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단편 15. 4. 1

[소린빌보] 미망(未亡)


미망(未亡)
린빌보/조각글




왕이 죽었다. 



 그를 지키다가 그의 어린 두 조카마저 목숨을 잃었다. 오래도록 이어져오던 두린의 직계혈통이 이제는 영원히 끊어져 버린 것이다. 자, 그럼 이제는 누가 왕위를 잇지? 방계의 여러 난쟁이가 술렁였다. 참나무 방패 소린이 숨졌으니, 이제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동등한 여러 명의 후보자가 생겼다. 그들이 서로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모두 침묵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같은 야망이 숨 쉬고 있었다. 왕의 죽음에 깊은 추모를. 전설로 남을 그의 여정에 축복을. 그가 이루고자 했던 의지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를. 한 난쟁이가 왕의 죽음을 추모하자 다른 난쟁이들도 질세라 왕을 위한 추모의 시를 바쳤다. 그리고 한편으로 후계자가 되고픈 간교한 속내를 담은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러던 중 한 난쟁이가 말했다.



 -그런데 아르켄스톤은 어디에 있나?



 정적이 흘렀다. 왕의 보석, 아르켄스톤. 순간 모두가 깨달았다. 아르켄스톤을 가진 자가, 에레보르의 새로운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어떤 난쟁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르켄스톤은 호빗이 가지고 있소.



 그 호빗.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그 호빗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왕이 유일하게 사랑하고 곁에 두던 좀도둑. 소린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기억하는 난쟁이라면, 아르켄스톤이 그 호빗에게 가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리는 없겠지. 호빗에게 아르켄스톤을 잠시 맡긴 것이든, 그가 아르켄스톤을 훔친 것이든,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호빗에게서 아르켄스톤을 빼앗을 것인가지.




 그 후로 일주일간 많은 난쟁이가 호빗을 찾아왔다. 어떤 이는 세밀하고 아름답게 세공된 값비싼 보석을 선물로 들고왔고, 어떤 이는 어마어마한 금화를 가져왔다. 어떤 이는 군대를 끌고 와 위협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샤이어의 백엔드보다 더 커다란 집을 지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호빗은 어떠한 제안에도 아르켄스톤을 내어주지 않았다. 난쟁이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과격한 어조로, 아르켄스톤은 어차피 난쟁이의 보석이니, 강제로 빼앗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주일간 호빗을 지켜본 결과로 미루어볼 때, 억지로 아르켄스톤을 뺏으려 하면 그 호빗은 죽음까지 불사하며 저항할 것이 분명했다. 비록 왕의 정식 비도, 드워프도 아니었으나 왕이 사랑하던 호빗을 그렇게 취급할 수는 없는 법. 난쟁이들은 곤란해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현명한 한 난쟁이가 호빗을 찾아가 간곡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왕의 보석을 자신들에게 넘겨주겠느냐고. 호빗은 한참을 고심하다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제 이름을 가장 먼저 알아내는 이에게 왕의 보석을 넘겨드리도록 하지요.



 호빗은 자신이 내건 조건이 쉬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드워프 후계자들에게는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난쟁이가 소린의 원정에 함께하지 않았다. 왕은 열두 명의 가신만을 데리고 외롭고 힘든 원정길에 나섰다. 그러니 그 여정에 참여했던 좀도둑의 이름을 아는 이가 있을 리가. 그들은 남은 열 명의 난쟁이들을 찾아가 호빗의 이름을 물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호빗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왕의 자리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둘 수는 없는 일인데, 호빗도 열 명의 난쟁이도 너무도 완고했다. 그들은 호빗이 난쟁이종족의 안위를 위협한다고 소리쳤다. 왕을 따르던 열 명의 가신들이, 자신들도 왕이 되려는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모함했다. 그리고 제각각 자신이 난쟁이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우기고,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하려는 자까지 등장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에레보르를 쓸쓸히 등지고, 호빗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조용히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왕의 무덤이었다. 그리운 이의 차가운 석관을 내려다보며, 호빗은 천천히 그 위에 엎드렸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냉기가 안쓰러워, 몇 번이고 대답 없는 관뚜껑을 쓰다듬었다.



 -당신의 말이 맞네요, 소린. 그들은 당신에겐 관심이 없고 당신이 이루어낸 결과물에만 욕심을 부릴 것이라고 했었는데, 정말 그래요.



 호빗은 가만히 관 위에 올려진 조그마한 화관을 바라보았다. 아르켄스톤은 그 화관 안에 있다. 소린의 장례식이 있던 날, 그곳에 올려두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죽은 왕을 찾아왔더라면, 쉽게 발견했을 것을. 호빗은 가만히 차가운 관 위에 볼을 맞대었다. 미망인(未亡人). 몇몇 난쟁이들은 호빗을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그 말속에 조롱의 뜻을 담았겠지만, 호빗은 그 단어가 자신에게 꼭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고인을 영원히 잊지 않는 존재. 자신이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죽기 전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왕을 잊지 못하겠지. 그러나 이제는 누가 그 호빗의 이름을, 왕처럼 사랑스럽고 다정하게 불러줄 것인가. 호빗의 감은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 왕의 석관 위에 떨어졌다. 눈물로 흐려진 호빗의 눈에 조금 시들은 화관의 꽃이 비쳤다. 새 화관을 준비할 때가 되었군. 그가 화관을 집어 들었을 때, 호빗은 그 안에 있던 아르켄스톤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누가 가져갔지? 호빗은 의문에 빠졌다. 누군가 아르켄스톤을 발견했다면, 왜 그는 자신이 왕의 후계자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의문에 빠진 호빗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뒤쪽에서 답변이 들려왔다. 철산의 난쟁이였다.



-왜, 아르켄스톤을 발견했으면서 침묵했나요.

-아직 당신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침착하게 대답하는 난쟁이의 목소리는 소린과 조금 닮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었지. 소린은 자신과 필리가 아닌 다른 난쟁이가 왕이 되어야 한다면,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이 난쟁이일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이 옳았다. 다른 후계자 후보 누구도 찾지 않았던 왕의 무덤을 유일하게 찾아와, 아르켄스톤을 발견한 난쟁이. 그가 에레보르의 새 주인이 되어야 마땅하겠지. 빌보는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왕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숨겨뒀던 왕의 보석을 마땅한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새로운 왕은 즉위식이 끝나면, 왕의 보석을 소린의 관속에 함께 넣어두겠다고 호빗에게 약속했다. 소린이 평생 품고 있던 아르켄스톤을 향한 회한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호빗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새로운 왕은 분명 현명하게 에레보르를 통치할 것이다. 호빗은 이제 걱정 없이 에레보르를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떠나려는 호빗에게 새로운 왕이 물었다.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왕을 잊을 것인가?

-그런 일은 제게 영원히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호빗의 대답을 들은 새로운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왕의 미망인이군. 자, 미망인이시여. 그대의 진짜 이름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호빗은 가만히 서서 에레보르를 한눈에 가득 담고, 천천히 뒤돌아서며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샤이어의 호빗, 빌보 배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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