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백엔드의 유령
백엔드의 유령
The ghost of Bag End
'이렇게 아픈게 사랑이라면, 차라리 이 기억을 제게서 지워주세요'
내가 처음 그 남자의 유령을 본 건, 백엔드로 입양되고 나서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던 날이었다. 나를 입양해준 빌보 삼촌은 좋은 분이셨지만 난 아직 삼촌과 백엔드가 낯설었고, 부모님이 그리웠다. 그래서 언제나 예전 집에서 가져온 오래된 담요를 끌어안고 웅크린 채 울며 잠이 들곤 했었다. 그러나 그날은 담요 위에 물을 엎지르는 실수를 했고, 빌보삼촌은 내 오래된 담요를 대신할 낡은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척이나 헤지고 낡은 어떤 담요를 꺼내 내게 덮어주었다. 난 단순히 오래된 담요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옛집의 냄새가 배어있던 그 담요가 필요했던 것인데. 어쨌든 빌보 삼촌의 마음을 실망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삼촌의 담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담요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반지가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나는 그 반지를 주워 빌보 삼촌에게 가져갔으나, 삼촌은 자신의 반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삼촌은 자신의 담요에서 나온 그 금색의 반지를 내게 선물했다. 내게는 너무 커다란 그 반지를 줄에 걸어 목에 끼우고 나는 가만히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백엔드로 온 지 두 달이 되어가는 날 동안 나는 단 하루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언제나 잠자리에 들면,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옛집이 떠올랐고,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아른거려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나는 슬픔과 그리움에 숨죽여 훌쩍훌쩍 울다가, 낮에 빌보삼촌에게 받았던 반지가 생각났다. 마치 아빠와 함께 배 위에서 보았던 별처럼 반짝이는 반지를 보며 마음을 달래던 중, 나는 그 반지를 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엄지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잠들었던 빌보 삼촌은 깜짝 놀라 한달음에 내방으로 달려왔다.
"프로도 무슨 일이니?"
"삼촌, 제 방에 유령이 있어요!"
나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나의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무서운 얼굴을 한 남자가 가만히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삼촌의 가운 자락에 얼굴을 파묻고 바들바들 떨며, 나중에는 공포에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삼촌은 그런 나를 안아 다정하게 다독이며 유령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삼촌의 위로를 조금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를 달래주는 삼촌의 등 뒤로 여전히 그 무시무시한 유령이 서슬 퍼런 눈빛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 나는 삼촌의 방에서 삼촌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야만 했다.
그 유령사건이 단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유령은 그 이후로도 백엔드 이곳저곳에 출몰했다. 아무리 유령에 관해 설명해도 빌보 삼촌은 믿지 않았기에, 난 더이상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관뒀다. 대신 나는 그 유령을 떨쳐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유령이 싫어할만한 고약한 냄새를 지닌 풀을 베갯맡에 두고 잠들기도 했고, 질 나쁜 욕설을 내뱉기도 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자신이 반지를 빼면 그 유령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마도 그 반지는 죽은 이들을 보여주는 신기한 반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도 나는 반지를 뺄 수 없었다. 혹시 죽은 나의 부모님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 시커멓고 무섭게 생긴 유령뿐이었다. 자꾸 보다 보니 공포심이 옅어졌는지, 나는 용감하게도 그 유령을 종종 뚫어져라 관찰하고는 했다. 그는 곱슬 거리는 검은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입을법한 모피를 걸치고 있었다. 아마도 전쟁에서 죽은 유령인지, 갑옷을 입고 한쪽에는 칼도 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삼촌에게 달려가 혹시 샤이어에서 전쟁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삼촌은 그런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날 밤 나는 벽난로 앞에 나타난 유령을 향해 용기를 내어 인사를 건넸다.
"음….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네요?"
그리고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유령과 함께 지내자, 나는 마치 그가 우리의 가족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꾸 보다 보니 그가 번듯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여전히 삼촌은 유령 같은 건 없다며 나를 이상한 녀석 취급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 유령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유령이 언제나 빌보 삼촌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그 유령을 처음 봤던 나의 방안에서도, 그는 내가 아니라 내 뒤의 빌보 삼촌을 바라보고 있었을지 몰랐다. 나는 삼촌을 따라다니며 그 유령의 모습을 묘사하며 삼촌이 아는 호빗 중에 그런 호빗이 있지 않느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하지만 삼촌은 정말로 그런 모습을 한 이는 호빗은커녕 엘프와 드워프 중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나는 그때까지 엘프도 드워프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에 삼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 유령의 정체가 드워프임을 알게 됐다. 백엔드에 그 '드워프'라는 종족들이 삼촌을 찾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촌의 오랜 친구라고 말했다. 무척이나 거칠고 시끄럽고 산만한 삼촌의 드워프 친구들이 머무르는 동안 어쩐 일인지 그 유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삼촌의 친구들 중에 가장 인자하고 착할 것으로 보이는 흰 수염의 드워프를 찾아가 유령에 관해 묻기로 했다.
"저기 혹시 드워프들은 다들 당신들처럼 코가 크고, 수염이 나 있나요?"
"그렇지. 왜, 혹시 드워프를 본 적이 있니, 꼬마 친구?"
"네. 하지만 어디에서 봤는지 말해도 믿지 않으실 거에요. 삼촌도 믿지 않았거든요."
"어디 한번 말해보거라. 어디서 드워프를 만났지?"
나는 조심스럽게 흰 수염을 가진 그 드워프에게 내가 보았던 유령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굳은 표정이 되었고, 나중엔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도대체 내 이야기의 어디가 나이 든 난쟁이를 슬프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손을 붙잡고 빌보삼촌에게 더이상 그 드워프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전했다.
"하지만 그 유령은 언제나 빌보 삼촌을 바라보고 있는데도요? 혹시, 그 유령이 삼촌을 해치면 어떡하죠?"
"그럴 일은 없을 거란다 얘야. 그 유령은 너희 삼촌의 아주 오랜 친구였거든."
"하지만 삼촌은 전혀 그 유령에 대해 알지 못했는걸요."
"때로는 슬픔이 너무 크면, 그에 대해 잊어버리는 길을 선택하기도 하지."
나는 어렸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 역시 부모님을 잃은 사실이 너무 슬퍼, 차라리 부모님에 대한 것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을 잊는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그러자 나는 빌보 삼촌이 가엾게 느껴졌다.
난쟁이들이 떠나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가끔은 그 유령에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당신은 왜 삼촌의 주변을 머무르는 건가요. 뭔가 삼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요? 삼촌은 왜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하지만 그 유령이 나를 쳐다보거나,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삼촌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잠든 삼촌의 곁에 서 있는 유령의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아, 그는 삼촌을 지켜주고 있구나. 혹여 삼촌에게 나쁜 무언가가 접근하지 않도록, 삼촌과 백엔드를 지켜주고 있구나. 그러자 나는 그 유령이 조금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이었다. 낮 동안 대청소를 하느라 피곤했던 삼촌과 나는 여느 때보다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어쩐지 잠결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너무도 피곤해서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너무도 분명하게 누군가 내게 소리를 쳐, 나를 깨웠다.
"프로도!"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고, 내 방 주변을 가득 메운 화염과 연기를 보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언제나 가만히 서 있던 드워프의 유령이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프로도! 어서 삼촌을 데리고 빠져나가!"
나는 뭐라 놀라거나, 대답할 정신도 없이 그대로 삼촌의 방으로 달려갔다. 삼촌은 이미 연기 때문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나는 그런 삼촌을 힘겹게 들쳐메고 부랴부랴 불타는 호빗굴을 탈출했다. 다행히 불이 백엔드를 전부 태워 먹기 전에 이웃 호빗들이 나섰다. 화재는 진압됐으며, 백엔드의 반절과 삼촌의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 빌보삼촌을 비롯한 모두가 나의 기지를 칭찬했으나, 나는 그것이 유령의 도움이라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누구도 믿지 않겠지. 빌보 삼촌조차도. 나는 어쩐지 슬퍼졌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유령을 만나면 삼촌과 나를 구해준 일에 대해 꼭 감사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 속에서 빌보삼촌을 구하던 도중에 반지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기에,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그 유령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반지를 다시 찾은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화재로 타버렸던 백엔드의 반절은 이미 복구한 지 오래였고, 나는 이제 유령을 두려워하던 어린 호빗이 아니었다. 빌보삼촌은 어느덧 많은 나이를 먹어, 곧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삼촌을 위해 향기 좋은 꽃들을 꺾으러 정원을 돌아다니던 나는, 오래되고 불길에 그슬려 빛이 바랜 그 반지를 찾아냈다. 나는 이 반지가 인제야 내게 발견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느꼈다. 난 빌보 삼촌을 향해 다가가 꽃을 건네주며 말했다.
"빌보, 만약에 제가 삼촌과의 모든 추억을 잊어버린다면 어떨 것 같아요?"
"오 프로도, 잊혀진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지. 나는 될 수 있으면 네가 나를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좋겠구나."
"맞아요. 그리고 저 역시 무척이나 슬플 거에요. 삼촌과 나누었던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그 후의 제 인생이 얼마나 가엾을까요."
삼촌은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은 채 힘겹게 손을 올려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낡고 그슬린 반지를 꺼내며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 제 생각에는 이제는 삼촌이 그를 봐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프로도? 이건 네 반지잖니."
"아니요. 이건 원래 삼촌의 반지였어요."
그 유령이 아직도 백엔드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삼촌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삼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의 등 뒤에 있는 벽난로 쪽을 바라보았다. 삼촌은 처음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반가운 표정, 그리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급기야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셨다. 아마도 삼촌은 이제서야 잊었던 모든 기억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나는 삼촌이 벽난로를 편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먼발치로 물러났고, 삼촌은 허공을 향해 혼자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삼촌이 혼잣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삼촌이 그에게 품었던 큰 연정과 경애의 감정을 나는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삼촌의 품 안에서 죽었다. 삼촌은 그 사실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마법사에게 자신의 기억을 전부 지워달라고 부탁했고 그 결과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여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반지를 다시 끼고, 유령의 모습을 보자 잊었던 모든 기억이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삼촌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고, 삼촌은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잠들듯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유령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유령의 이름은 소린 오큰쉴드, 에레보르의 난쟁이, 산밑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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