춰냈던 건가요?"


 필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대로 빌보는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필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빌보가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며 필리를 향해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 미안해요, 난 정말 몰랐어요. 그냥 보통 형제라고 해도 그렇게 친밀하지는 않으니까. 이런…. 그럼 킬리도 당신과 같은 마음인 건가요? 그렇다면 그에게도 사과를.. "

" 빌보! 안돼! 절대 그러지 마! "


빌보가 킬리에게 당장에라도 사과를 건네려는 기세로 돌아서자, 필리가 다급하게 빌보를 불러세웠다.


" 킬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제발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줘."


 필리의 말에 빌보의 표정이 안타깝게 변했다. 다행히 빌보는 필리에게 절대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주었다. 필리는 며칠 동안은 빌보를 믿지 못해 여행하는 내내 그를 시선으로 쫓으며 불안해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으며 그가 약속을 잘 지키고 의리있는 호빗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필리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필리는 아예 이따금 빌보에게 자신이 겪어온 마음고생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킬리가 뭔가 그를 기쁘게 한 날이면, 몰래 빌보를 찾아가 킬리에 대한 칭찬과 애정을 쏟아놓기도 했다.




 킬리는 요즘 자신의 형을 빌보에게 뺏긴 것만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언제나 필리의 옆자리에서 이동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는데, 가끔 빌보가 자연스럽게 필리의 옆에서 걷는 것이 불만이었다. 게다가 그 둘은 자신만 빼놓고 무언가를 속닥거리기도 했는데, 킬리가 궁금해하며 다가가면 하고 있던 이야기를 뚝 멈춰버리는 것이었다. 킬리는 빌보가 괘씸했다. 그래서 그가 걷고 있을 때 일부러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기도 했고, 그의 식사에만 소금을 잔뜩 치는 등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소린 삼촌이 그런 킬리를 쥐어박으며,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혼을 냈지만 그런데도 킬리의 심통은 멈추지 않았다. 킬리는 아예 필리의 곁에 더 찰싹 붙어서 빌보를 견제하기로 했다. 휴식시간 동안에는 필리의 팔짱을 끼거나,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빌보를 노려보았다. 필리가 어디를 가든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으며, 예전보다 더 자주 그를 향해 말을 걸고, 칭찬하고, 웃음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필리는 곤란한 듯이 웃었지만, 킬리를 떼어놓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킬리를 으쓱하게 하였다.


'어떠냐 보긴스. 필리는 내 형이야, 호빗의 형제가 아니라고.'


 다른 드워프들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형을 좋아하는 킬리가 귀엽다고 놀려댔다. 괴로운 건 필리 뿐이었다. 킬리가 빌보를 질투해서 자신에게 더 친밀하게 구는 것은 기뻤지만, 킬리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은 근본부터 아주 다르기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런 필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킬리는 그날 밤도 평소처럼 필리의 옆에 바짝 다가와 누웠다.


" 킬리, 오늘은 좀 떨어져서 자는 게 어떨까?"

" 뭐? 왜? 싫어!"

" 빌보도 말했지만, 다 큰 형제가 같이 자는 건 역시 좀.."


빌보의 이름이 필리의 입에서 나오자, 킬리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필리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킬리의 기분은 이미 상해버린 듯했다. 킬리는 굳은 표정으로 필리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 킬리.. 킬리? "


필리가 곤란해 하며 킬리의 이름을 불렀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필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행동을 살짝 반성했다. 요즘따라 자신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킬리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일부러 좀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이 도리어 그에게 상처를 준 모양이었다. 필리가 미안한 목소리로 몇 번인가 킬리의 이름을 더 부르자, 킬리가 홱 하고 필 리 쪽으로 돌아누우며 그동안 서운했던 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 도대체 나만 빼고 보긴스와 무슨 얘기를 속닥거리는 거야? 나한테 숨길 일이 뭐가 있다고. 그리고 왜 아침 식사 당번 차례를 바꾼 거야? 그것도 보긴스랑 같이 있으려고 그런 거지? "

" 미안해 킬리. 근데 정말 별 얘기 아니었어. 널 따돌리려는 것도 아니었고."

" 형은 내 형이잖아. 그럼 나를 가장 좋아해야지. 나도 형을 가장 좋아하는데!"


 킬리의 말에 필리의 마음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킬리의 애정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필리는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달래며 가만히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을 끌어안았다.


" 나도 잘 알고 있어. 나도 너를 좋아해. 세상 누구보다도."

" 그럼 보긴스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



킬리가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서, 필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자신의 비밀이 킬리를 서운하게 한다면, 누구와 비밀을 공유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비록 혼자 끙끙 앓다가 속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킬리를 상처 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필리는 킬리의 이마에 입 맞추며 그를 향해 속삭였다.


" 알겠으니까, 오늘은 이만 얌전히 자."

" 응.."


" 굿나잇 킬리."

" 굿나잇 필리."




 하지만 그날 정작 새벽이 되도록 잠이 들지 못한 건 킬리였다. 킬리는 왜 갑자기 필리를 보면서 자신의 가슴이 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든 필리의 얼굴을 밤새 들여다보며 킬리는 혼란에 휩싸였고, 자신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피어났음을 깨달았다.



 그날, 킬리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한가지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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