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단편 15. 4. 5

[소린빌보] 동행



동행
Walk with phantom




 빌보는 더이상 예전과 같은 젊은 호빗이 아니었다. 그는 벌써 111번째의 생일을 맞이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시금 에레보르로 여정을 떠나기로 한 게 과연 잘한 결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그의 소중한 반지마저 내려놓은 채, 빌보는 마치 60년 전 처음 여정을 떠났을 때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홀가분하게 샤이어를 떠났다.

 예전처럼 조랑말을 타고 샤이어를 벗어나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흥분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치 60년 전, 난쟁이들과 함께 여정을 떠났던 때처럼. 지금 빌보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조금 쓸쓸하긴 했지만, 그만큼 좀 더 느긋한 여행이 될 수 있으리라. 샤이어를 벗어나 며칠을 홀로 여행하며 빌보는 난쟁이 한명 한명을 떠올렸다. 그래 이곳에서는 보푸르가 노래를 불렀었지. 봄부르가 이 근처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나무를 부러뜨리고는 했지. 도리 오리 노리.. 발린 드왈린.. 오인... 글로인.... 빌보도 너무 나이를 먹은 탓일까, 난쟁이들의 얼굴과 이름이 바로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빌보가 트롤숲 부근을 지날 때 갑자기 튀어나온 작은 쥐 한 마리에 빌보의 조랑말이 놀랐는지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안돼!"


 조랑말 위에서 중심을 잃은 빌보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런 빌보를 향해 어떤 이가 다가왔다.


"괜찮은가?"
"아, 고맙네."


 빌보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행인을 바라보았다. 빌보보다는 컸지만, 인간이나 엘프에 비하면 작은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 드워프였다. 빌보는 언뜻 봐도 자신보다 꽤 젊어 보이는 난쟁이가 꽤 오만한 말투를 쓴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아마도 드워프 중에서도 꽤 지위가 있는 자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빌보는 자신을 도와준 드워프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자네는 난쟁이로군. 이 근방에서 난쟁이를 보는 일은 드문데.. "

"호빗이 자신의 집을 내려두고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니지."


 빌보는 난쟁이의 무뚝뚝한 말투가 어딘지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들었더라…. 하지만 잠시 기억을 더듬어봐도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 역시 나이 탓이리라.


"나는 빌보 배긴스라고 하네. 샤이어의 호빗이지. 자네는 호빗에 대해 잘 알고 있군?"

"그럭저럭."


 빌보는 그가 곧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무례한 방랑자는 자신에 이름을 밝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빌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지팡이를 주워들었다.


"좋네. 자네는 그냥 드워프 씨라고 부르도록 하지. 어차피 이 근처에 드워프라곤 자네뿐일 테니. 자, 드워프 선생,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인가?"

"에레보르."


 비록 말은 짧지만, 묻는 말에는 성실하게 대답하는 독특한 난쟁이였다. 빌보는 그의 입에서 나온 낯익은 지명을 듣자마자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을 띄우며 반겨 말했다.


"오, 자네는 에레보르의 난쟁이였군! 마침 나 역시 그곳으로 가던 길이라네. 이런 신기한 일이.."

빌보가 반가워하거나 말거나,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지 않는 그 난쟁이는 빌보를 거만하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꽤 나이가 들었군."

"자네가 보기엔 내가 여행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겠군. 하지만 나는 초행이 아니라네. 이미 젊은 시절에 에레보르까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지. 에레보르는 참 멋진 곳이지. 참, 자네도 에레보르로 가는 길이라면 함께 동행하지 않을 텐가?"


 빌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난쟁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빌보는 60년 전처럼 자신에게 난쟁이 동행이 생긴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렇게 한 늙은 호빗과 이름을 밝히지 않는 드워프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됐다. 드워프는 거의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지만, 빌보는 그저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 자신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떠들었다. 샤이에어 두고 온 오래된 의자라든지, 어머니의 혼수함. 그리고 자룻골 사촌 로벨리아가 자신의 은식기를 가져가려 했던 이야기들을 능숙하게 풀었다. 지난 시간 동안 샤이어의 꼬마 호빗들에게 수십 번은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들이었다.



 하루는 트롤숲 근처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빌보는 낯익은 장소와 돌이 된 트롤들을 보자,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생각났다는 듯이 드워프를 향해 다가왔다.

"내가 전에 열세 명의 드워프와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고 말한적이 있었는데, 기억하나? 그때 바로 이 자리에서 모조리 트롤의 식사 거리가 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네."

 가만히 앉아 잠자리를 정리하던 드워프는, 트롤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흥미롭다는 듯이 빌보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러자 빌보는 더욱 신이 나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을 약간의 과장과 함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이 통구이가 될 뻔한 상황에서 자신이 얼마나 용감하고 재치있게 시간을 끌었는지.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허풍도 상당히 섞여 있었지만. 그리고 빌보가 과장된 허풍을 칠 때마다 그 난쟁이는 미묘하게 웃었다. 문득 빌보는 이전에도 느꼈던 기시감을 또다시 느꼈다.


"자네는.. 어쩐지 내가 아는 드워프를 닮았군. 그가.. 누구였더라."


 빌보는 기억 속에서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난쟁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말수가 적고, 늘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으며, 빌보를 향해 언제나 화난듯한 말투로 말했던.


"그의 이름과 얼굴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군. 아마 그 원정대의 리더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이 모든 게 나이 탓이겠지."


 빌보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지난 세월을 한탄했다. 빌보는 이미 충분히 고령이었다. 비록 반지 덕분에 그동안은 젊은 모습으로 긴 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반지가 없으니 점점 급속히 늙어가겠지.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빌보는 자신의 몸이 힘들거나 지치기는커녕,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한살 한살 젊어지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아마도 새로 만난 드워프 친구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덕분이겠지. 빌보는 문득 자신의 손을 살펴보았다. 신기하게도 손의 주름 역시 조금 줄어든 것만 같았다. 빌보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기분 탓일 거로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빌보가 아는 여느 드워프들과 마찬가지로, 빌보의 동행인 역시 요정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빌보는 죽기 전에 꼭 다시 한 번 제 눈으로 리븐델을 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빌보의 동행인은 한사코 엘프의 땅을 밟는 것을 거부했다. 빌보는 곤경에 처했다. 에레보르까지 함께 갈 귀중한 동행인을 잃거나, 리븐델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빌보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빌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리븐델에 들르지 않고, 계속 에레보르를 향해 가도록 하지. 정말 난쟁이들이란."

 빌보가 엘프의 땅을 지나는 것을 포기하자, 난쟁이는 흡족한 듯 조랑말을 돌렸다. 빌보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불평 섞인 목소리로 난쟁이들의 고집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원정대에서 가장 고집이 셌던 드워프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자, 빌보의 동행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예전에도 그에 관해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 원정대의 리더였다는 난쟁이."

"아.. 그.. "

 빌보는 아직도 그의 이름이 잘 생각이 나질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름이 뭐였길래 이토록 기억이 희미한 것인지. 빌보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포기하고, 그에 관한 기억 조각들을 하나씩 더듬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와 친밀한 관계였나?"

"처음엔 전혀 아니었네. 그는 날 탐탁지 않아 했거든. 세상에 나더러 채소장수 같다고 말했다고! 내가 자신들의 여정을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 그가 어찌나 나를 구박했는지…. 고블린굴 근처쯤에선 나도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지."



 빌보는 리븐델을 지나 고블린 굴을 지날 때까지 자신이 겪었던 예전 일들에 대해 자신의 동행인에게 조금씩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예전의 모험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점차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크에게 쫓기던 일, 스톤자이언트들의 싸움에 휘말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 고블린의 굴에서 골룸을 만났던 일까지. 작은 호빗이 겪기에는 너무도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었지만, 빌보의 동행인은 어떠한 이야기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마치 자신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인 마냥,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고 가끔은 그 역시 무언가를 회상하듯,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빌보는 자신의 과묵한 동행인이 꽤 마음에 들었다. 비록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빌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드워프가, 어느 날 처음으로 빌보를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내 생각엔, 원정대의 리더가 자네를 잘못 판단한 것 같군. 당신은 아주 용감한 호빗으로 보이는데?"

"아, 물론 그가 계속 나를 싫어했던 건 아니네."


 빌보는 마침 자신의 주변에 나타난 풍경을 잠시 둘러보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빌보가 아조그를 처음 보았던 바로 그 장소였다.


 "바로 이 부근에서 내가 그의 목숨을 구했던 기억이 나는군."


 아조그. 

 빌보는 아직도 분명하게 떠오르는 오크의 얼굴과 이름에 작게 몸서리를 쳤다. 무슨 용기로, 작고 연약한 호빗이 아조그의 앞으로 달려갔을까. 그때 빌보의 머릿속에는 한 드워프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게 그의 목숨을 구했지.


"그날 이후부터 많은 것이 바뀌었네. 그전까진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그의 태도가 변했지."


 그리고 빌보는 문득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드워프들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호빗에게 깊은 신뢰를 보여줬다.

 그것이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다른 어떤 무언가로 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빌보를 자신의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빌보에게만 다른 표정과 다른 말투를 보여주었지. 그리고.. 그들이 머크우드 근처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빌보는 드워프왕으로부터 위협하는듯한 저음을, 하지만 너무도 달콤하고 다정한 고백을 들었다.


 "그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군."


 드워프가 묻자 빌보는 자신의 동행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왜 그런 사실을 그동안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기억은 진짜였다.


"오래전 일이지.."

"그래서 당신은 그에게 어떤 대답을 들려주었지?"


 되물어오는 동행인의 물음에, 빌보는 씁쓸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네."




***





 어느새 머크우드를 지나, 호수마을 근처까지 도달했을 때 빌보는 갑작스레 말했다.




"난 용감한 호빗이 아니라네."




 그들은 어느덧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동행해왔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그 드워프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꽤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길잡이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빌보의 갑작스러운 말에 드워프는 빌보를 가만히 바라보며 답했다.




 "지금껏 내가 들었던 자네의 모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당신은 충분히 용기 있는 호빗이네."




 과연 그랬다. 빌보가 지금껏 들려준 이야기들은 중간계의 어떤 호빗도 할 수 없는 용감한 행동들이었다. 작은 칼 한 자루로 오크에게 맞서거나, 엘프들에게서 열쇠를 훔치거나, 난쟁이들을 술통에 태워 도망치게 하는 일들. 게다가 용이 잠든 곳으로 혼자 숨어들다니. 비록 반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빌보가 굳이 낯선 동행인에게 절대반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할 필요는 없겠지. 빌보의 동행인은 빌보를 어딘지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했던 많은 일들은 드워프라할지라도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네. 그러니 자신의 용기에 대해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듯하군."




 그는 마치 빌보의 모든 행동을 직접 보기라도 한 양, 경의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빌보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칭찬을 부정했다.




"하지만 난 가장 중요한 때에 용기를 내지 못했네."


"중요한 일?"




 빌보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마전 기억해낸 과거의 행동을 떠올렸다. 바르드가 용을 죽인 이후의 일이었다. 원정대의 리더이자, 드워프의 왕이었던 그는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은 아르켄스톤을 갈구했다. 그는 자신의 가신들과 동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빌보를 의심하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아르켄스톤을 찾고도 숨기고 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분명 빌보겠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을 고백한 상대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난..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네. 나는 그의 고백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나를 향해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보냈지. 하지만.. 나는 결국 그를 배신했네. 난 아르켄스톤을 인간과 요정들에게 넘겨주었지."



 빌보는 성벽위에서 그가 자신을 바라보던 표정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배신감에 붉게 물든 그의 눈빛과 떨리던 목소리. 그는 빌보를 성벽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고까지 했었지. 그런데 그 이후로 그가 어떻게 되었더라. 빌보는 멍하니 멀리 보이는 에레보르를 바라보았다. 에레보르에 도착하면, 자신이 잊고있던 모든 기억을 되찾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희뿌연 안개가 짙게 끼어있었다. 에레보르 근처에 도달하자 빌보는 문득 자신이 가고싶었던 장소가 에레보르 성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빌보는 그의 동행인을 향해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나는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서, 이곳에서 자네와 헤어져야겠군."


"에레보르 성으로 가지 않는건가?"


"난 갈가마귀 언덕으로 갈 생각이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생을 마치기 전에 저 곳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빌보는 지금까지 자신과 동행했던 기묘한 난쟁이를 향해 손을 내밀어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빌보의 손을 마주잡았다. 빌보는 자신의 손이 마치 젊은이의 손처럼 매끈해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것 참 이상한 일이군. 이건 마치, 60년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빌보는 자신이 난쟁이의 손을 너무 오래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보가 후다닥 손을 놓자, 그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자, 왜인지 울컥한 기분이 든 빌보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참, 헤어지기 전에 자네의 이름을 묻고싶네만."




그러자 그는 빌보를 향해 뒤돌아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보일듯말듯한 미소를 입가에 띄며 말했다.




"이미 자네는 내 이름을 알고있네."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만을 남기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빌보는 그가 참으로 기묘한 난쟁이라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갈가마귀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그 험한 길을 오르면서도 빌보는 한번도 쉬거나 숨을 헐떡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60년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급기야 빌보는 언덕을 향해 달렸다. 예전에도 이렇게 이 장소를 달려간 적이 있었지. 무슨 이유때문에 그렇게 다급하게 달렸지? 




그리고 에레보르성이 보이는 절벽에 다다르자, 빌보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빌보가 서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죽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빌보를 향해 작별인사를 전했다. 샤이어의 책들로, 의자로 돌아가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라고 했지. 그래서 빌보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책을 쓰며, 나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살았다. 그리고 서서히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워나갔다. 


 


 빌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슴 깊은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랬군. 그래서 이곳에 다시 오려고 했던 것이었어." 




 


 빌보는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뭍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은 비겁한 호빗이었다. 빌보의 머릿속에 죽어가던 그의 얼굴이, 배신감에 물든 그의 상처입은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가 그렇게 떠날 줄 알았다면, 아르켄스톤이라도 그의 손에 쥐어줬어야했는데. 60년전의 자신은 어째서 그에게 그다지도 잔혹했던 것일까. 




 그는 언제나 빌보에게만큼은 다정한 난쟁이었다. 그러나 빌보는 단 한번도 그의 애정표현에 응한적이 없었다. 그는 에레보르의 왕이니까. 수많은 드워프들을 이끌어야하는 산밑의 왕이기고, 자신은 보잘것없는 호빗이었으니까. 자신과 그는 가야할 길이 다르다고 여겼다. 그를 위해서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서는 안됐고, 용을 물리친다면 그를 위해서 자신은 조용히 떠나야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의 마지막은 예고없이 너무도 빨리 다가왔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았을텐데. 오랜시간이 지나도 그 사무치는 후회의 감정이 옅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빌보는 그를 따라 죽을 용기도, 그를 보내줄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빌보는 비겁하게도 그의 기억을 전부 지워버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야 자신의 고통이 옅어질테니까. 자신은 그를 추억하는 일에서조차 도망친 용기없는 호빗이었다.  






 그리고 그런 빌보의 등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묻고싶은게 있어서 돌아왔네."




빌보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등뒤로 다가온 동행인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 드워프를 싫어했나?"




그의 얼굴을 보자 빌보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의 말이 맞았다. 빌보는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있었다. 목이 매여와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빌보가 힙겹게 그를 향해 답했다. 






 "아니요. 아니요.. 난 한번도 그를 싫어한 적이 없었어요. 비록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빌보는 자신의 눈앞에 다가온 동행인의 손을 천천히 잡으며,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고, 빌보는 마치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수줍은 소녀마냥,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샤이어의 내 집을 찾아온 그 순간부터 줄곧 당신을 사랑했어요. 소린."






 지금까지 자신과 동행했던 드워프에게서 왜 그리도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는지, 빌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소린 오큰쉴드. 처음 백엔드의 문을 열었던 순간부터, 자신의 품속에서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이 멎던 순간까지 빌보가 사랑했던 난쟁이. 빌보가 잊고있던 그리운 얼굴. 빌보의 동행인, 아니 참나무방패 소린은 빌보의 손을 마주잡으며 호빗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내 이름을 기억해낼줄 알았지."


"소린, 당신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 이 장소를 찾아왔어요. 당신을 만나서.. 이번에야말로 하지못했던 말들을 전부 하고 싶어서. 마지막 용기를 내고 싶어서."




빌보는 행여라도 자신이 쥐고있는 소린의 손이 사라지기라도 할새라 힘껏 쥐고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때, 내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는지 모를거에요. 몇번이나 당신을 향해 말하고 싶었죠.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나는 비겁하게도 당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당신을 잊었어요. 당신을 따라서 죽지도 못하는 용기없는 호빗이에요 전."




소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있는 작은 호빗을 끌어안아 품에 안고 다독였다. 




"자네는 나의 마지막 부탁을 성실히 지켜주었지. 끝까지 살아줘서 고맙네. 자네는 언제나 용감한 호빗이었네. 단 한번도 비겁하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지."




 빌보는 자신의 눈앞의 소린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낸 지금, 그를 보내야한다는 사실을. 빌보는 소린이 사랑했던 60년전의 그 모습 그대로, 천천히 그를 향해 입을 맞추었다. 




 감은 두 눈에서는 눈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뜨면, 빌보의 눈앞에 소린의 모습은 없겠지. 빌보는 두려웠다. 이 눈을 뜨면 또다시 그가 없는 세상이다. 빌보는 이미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소린이 없는 세상에서 버텨왔다. 하지만 빌보는 언제까지고 눈을 감고, 그의 기억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이제는 소린의 기억이 있다. 그를 기억하자.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마치고 또다시 그를 만나자. 




이곳이 됐건, 다른 어느 곳이 됐건.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나 사랑하자. 




빌보는 천천히, 아주 힘겹게 감았던 눈을 떴다. 그가 낼 수 있는 마지막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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