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Finding Bride
Finding Bride
소린빌보/단편
"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어 "
어느 평범한 저녁 만찬 자리에서 새로운 산밑의 드워프 왕이 선언했다. 방금까지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며 식사를 즐기던 난쟁이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유일하게 난쟁이가 아닌 호빗, 빌보 역시 수프에 스푼을 담가둔 채고 얼이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산밑의 왕, 참나무 방패 소린은 예상치 못한 난쟁이들의 반응을 보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지 조용히 곱씹어보았다.
" 내가 왕비를 맞이하겠다는데 뭔가 문제라도? "
식당에 모여있던 난쟁이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왕에게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직접적인 의사 표현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옆자리의 난쟁이와 소곤거리며 어쩐지 빌보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는 것이었다. 소린이 갈가마귀 언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오크들과의 전투로부터 에레보르를 지켜낸 지도 벌써 2년. 확실히, 그들의 왕은 지금쯤 왕비를 맞을 시기이기는 했다. 킬리가 용감하게 자신의 삼촌을 향해 물었다.
" 누구를 왕비로 맞이할 건가요 삼촌? "
" 글쎄. 딱히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
소린의 대답에 난쟁이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거세졌다. 그리고 더욱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빌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배려심들은 많아서.'
빌보는 아직까지도 버섯 수프에 담가져 있던 작은 스푼을 건져내며, 소린을 향해 애써 웃는 얼굴로 물었다.
" 산밑 왕의 신부라면 역시 훌륭한 드워프의 여인이어야겠군요."
" 종족은 별로 상관하지 않네. 단지 훌륭한 성품을 가졌으면 좋겠군."
" 음.. 드워프 종족의 여인이 아니라면 후계자를 볼 수 없을 텐데요? "
" 후계자는 이미 필리로 정해져 있으니 상관없다네 골목쟁이 양반."
소린은 멈추고 있던 자신의 포크를 움직여 알맞게 익은 고기를 접시에 덜어내며 대답했다. 킬리가 어째서인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빌보와 소린을 번갈아 보며 노려보았다.
" 성품 이외에 다른 조건은 뭐가 있나요. 소린."
" 종족은 상관없지만, 일단 키는 나보다 작았으면 좋겠군. 함께 섰을 때 나의 위엄을 깎아내리지 않도록."
키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봄부르가 마시고 있던 포도주를 푸왑하고 내뿜었다. 그 바람에 보푸르의 모자에 붉은 포도주 물이 들었지만, 보푸르는 그것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그럼 엘프나 일부 인간은 어차피 탈락 아냐? "
" 바보 같긴. 엘프는 어차피 탈락이야. 어디 엘프 따위를 드워프 왕비로…. "
글로인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보푸르를 비웃었다. 엘프에 대한 비난과 인간 중에 소린보다 키가 작은 성인 여자가 몇 명이나 될 것인지에 대한 토론으로 난쟁이들이 시끄럽게 토론하는 와중에도, 소린은 계속해서 자신이 바라는 신부의 조건에 대해 말했다.
" 기왕이면 유쾌하고 유머감각이 있었으면 좋겠군. 나와 성격이 반대여야 서로 지내기 편할 테니."
어딘지 불편한 표정으로 빵을 뜯던 필리가 갑자기 목에 빵부스러기라도 걸린 것처럼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침을 하느라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인 상태로 빌보를 쳐다보았다.
" 그리고 욕심이 없어야 해. 에레보르의 황금을 노리고 나와 결혼하려 해서는 안될 테니. 그리고 요리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면 좋겠군."
소린이 왕비의 조건에 관해 이야기 할수록, 난쟁이들의 시선이 점차 한곳으로 모였다. 소린이 말하고 있는 조건에 딱 들어맞는 이가 마침 소린의 곁에서 오물오물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깨달은 빌보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삼켰다. 다른 난쟁이들이 빌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소린 역시 느꼈는지, 그 역시 빌보를 바라보며 물었다.
" 빌보, 혹시 내가 말한 조건에 알맞은 이를 알고 있나? "
" 음…. 제 생각에는…. "
빌보가 입을 열자, 난쟁이들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의 대답을 기대했다.
" 호빗이 좋겠네요. 그들은 선천적으로 욕심이 없고, 유쾌하며, 무엇보다…. 드워프보다 키가 작으니까요."
난쟁이들은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기라도 하듯, 이제는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리지 않게끔 긴장하며 빌보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 좋아요. 제가 샤이어로 가서 호빗 중에 소린의 신붓감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할게요."
" 보긴스!! "
빌보의 말이 끝나자마자 킬리가 빌보의 성을 - 비록 틀렸지만- 외치며 속이 터진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쳤다. 다른 난쟁이들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던지, 이곳저곳에서 탄식을 내뱉으며 각자 자신의 앞에 놓은 포도주며 물잔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소린은 빌보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호빗을 향해 신뢰가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 역시, 자네는 내게 언제나 충실한 우정을 주는 군."
"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일은 당연하죠. 그리 대단한 수고도 아니에요. 그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바로 출발할까요? 하루라도 빨리 당신에게 걸맞은 신부 후보를 찾아주고 싶거든요."
" 그렇게 빨리? "
소린이 잠시 놀란 듯 고민에 빠졌으나,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빌보의 결정에 대해 허락을 내렸다. 빌보는 소린을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다시금 자신의 앞에 놓인 양송이 수프를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나 좀 전까지는 그렇게 맛있었던 수프의 맛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떨떠름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수프를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기며, 빌보는 이 모든 씁쓸한 기분은 단지 수프가 식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위안했다.
식사를 마치고, 빌보가 자신의 방에서 여장을 꾸리는 동안 필리와 킬리가 그를 찾아왔다. 필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킬리는 다짜고짜 화를 내며 빌보의 팔을 거칠게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 보긴스! 대체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네가 왜 삼촌의 신붓감을 찾으러 샤이어까지 가야 하는 거지? 그냥 가지마! 결혼을 하고 싶다면 삼촌이 직접 신부를 찾아오라고 해! "
" 킬리, 그러다가 빌보의 팔이 빠지겠어."
다행히 가엾은 호빗의 팔이 뽑히기 전에, 필리가 자신의 동생을 말렸다. 하지만 필리 역시, 빌보의 행동을 말리고 싶은 마음은 동생과 같았다.
" 빌보, 참나무 방패 원정대의 일원으로써 네가 해야 하는 일들은 2년 전에 전부 끝이 났어. 더는 삼촌을 위해서 뭔가를 가져오거나, 훔쳐오지 않아도 된다고. 넌 이제 좀도둑이 아니잖아."
" 난 어떤 의무감으로 이러는게 아니에요. 그저 소린에게 순수한 우정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에요. "
빌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킬리가 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우정은 무슨!! "
'섬세하지 못한 난쟁이들 같으니.'
빌보는 차마 밖으로 하지 못할 불평을 속으로 되뇌었다. 필리의 말대로 2년 전 아르켄스톤을 훔치는 것으로 참나무 원정대로서의 빌보의 모든 여정은 끝이 났었다. 빌보에게는 그저 그의 몫의 보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일만 남아있었는데,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샤이어가 아닌 에레보르에 머물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것도 2년이나. 원정대의 모든 난쟁이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조그와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소린을 붙들고 빌보가 울며불며 사랑 고백을 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그때 소린이 조금만 덜 위독했더라면. 아니면 빌보가 조금만 이성이 남아있었다면, 난쟁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런 공개적인 고백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오직 일주일 동안이나 사경을 헤매던 소린만이 몰랐다. 당시 빌보가 얼마나 미친 사람처럼 소린을 붙잡고 그가 살아나기를 기원하며 눈물을 흘렸는지를. 그런 호빗의 모습을 본 난쟁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외사랑이 성공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필리와 킬리 역시 소린의 근처 병상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까닭에, 지금 이 작디작은 호빗의 마음이 어떨지 영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 정말 괜찮겠어? 차라리 삼촌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 어때? 그러면 굳이 네가 삼촌의 신붓감을 찾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
" 그건 말도 안 돼요. 나만큼 소린에게 딱 맞는 아내를 찾아낼 수 있는 호빗은 어디에도 없을걸요. 난 정말 소린이 좋은 신부를 맞이하길 바라고 있어요. 부디 내가 그를 위해 좋은 짝을 찾아낼 수 있게 해줘요."
빌보의 간곡한 부탁에, 킬리가 마지못해 잡고 있던 호빗의 작은 팔을 놓아주었다. 빌보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상냥한 젊은 드워프 왕자들을 향해 감사의 뜻을 담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빌보의 마음 역시 그리 후련한 것만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샤이어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바보 같은 미련이 자꾸 남아서, 결국 2년이나 소린의 곁에 머물렀다. 새로운 왕에게는 그에게 걸맞은 훌륭한 신붓감이 필요했다. 만일 소린의 신부를 찾게 되면. 그래서 에레보르에 새로운 왕비가 생겨나면, 빌보는 외로운 산을 떠나야만 할 것이다. 아무리 지난 2년 동안 우정을 빙자하며 소린의 곁을 지키던 빌보라 할지라도, 행복한 신혼을 즐기는 소린의 모습까지 지켜볼 자신은 없었다. 빌보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바보 같은 마음을 정리하고, 소린과 순수한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했다. 마지막으로 소린이 선물해 준 미스릴을 챙겨입으며, 빌보를 소린의 신부를 찾기 위한 여정의 준비를 모두 마쳤다. 최선을 다해 그에게 어울리는 좋은 신부를 찾아야만 했다. 빌보가 사랑하는 산밑의 왕이 행복할 수 있도록.
빌보가 소린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서 떠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소린과 함께 성벽을 순찰하던 드왈린은 문득 궁금해졌다. 오랫동안 혼자서 지내오던 소린이 갑자기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드왈린이 지켜본 바에 따르면, 참나무방패 소린은 쉽게 자신의 곁을 내주는 난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자신의 위치와 해야 할 일들을 언제나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은 부유한 에레보르의 왕이었다. 그런 소린이 과연 새로운 인연에,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들을 쉽게 믿을 수 있을지 드왈린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소린은 성 아래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드왈린은 결국 혼자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에게 직접 물었다.
" 소린. 갑자기 왜 결혼이 하고 싶어진 겁니까? 새삼 외로워지기라도 한 겁니까? "
" 나는 언제나 고독했네. 외로움은 내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 "
" 그럼 더 이상하군요. 왜 이제 와서 굳이 왕비를 들이려는건지."
" ...갑자기 두려워졌네"
소린의 대답은 드왈린이 예상했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크와의 전투에서도 용맹하게 싸웠던 참나무방패 소린이 두려워하는 것이라니. 소린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지난 2년 동안 언제나 호빗이 나와 함께 있었네. 자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그 선량한 호빗이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네. 아마도 그는 나의 우려에 대해 느꼈을 테지. 난 내가 또 다시 아르켄스톤이나 황금에 집착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지. "
" 그게 뭐죠? "
" 빌보. "
소린의 이야기를 듣는 드왈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나 소린은 그런 드왈린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제 생각에 푹 빠져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빌보에 대해 이야기했다.
" 어째서인지 점점 그를 보면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 그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붙들어두고 싶기도 하고, 그의 웃는 모습을 독점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나는 황금이 아니라 그에게 집착하게 되는 것만 같았지. 아마도 빌보도 그걸 알기에, 그동안 한 번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지. 가엾게도 그는 아직도 나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네. "
" 소린, 빌보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건.. "
드왈린 역시 빌보가 에레보르에 남아있는 이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빌보는 소린을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스스로 원해서 소린의 곁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고, 소린이 신부를 맞이하는 것은 오히려 빌보가 소린을 떠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을 소린이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드왈린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소린이 그의 말을 끊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신부를 맞이하기로 했네. 아마도 내가 반려자를 맞이한다면, 더는 빌보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겠지. 그러면 나는 그를 순수한 우정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될 걸세."
드왈린은 자신의 답답한 왕에게 빌보의 진짜 마음에 대해 알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가만히 내버려뒀다가는 어디까지 바보 같은 결정을 하게 될지 몰랐으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순간 발린이 소린을 찾아왔다.
" 소린. 지금 좀 봐줘야 할 문건이 있는데요. 급한 일이에요. "
" 바로 내려가도록 하지."
소린은 발린의 말을 듣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성안으로 들어갔다. 드왈린은 발린이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자신의 말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사실이었는지, 발린이 드왈린을 향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게. 소린이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아. 우리의 왕께선 성격이 급해서, 섣부르게 조언을 했다가는 어떤 어려운 결정을 내릴지 모를 일이거든."
" 퍽이나 스스로 깨닫겠네. "
발린은 마찬가지로 성미가 급한 자신의 동생을 다독이며, 인자하게 웃음 지었다. 드왈린은 투덜거리면서도 발린의 말에 언제나 수긍하고는 했다. 대체로 발린의 결정은 언제나 옳은 결과를 가져오고는 했으니.
그로부터 또다시 보름이 지나자 빌보가 마침내 에레보르로 돌아왔다. 성벽 위에서 빌보가 탄 조랑말이 작게 보이자마자, 킬리와 필리가 가장 먼저 한달음에 성문으로 달려갔다. 고된 여정으로 인해 빌보의 피부가 조금 거칠어져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는 다친 곳 없이 아주 건강해 보였다. 킬리가 반가움에 한껏 들떠 빌보가 조랑말에서 내리기도 전부터 질문을 퍼부었다.
" 보긴스, 고향은 어땠어? 돌아다니면서 위험한 일을 겪지는 않았어? 엘프들이 사는 곳을 또 지나갔어? "
" 별로 위험하지는 않았어요. 머크우드나 리벨델은 이번엔 들르지 못했구요. 샤이어는 언제나 똑같아요. 여전히 평화롭죠. 물론 내 집의 물건들이 거의 다 팔려나가긴 했지만. 그걸 다시 사들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할지."
빌보는 킬리의 수많은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며 당나귀에서 내려왔다. 빌보의 품에는 몇 장이나 되는 초상화가 돌돌 말려있었는데, 눈썰미 좋은 필리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빌보를 향해 물었다.
" 정말로 신부 후보를 찾아온 거야? "
" 물론이죠. 그걸 위해서 여행을 떠났는걸요. 소린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그에게 신부 후보를 보여줘야 하는데."
" 빌보, 내 생각엔 지금이 그 바보 같은 짓을 멈출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데. "
" 그래! 그 초상화들 이리 내! "
필리와 킬리가 초상화를 뺏으려 하면서까지 빌보를 만류했지만, 빌보는 그들을 물리치고 씩씩하게 소린의 이름을 불렀다. 마침 소린이 빌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부지런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빌보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소린의 안색이 반가움으로 가득하였다. 소린은 빌보를 향해 다가와 그를 끌어안으며 격한 환영을 했다.
" 잘 돌아왔네. 어디 다친 곳은 없겠지? "
" 그럼요. 저는 용에게서 보석을 훔치고도 무사했던 좀도둑이잖아요. 그보다, 어서 빨리 당신에게 내가 이번에 훔쳐온 물건들을 보여주고 싶은데요. 내가 얼마나 당신에게 딱 맞는 신붓감을 찾아왔는지 기대되지 않나요?"
빌보가 장난스럽게 자신의 품에서 돌돌 말린 초상화 뭉치를 흔들며 말했다. 정작 기뻐해야 할 소린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있자, 빌보가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초상화 뭉치를 흔들었다. 어느새 난쟁이들이 빌보가 구해온 신붓감을 궁금해하며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소린은 조용한 곳에서 신중한 선택을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그들을 피해 빌보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소린은 빌보를 자신의 방의 작은 테이블 앞에 앉혔다. 소린은 정작 신붓감보다는 빌보가 다친 곳은 없는지, 여행은 어땠는지에 대해 더 궁금해했으나, 빌보는 뭐가 그리 급한지 테이블을 끌어와 그 위에 자신이 가져온 다섯 명의 신부 후보의 초상화를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 이 호빗 아가씨의 이름은 아멜리아 벨. 샤이어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빗이에요. 그녀는 춤을 아주 잘 춰요. 축제 때 그녀와 춤을 추고 싶어하는 호빗들이 언제나 줄을 서 있죠."
빌보가 첫 번째 신부 후보에 대해 이야기를 읊기 시작했다. 소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서 빌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어디 나뭇가지에라도 긁혔는지, 빌보의 이마에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역시 빌보를 혼자 내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어리석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소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 남자들과 춤을 즐겨 추다니. 경박하기 그지없군. 다음 후보를 보여주게. "
빌보는 역시 소린의 마음의 드는 신붓감을 찾는 것은 예상대로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첫 번째 신부 후보의 초상화를 휙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바로 두 번째 신부 후보의 초상화를 집어 들어 소린을 향해 그녀에 관해 설명했다.
" 메이 위스턴. 미모는 아멜리아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샤이어에서 가장 현명하고 재치있는 호빗이에요. 그녀의 아버지가 구두쇠라, 예쁘고 화려한 옷을 입지는 않지만…. "
" 아버지가 구두쇠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군. 다음."
" 로즈 에일. 요리를 정말 잘해요. 나도 가끔 그녀의 레시피의 도움을 받고는 했죠. 저보다 8살이 많은데…. "
" 나이가 너무 많군. 다음."
빌보는 자신과 소린의 나이 차이를 떠올리며, 로즈라는 호빗이 아직 충분히 어리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지만, 굳어있는 소린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먹혀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빌보는 로즈의 나이에 대한 변호를 빠르게 포기하고, 네 번째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 레일라 홉스. 아주 씩씩하고... "
"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다음. "
" 케이틀린 ㅂ... "
"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다음. "
빌보는 점점 성의 없는 변명으로 신부 후보들을 거부하는 소린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보가 찾아온 신부 후보는 다섯이 전부였다. 빌보가 빈손을 털레털레 흔들어 보이자 소린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입가에 곡선을 그리며 웃음을 지었다. 소린은 고작 저런 여자들을 찾으려고 자신에게서 멀어져 있던 빌보가 괘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결혼 얘기는 소린이 먼저 꺼내긴 했지만. 소린은 테이블을 저만치 치우고, 빌보의 손목을 잡아 자신에게로 가까이 끌며 다정한 말투로 빌보를 향해 말했다.
" 그런 것 보다, 여행 다니면서 있었던 일이나 이야기해보게, 빌보. "
" 뭐,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과…. 아니, 난쟁이 친구들 모두와 함께 왔던 길을 혼자서 돌아가려니, 꽤 쓸쓸했어요. 자꾸 혼잣말이 늘더라고요. 가끔은 불안해지기도 했죠. 그때마다 소린…. 아니, 난쟁이들이 얼마나 든든한 여행의 동반자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어요."
빌보의 대답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는지, 소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문득 소린은 자신이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자신이 친구에게 점점 집착하는 모습이 두렵기는 했지만, 그 집착이 꼭 그렇게 기분 나쁜 종류의 것만은 아니었다.
" 빌보. 이제 굳이 신부를 찾지 않아도…. "
소린이 더 이상 자신의 신부를 찾는 것을 그만두라고 빌보에게 말하려는 찰나, 빌보가 갑자기 큰 결심을 한 듯 결의에 찬 목소리로 소린을 향해 말했다.
" 소린 사실, 한 명의 후보가 더 있는데 말이에요."
소린의 표정이 다시금 떨떠름하게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빌보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뒤지면서 계속 소린이 원하지 않는 말들을 머뭇머뭇 쏟아냈다.
" 하지만 이 후보를 과연 당신에게 소개해줘도 될지 고민이네요. 사실, 당신의 신부후보를 찾다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거든요. 나도 이제 결혼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요. 나도 좀 외로웠었나 봐요. 그래서 여섯 번째 신부 후보는.. "
" 그래서. 설마 네가 그 여섯 번째 신부 후보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
" 네? "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소린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뭔가를 찾던 빌보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빌보를 향한 이상한 집착을 멈추기 위해서 결혼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맙소사! 빌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다니! 그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그를 에레보르 가장 깊은 곳에 가둬두고 아무도 볼 수 없도록 꼭꼭 숨겨두는 것이 나았다. 소린은 빌보가 아픔으로 인상을 찡그리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더욱 힘을 주어 빌보의 손목을 잡고 외쳤다.
" 나를 두고 혼자 결혼을 하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둘 것 같은가? "
" 잠깐 소린.. 이것 좀 놓고.. "
" 이제부터 너는, 내 허락 없이는 절대 단 한걸음도 내 곁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소린! "
빌보가 힘겹게 소린에게 잡혔던 손목을 빼내고는 소리치며 그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소린은 불안한 듯한 눈빛으로 빌보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자신의 광기 어린 모습을 호빗에게 보이고야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빌보의 표정에서 겁먹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빌보는 기어코 소린에게 여섯 번째 신부 후보를 소개할 작정인지,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손에 들린 건 그저 서툰 솜씨의 꽃반지 한 쌍이었다. 하물며 꽤 시들어있는.
" 빌보?"
" 여섯 번째 신부 후보는 사실 저예요. "
빌보가 양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소린은 머릿속에서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빌보의 손에 들린 꽃반지만을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신부 후보가 자신이라는 건, 신부가 아니라 신랑을 맞이하겠다는 건가? 대체 누구를?
" 신부 후보를 찾다보니 당신이 말한 조건에 가장 들어맞는 건 나밖에 없겠더라고요. 물론…. 남자 호빗이긴 하지만. 어쨌든, 당신보다 키도 작고, 욕심이 없죠. 성격도 꽤 좋은 것 같고, 나 정도면 요리도 꽤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어때요? 신붓감으로 꽤 괜찮지 않나요?"
비록 씩씩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떠들어대고는 있었지만, 빌보의 마음속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요동치고 있었다. 소린의 신부 후보를 찾아 그를 떠나 있으면서, 빌보는 소린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뼈저리게 깨닫고야 말았다. 샤이어로 돌아가는 장소 곳곳마다 소린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묻어있었다. 그 길들을 혼자 돌아가며 빌보는 생각했다. 그가 왕비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영원히 그를 떠난다면 평생을 미칠듯한 그리움 속에서 살아야 하겠지. 그렇다고 소린이 다른 이와 결혼하는 모습을 떠나지 않고 지켜볼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빌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빌보는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 내, 2년이 넘도록 숨겨온 자신의 마음을 드디어 소린에게 내보여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
"...소린?"
불행히도, 정작 소린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건 빌보가 예상했던 모든 상황 가운데 가장 안 좋은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미칠 듯이 떨려오던 빌보의 심장박동이 서서히 차분해졌고, 머릿속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하지만 이런 결과 역시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었다. 빌보는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소린을 향해 웃었다.
" 농담이 조금 지나쳤나요?"
" ...... "
" 사실 여섯 번째 신부 후보는 없었어요. 하지만 곧 다른 신붓감을 구해오도록 할게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줘요."
경련으로 입술이 파르르 떨려오는 것을 애써 멈추려 노력하며, 빌보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소린을 뒤로 한 채 잔뜩 풀이 죽어 소린의 방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혹시나 하는 미련으로 천천히 방문을 닫았지만, 소린은 그때까지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5초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소린이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소린의 머릿속에서 빌보의 말들이 빙글빙글 의미 없이 맴돌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상황을 눈치챈 소린이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다급하게 빌보의 뒤를 쫓았다. 복도를 따라 달려가자 곧 힘없이 걷고 있는 빌보의 뒷모습이 보였다.
" 빌보!! "
소린은 자신을 돌아보는 빌보를 향해 달려가 그의 어깨를 황급히 붙잡고 돌려세우며, 에레보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 여섯 번째! 여섯 번째 후보로 하겠네! "
" 소린..? "
" 제발 다른 신붓감을 구하려는 짓은 하지 말게. "
빌보는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소린을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빌보를 그대로 떠나보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에, 소린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소린은 빌보의 어깨를 잡아끌어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눈이 멀었었어. 나는 자네가 나를 언젠가 떠날 거라고 생각했네. 내가 점점 자네에게 집착하고 있었거든. 그게 두려워서 바보같이 다른 사람을 곁에 둘 생각을 하다니. 그냥 자네를 붙잡으면 되는 것을."
" 무슨 소리예요? 소린. 장담하건데 제가 먼저 당신을 떠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당신이 정말로 다른 신부를 맞이한다면 모를까."
빌보는 소린의 말을 듣자 안심이 됐는지, 힘없이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동안 혼자 애태웠던 시간들을 생각하니, 빌보의 눈가에 바보같이 눈물이 고였다. 소린은 자신과 결혼해줄 수 있느냐는 말에, 품속의 빌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빌보는 소린의 품속에 여전히 얼굴을 묻은 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전 사실 2년 전에 당신에게 고백했던 적이 있었다구요. "
" 2년 전? 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 당연하죠. 당신은 그때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난쟁이들이 전부 그걸 알아버리고는, 얼마나 눈치없는 배려들을 해주던지.. "
지나간 마음고생이 억울한지 빌보가 사랑스럽게 투덜댔다. 소린은 그런 빌보를 향해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계속해서 자신의 그동안의 시련에 대해 작게 구시렁대는 빌보를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어디 가요? 다른 사람들에게 결혼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아요? "
" 그건 나중에. 지금은 자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때인 것 같군. "
" 어떻게 풀어줄 수 있는데요? "
소린은 계속되는 질문을 하는 빌보를 자신의 방안으로 밀어 넣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 첫날밤을 미리 받는 것."
그리고 그렇게 굳게 닫힌 소린의 방문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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