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오만과편견AU (5)
샤이어는 다시 조용하고 평화로워졌다. 근처 오래된 숲에 머물던 엘프들도 머크우드로 돌아갔으며, 드워프들도 에레보르로 떠났다. 스마우그도 없었으며, 간달프마저 리벤델에 볼일이 있다며 샤이어를 잠시 비웠다. 빌보는 평화로운 일상을 사랑하는 호빗이었지만, 요즘은 왜인지 불쑥불쑥 뭔가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메리와 피핀이 장난을 치다 나란히 나무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는 정도의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친구 김리로부터 초대편지가 왔을 때, 메리와 피핀은 자신들의 부상이 얼마나 큰일인지 뼈저리게 후회했다. 김리는 호빗들을 전부 모리아로 초대했지만 메리와 피핀은 자신들이 가지 못한다면 프로도와 샘도 갈 수 없다며 생떼를 부렸다. 그렇다고 초대를 거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빌보가 조카들을 대신해서 혼자 모리아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드워프들이 보내준 조랑말을 타고 빌보는 모리아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빌보가 모리아에 도착했을 때, 김리와 그의 아버지 글로인이 마중나와 뜨겁게 그를 환영해주었다.
" 당신이 바로 그 빌보 배긴스로군. 모리아에 온 걸 환영하네. 나는 글로인이고 이쪽은 나의 아들 김리라네."
빌보가 조랑말에서 내려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빌보에 대해서 알고 있는게 김리가 아니라 글로인이라는 사실이 의아하긴 했지만, 빌보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 부자 드워프는 빌보를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갔다. 결과적으로 모리아에서 빌보는, 브리에서보다 더 많은 드워프들을 만나게 됐다. 난쟁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유쾌하고 호탕한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거칠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빌보는 그들 모드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글로인의 집에서 머무른지 삼일쯤 지나서, 빌보는 모리아의 영주 발린의 초대를 받았다. 빌보는 자신의 코트가 더러워졌다는 사실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그 차림으로 이미 난쟁이의 왕족을 만난 적도 있었기에 그대로 발린을 방문하기로 했다. 발린은 빌보가 만나본 어떤 난쟁이보다도 다정하고 친절한 난쟁이였다. 빌보는 그의 현명하고 유쾌한 말들이 마음에 들었다. 발린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다고 했다. 발린은 빌보가 다음 날 저녁까지 머무르며 그의 동생을 만나기를 원했다. 빌보는 흔쾌히 발린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 발린의 동생 드왈린이 돌아왔다. 그리고 드왈린의 옆에는 빌보도 아는 낯익은 난쟁이가 함께 있었다.
" 소린? "
빌보가 놀라며 큰소리로 소린의 이름을 불렀다. 반면 소린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이,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빌보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 오랜만이군. 조카들은 잘 지내고 있나 빌보 배긴스."
"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메리와 피핀이 발목을 삐기는 했지만, 만약 그 애들이 다치지 않았다면 모리아를 들쑤시고 다녔을거예요. 킬리와 필리는 함께 오지 않았나요? "
빌보가 두리번 거리며 소린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마찬가지로 그애들이 왔다면, 모리아가 이렇게 조용하지 않았겠지."
빌보와 소린이 대화하는 동안 발린이 놀랍다는 듯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 아! 빌보가 바로 그 호빗이었군."
하지만 소린이 발린을 무섭게 잠시 노려보자, 발린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곧 저녁이 되었다.
빌보는 드워프들의 투박한 요리는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노래만큼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식사를 마치고 드워프들이 신나고 떠들썩한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구는 동안 드왈린이 빌보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브리에서의 소린은 어땠나 호빗. "
빌보는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였기에 소린이 자신과 드왈린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돌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재수없는 난쟁이라고 생각했죠."
빌보의 말에 소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고, 드왈린은 목젖이 보일정도로 호탕하게 웃어댔다.
"제가 춤 신청을 했더니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건 최악이며 거절하더라구요. 제가 얼마나 무안했을지 아시겠죠?"
빌보의 말을 들던 소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빌보에게 다가와 말했다.
" 나는 원래 낯선이들과 쉽게 웃고 떠드는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빌보가 유쾌하게 소린의 말을 맞받아쳤다.
"호빗은 원래 집을 떠나기를 싫어하죠. 하지만 난 지금 샤이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모리아에 와있잖아요? 당신도 노력이란 걸 좀 해보는게 어때요?"
소린의 말문이 막혔다. 드왈린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직도 배를 잡고 웃고있었다. 무안해진 소린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하자 드왈린이 소린을 향해 드워프어로 뭔가를 말했고, 소린은 주먹으로 드왈린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그런데도 드왈린은 뭐가 재밌는지 웃으면서 빌보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서워보이는 외모와 달리 웃음이 많은 드워프였던 모양이다. 그 저녁 이후로도 빌보는 이틀에 한번 꼴로 발린의 초대를 받았으며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발린은 빌보가 아예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기를 바랬지만, 빌보는 글로인의 집에서 보이는 모리아의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기 떄문에 발린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빌보가 글로인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소린은 몇 번이나 빌보를 찾아왔다. 하지만 소린은 그때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빌보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식사도 하지 않고 돌아가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빌보가 모리아 주변 숲을 산책하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산책을 나왔던 드왈린을 만났다. 빌보는 드왈린과 함께 숲길을 산책하며 수월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소린과 먼 친척이자 친구라면, 필리와 킬리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겠군요."
"물론이지. 그애들이 기어다닐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내가 그 애들의 놀이상대가 되어주고 있다네."
"그들은 좋은 삼촌들을 뒀군요."
좀 더 깊은 숲으로 들어서며, 빌보와 드왈린의 대화는 자연스레 소린에 대한 화제로 흘러갔다.
" 소린은 그애들에게 삼촌이라기보다는 아버지같은 느낌이지."
" 오.. 맞아요. 그래 보이더군요."
" 그가 브리에서도 조카들을 과하게 챙겼던 모양이군. 그들의 결혼문제는 소린이 언제나 고심하는 것중에 하나야."
빌보 역시 남들로부터 프로도의 결혼문제에 너무 관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지라, 소린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들이 정말 잘되기를 바라니까요."
빌보의 말에 드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대로 교양있고, 기품있는 드워프신부를 얻는 건 쉽지 않은일이야. 필리와 킬리는 그러다가 노총각으로 늙어버릴지도 모르지. 소린이 호빗과의 결혼풍습을 조금만 덜 싫어한다면 일이 한결 수월해질텐데."
"그가 호빗과 난쟁이의 결혼풍습을 싫어하나요?"
"기품없는 풍습이라고 생각하지."
드왈린의 말에 빌보가 걸음을 멈췄다. 드왈린이 빌보를 돌아보자, 빌보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 왜 기품이 없다는거죠? "
"글쎄.. 확실한건 필리가 어떤 호빗과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돌자마자 짐을 싸서 에레보르로 돌아올 정도로 그가 이종족과의 결혼을 싫어한다는 점이지."
"어떤 호빗이요? 그 호빗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나요?"
"글쎄.. 내가 듣기로는 그 호빗의 가족들이 문제였다고 하던데. 나도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네."
빌보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빌보는 드왈린에게 몸이 안좋아서 더 이상 산책을 계속할 수 없겠다고 말하고는 오던 길을 돌아갔다. 빌보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얽혀왔다. 빌보는 거의 뛰다시피 숲을 가로질러 자신이 머무르는 방으로 들어왔고, 뜻밖에도 그 방안에서 소린이 빌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빌보 배긴스."
소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빌보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빌보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소린을 바라보았다. 빌보는 방까지 너무 서둘러서 돌아온 탓에 아직도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빌보의 숨소리가 안정이 되자, 소린이 빌보를 향해 다가와 말했다.
" 난 그동안 혼자 헛된 노력들을 해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내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더군. 빌보. 난 너를 만나기 위해 모리아로 왔다. 분명 이 결정은 모든 난쟁이들을 동요시키겠지. 내 가족과 친지들은 아마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샤이어의 호빗은 두린왕가의 결혼상대로 너무도 열등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
소린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쉴틈없이 말을 내뱉었고, 빌보가 억지로 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잠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 할수가 없는데요?"
"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새 너무도 열렬하게."
소린의 고백에 빌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린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진지했다.
"나의 청혼을 받아들여주겠나?"
빌보는 자신이 당장 기절한다고 해도 아무도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휘청거리다가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애써 똑바로 지탱하며, 빌보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음.. 소린. 그동안 그렇게 고통스러운 고민을 했다니, 안됐군요. 하지만 부디 고의로 그런게 아니라는 걸 믿어주세요."
"무슨 뜻이지? 그건 지금 내 청혼을 거절한다는 의미인가?"
소린의 말에 빌보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 아마.. 금방 잊을 수 있을거예요. 당신말대로 난 그저.. 호빗일 뿐이니까요. 열등한."
소린이 잔뜩 분노에 찬 얼굴로 빌보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고작 이딴 대답을 받으려고 그동안 그렇게 고민했다니. 도대체 뭐 때문에 내가 이렇게 예의없는 거절을 받아야 하는거지?"
빌보 역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어떻게 그렇게 무례한 청혼을 할 수 있죠? 열등하다니,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호빗에게 뭐하러 청혼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럼 내가 호빗과 결혼하면서 감사해하기라도 해야하나?"
"세상에."
빌보가 아연실색하며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필리와 프로도의 사이도 억지로 갈라놓은 건가요?"
빌보의 말에 소린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 갈라놓아? 내 조카들의 뜻과 상관없이 에레보르로 일찍 떠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서로 사랑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더군.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
"어떻게 그렇게 제멋대로일 수 있죠? 필리가 자기 입으로 프로도와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던가요?"
"그럼 프로도는 필리와 결혼하고 싶다고 네게 말한 적이 있었나!"
소린의 말에 빌보의 말문이 막혔다. 소린의 말이 옳았다. 틀린말은 아니었으나, 빌보의 기분을 나아지게 할만한 발언도 아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빌보가 입을 열었다.
"스란두일님의 말대로 난쟁이란 정말 꽉 막힌 종족이군요."
스란두일의 이름이 빌보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소린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스란두일? 요정에 대해 관심이 많군. 빌보 배긴스."
"..자신이 받아야 할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한건 대단한 불행이니까요. 호빗들은 남들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죠."
"불행? 정당한 몫이라고? 웃기지도 않는군! 호빗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일들을 쉽게 떠들어대는 종족이었나 보군."
"소린!"
"모든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도 부디 그 쓸데없는 오지랖에 대해 후회하질 않길 바라네 호빗."
소린의 빈정대는 말투에 빌보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난쟁이 왕족의 청혼방식이란 건 상당히 불쾌하군요."
빌보의 말에 소린이 움찔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소린은 더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빌보만이 중얼거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용의 청혼이 덜 불쾌했던 것 같네요."
소린의 눈빛이 다시 한 번 번뜩였다.
"..그만하면 됐다 호빗. 이미 충분히 나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알았으니 그만하도록 하지. 잘 지내게."
소린은 그대로 큰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빌보의 방을 떠났다. 소린이 나가고나서야 빌보는 자리에 쓰러지듯이 주저 앉았다. 많이 놀랬는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세상에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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