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오만과편견AU (6)
그 날로부터 사흘 동안, 빌보는 열이 올라 침대 위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질 못했다. 그리고 열이 조금 가라앉을 무렵, 발린이 빌보를 찾아왔다. 발린은 빌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향이 좋은 차를 몇 가지 종류 챙겨다주었다. 타지에서 마음도, 몸도 안 좋은 상태로 고생하던 빌보는 발린의 호의에 깊이 감사했다. 발린이 가져온 차를 나누어 마시며 발린이 말했다.
"소린은 난쟁이 중에서도 유독 성격이 무뚝뚝하고 거친편이지. 다소 오만해보이기도 할거네."
뜬금없이 발린의 입에서 나온 소린의 이름에 빌보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빌보는 찻잔 손잡이를 쭈뼛쭈뼛 만지며, 발린의 눈치를 살폈다. 빌보가 아무리 발린을 힐끔거리며 곁눈질로 쳐다봐도, 발린이 소린의 청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발린은 언제나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노련하게 자신의 속내를 감춰왔다. 어찌됐건 그는 빌보와 소린사이에 있던 일에 대해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빌보의 반응은 무시한채 난쟁이들의 과거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빌보는 마치 어린시절 요정이야기를 듣던 자신의 어린시절처럼, 두 눈을 빛내며 발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다만 신비롭고 아름답던 요정들의 이야기와 달리 어두운 이야기였지만. 빌보는 서서히 발린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의 찬란했던 왕국에 대해서, 그리고 용 때문에 하루 아침에 고향을 잃은 난쟁이들이 겪어온 고난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슬픔을 겪었는지,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동족의 죽음을 봤는지. 그리고 난쟁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군대를 돌리던 요정의 모습이 소린에게 얼마나 큰 절망과 증오를 가져왔는지. 그리고 다시 고향을 되찾기 위해서 소린이 얼마나 괴로운 시간들을 겪어야했으며, 그렇게 힘겹게 에레보르를 탈환했을때 그가 느꼈을 환희와 감동이 어땠을지에 대해서.
발린의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빌보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달아올랐다. 요정과 난쟁이 사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저런 말들을 떨었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소린에게 달려가 자신이 했던 발언들을 전부 취소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린이 빌보와 호빗을 향해 던졌던 무례한 모욕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발린은 자신이 너무 오래 머무른 것 같다며, 빌보의 쾌유를 빌며 모리아로 돌아갔다. 발린이 떠나고 빌보는 다시 조용한 방안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머릿속에서 소린이 했던 모욕과, 그들의 고향에 대한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샤이어.. 에레보르.. 샤이어. 빌보는 갑자기 샤이어가 미친듯이 그리워졌다. 몸이 다 나으면 최대한 빨리 샤이어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빌보가 샤이어로 돌아가기 전에, 샤이어의 호빗들이 모리아로 찾아왔다.
메리와 피핀, 샘과 프로도까지! 작고 시끄러운 호빗들을 모리아까지 데려오느라 간달프의 얼굴은 반쪽이 다되어있었다. 불쌍한 간달프. 얼마나 힘들었을까. 빌보는 까치발을 들어 간달프를 위로하듯이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반갑게 자신의 조카들을 맞이했다. 특히 프로도를 보니 여러가지 미안한 감정이 솟구치는 바람에, 프로도는 그의 삼촌의 품에 평소보다 오랫동안 꽉 안겨 있어야만했다.
간달프의 옆에는 빌보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인물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아라곤이라고 했다. 그는 빌보를 향해 몸을 숙여 인사를 건네며, 이름보다는 성큼걸이라는 별명으로 불러달라 요청했다. 그는 사정상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고 했는데, 모리아에는 하루정도만 머무르고 곧 머크우드로 가야 한다고 했다. 머크우드! 빌보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요정들과 요정들이 사는 숲을 보는 것이 빌보의 오랜 꿈이었다. 그런 빌보의 유별난 관심을 눈치챈 아라곤은 웃으며 빌보를 향해 머크우드로의 동행을 제안했다. 빌보의 작은 조카들은 이제 막 도착한 모리아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라곤의 인품에 대해서는 간달프가 보장했지만, 빌보 혼자서 잘 모르는 이와 동행하기에는 머크우드는 지나치게 멀었다. 빌보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 말했고, 바로 그날 저녁식사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어색함이나 두려움보다는 요정의 숲을 보고싶은 마음이 더 컸다. 게다가 머크우드에 가면 샤이어의 오래된 숲에서 잠시 만났던 스란두일을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김리가 그 결정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김리는 테이블을 부술듯한 기세로 포크를 쥔 손을 내리치며 말했다.
" 난쟁의 친구이자 손님을 그런 위험한 곳으로 보낼 수 없네!"
김리의 말에 따르면 빌보는 아직 김리의 집에 방문한 손님이었으며, 열이 내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망할 요정들의 땅으로 보낼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라곤이 엉뚱한 제안을 해왔다.
" 그럼 자네가 보호자 자격으로 함께 가는 것은 어떻겠나?"
"뭐라고?"
"마스터 배긴스도 나와 단둘이 가는 것 보다는, 친숙한 난쟁이가 함께 해주는 편이 훨씬 즐거울테지."
아라곤과 눈이 마주치자 빌보가 멎쩍게 웃었다. 물론 김리는 난쟁이가 요정들의 땅을 방문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는 정이 많은 난쟁이였으며, 그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빌보와 무척이나 친해진 상태였기에 결국 빌보를 위해 머크우드로 가는 여행길에 동행해주기로 했다. 단 자신은 요정의 숲으로는 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걸 잊지 않았다.
불행히도, 김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둠 숲의 안쪽까지 들어가 기어코 요정들을 만나야 했다. 어둠 숲의 입구에서 요정왕의 아들인 레골라스가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친히 빌보와 일행들을 전부 안으로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스란두일은 자신의 숲을 찾아온 샤이어의 호빗을 알아보고, 성대한 환영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들이 준비해준 많은 음식들과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빌보는 행복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역시 빌보는 요정들과 그들의 숲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머크우드는 빌보의 상상과 약간 다르긴 했지만, 그들은 너무도 친절했기에 빌보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씩 자신에게 청혼하던 날의 소린의 목소리가 불쑥불쑥 떠올랐다. 전혀 생각날 것 같지 않은 시간대에 갑자기 떠오르는 소린의 얼굴과 목소리는 빌보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빌보는 애써 머릿속에서 그 날의 언쟁에 대해 지워버리려 노력했고, 계속 즐거운 기분으로 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일주일째 되던 날 김리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김리는 요정들의 음식은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다고 불평을 내뱉으며, 빌보에게 말했다.
"여기서 머지 않은 곳에 에레보르가 있으니, 그곳을 방문하면 어떻겠나. 미스터 배긴스."
에레보르라는 말에 빌보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발린에게 이야기를 들은 뒤로부터 빌보는 매일같이 에레보르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소린을 다시 만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뒤이어 김리가 내뱉은 말들은 빌보를 안심시켰다.
"물론 아쉽게도 소린전하는 에레보르에 없을테지만.."
" 그가 성에 없다구요? "
"하지만 필리와 킬리는 있을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
빌보의 눈빛이 또다시 호기심에 흔들렸다. 소린이 없다면, 에레보르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담는 것도 좋을 것같았다. 하지만 호빗이 왔다 갔다는 걸 알게 된다면 소린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빌보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당장 내일 아침에 떠날 생각인데 같이 갈 텐가?"
"좋아요."
그리고 결국 빌보의 호기심이 또 한번 그를 낯선 곳으로 이끌고야 말았다.
에레보르. 그 높은 산과 웅장하고 거대한 왕국을 먼발치에서 바라 본 순간부터 빌보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에레보르왕국의 안으로 들어서자 빌보의 놀라움은 더욱 더 커졌다. 산속 깊은 곳까지 펼쳐진 아름답고 멋들어진 난간과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보석들.
'맙소사. 내가 이 곳의 안주인이 될 뻔했다니'
그 아찔한 상상에, 빌보는 어지러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김리는 빌보의 반응을 보자, 뿌듯함에 우쭐거렸다.
"어떤가? 요정들의 숲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위대한 우리의 왕국이."
과연. 난쟁이들이 자신들의 왕국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빌보가 아찔한 난간을 걸으며 왕국의 아래를 내려다보자, 광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리, 저 아래 쪽을 내려가봐도 될까요?"
그러나 김리는 어느새 자신의 친구를 만나 반가운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에레보르 안에는 많은 난쟁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은 외부에서 온 호빗에게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호빗은 이제는 낯선 존재가 아닌 모양이었다. 자유롭게 이곳 저곳을 구경해도 상관 없을 것 같은 분위기라, 빌보는 김리를 방해하지 않고 혼자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천천히 왕궁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빌보는 계속되는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아주 작은 곳 하나하나까지 난쟁이들의 세심한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아름다운 왕국을 되찾고, 재건한 왕이 자신이 봤던 그 소린이라고 생각하니 빌보의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런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었다니. 빌보는 그의 무례함을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난간이며 손잡이 등을 구경하다던 빌보는 자신이 어느새 너무 깊은 곳 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다란 복도를 두고, 어느 쪽으로 가야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갈 수 있을지 빌보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런 빌보의 맞은 편에서 누군가의 발자국소리가 들리자 빌보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물었다.
"저기요, 길을 좀 묻고 싶은데요?"
그리고 상대방의 보자마자 빌보는 속으로 비명을 지를수 밖에 없었다. 빌보가 길을 물은 상대는 소린이었다. 소린 역시 적잖히 놀랐는지 그답지 않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빌보를 바라보았다. 빌보는 헉하고 숨을 들이키며 그대로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린이 다급하게 빌보를 불러세웠다.
"빌보 배긴스!!"
소린의 목소리에 멈춰선 빌보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돌아섰다.
"빌보.. 어떻게 여기에.."
"아 저는.. 그저.. 김리를 따라서.... 당신이 없다길래.. 아니, 주인 없는 왕국에 오려는 건 아니었구요.. 그러니까..저는 어.. 죄송해요."
빌보는 거의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사과의 말로 문장을 마무리지었다. 그의 청혼은 거절해놓고, 이제와서 자신의 왕국을 방문해서, 그것도 왕궁 깊은곳까지 혼자 들어온 자신을 소린이 뭐라고 생각할지. 소린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빌보는 두려워졌다. 당장 자신에게 화를 내며 성벽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빌보는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소린의 표정을 살폈다. 소린의 얼굴을 올려다 본 빌보는 순간 놀라서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소린이 빌보를 향해 다정한 눈빛으로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헛것이라도 보나 싶어서 빌보는 몇 번이나 눈을 꿈뻑거렸다. 소린은 당장 꿀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빛으로 빌보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천천히 빌보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동안 잘 지냈나 빌보?"
헛것이 아니었다.
빌보가 눈을 몇 번이나 끔뻑이며 다시 보았지만 소린의 미소는 헛것이 아니었다. 비웃음이 아닌 소린의 웃음을 본 것은 아마도 처음인 듯했다. 빌보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간질간질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소린의 인사에 답했다.
"네 물론이죠. 전 아라곤과 함께 여행 중이었어요. 아, 김리도 함께요."
"여전히 호빗치고는 꽤 여행을 좋아하는군."
"그런 편이라고 할 수 있죠. 아, 전 내일 다시 머크.. "
빌보는 내일 다시 어둠 숲으로 돌아가 아라곤을 만날 거라는 말을 꺼내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소린의 앞에서 요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소린은 눈치를 챘는지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굳이 화를 내지 않고 여전히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빌보를 향해 말했다.
"에레보르는 충분히 둘러보았나?"
"그럼요! 음.. 이곳은..아주 좋아요. 멋진 곳이에요."
빌보는 아직 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이 느낀 에레보르에 대한 감정에 대해 적당한 수식어를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빌보의 부족한 설명에도 소린은 충분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여전히 소린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빌보가 어색해 하며 가만히 그에게 잡혀있는 손을 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필리와 킬리도 지금 에레보르에 있겠군요?"
"물론. 그 애들은 지금 벌을 서는 중이네. 할아버지의 동상 근처에서 장난을 치다가 흠집을 냈거든."
"오, 이런. 그럼 그들이 벌을 다 받기 전에는 그들과 즐거운 재회를 할 수 없겠군요."
빌보 역시도 말썽꾸러기 조카들을 키우는 처지라, 그들이 잘못했을 때 벌을 주는 일에서는 절대 양보가 없었다. 소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서 머무르기로 했나?"
"아마 김리와 함께 머무를 텐데,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길을 잃고 헤매던 중이었거든요. 솔직히 그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네요."
"두 사람이 머무를 만한 방을 내어주지.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곳에서 여행의 피로를 풀고, 내일 필리와 킬리를 만나는 게 좋겠군."
"오, 당신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미스터 소린."
소린은 빌보를 그가 머무를 수 있는 손님용 방으로 안내했고, 사람을 시켜 김리를 그쪽으로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 끝까지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빌보를 대접했는데, 그런 소린의 변화에 빌보는 적응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찾아온 김리 역시 소린을 보며 경악해 마지않았다.
"난쟁이 수염 맙소사. 내가 방금 본 게 우리의 왕님이 맞단 말이야? 도대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빌보."
"아무것도."
빌보는 크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신을 여전히 수상하게 바라보는 김리에게서 몸을 돌렸다. 소린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한 건 빌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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