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오만과편견AU(完)

[소린빌보] 오만과편견AU (7)



 "빌보!"

 "필리!킬리!" 


 빌보는 기뻐하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난쟁이의 포옹에 휘청거리다 뒤로 넘어질 위기에 처했다. 빌보는 잽싸게 중심을 잡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표현했다. 소린은 모리아에서도 만났지만, 필리와 킬리는 브리에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필리를 만나자 빌보의 머릿속에 불현듯 프로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빌보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이 필리가 프로도의 안부를 물어왔다.


 "프로도는 잘 지내고 있겠죠? 아, 물론 피핀과 메리 샘도요."

 "그들은 지금 모리아에 머물고 있어요."

 "모리아!"


 필리의 옆에서 킬리가 기뻐하며 날뛰었다. 킬리는 당장이라도 모리아를 찾아가서 다시금 작은 호빗들과 흥겨운 파티를 나눌 기세였다. 필리 역시 얼굴에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필리와 킬리는 그들의 삼촌을 향해 달려가 양팔에 매달려 자신들이 언제쯤 모리아를 방문할 수 있는지 묻고 졸라댔다.


 "너희가 일주일간 사고를 치지 않고 얌전히 있는다면 그때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건 전혀 문제없어요."

 "아주 쉬운 조건이네요."


 빌보는 그들의 모리아 방문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소린은 어느덧 빌보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소린이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모두를 식사장소로 안내했다. 식당으로 이동하면서도 김리의 의미심장한 웃음은 거두어지지 않았지만.



 에레보르에서 머무는 시간은 빌보의 예상보다 더욱 즐거웠다. 소린의 여러 가지 배려 덕분에 빌보는 샤이어에 대한 그리운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었는다. 에레보르의 모든 난쟁이들은 유쾌하고 친절했고, 빌보는 소린과도 이제는 제법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이어가던 빌보에게 어느날, 두 통의 편지가 전달되어왔다. 프로도에게서 온 편지였다. 빌보는 편지를 전해 받자마자 기뻐하며 자신이 에레보르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벽 근처로 달려갔다. 편지를 읽는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프로도의 편지를 뜯어서 읽던 빌보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굳어졌다. 

 첫 번째 편지에는 피핀이 모리아에서 사라졌다는 끔찍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좀 더 깊은 곳을 구경하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진 피핀이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는 구절을 읽자, 빌보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빌보는 떨리는 손으로 부랴부랴 두 번째 편지를 뜯어보았다. 빌보는 두번째 편지에 피핀을 찾았다는 소식이 적혀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은 더욱 참담했다. 피핀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가 모리아 깊은 곳에서 발록을 깨워버린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모리아 깊은 곳에서 지내던 난쟁이들은 모두 대피해서, 그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지 않을지 걱정하고있다고 했다. 간달프가 피핀을 찾으러 가기는 했지만, 프로도는 그가 과연 발록에게서 피핀을 구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오, 안돼 피핀... 간달프..." 


 빌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달렸다. 어서 모리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창백한 얼굴로 어디론가 달려가는 빌보를 발견한 건 소린이었다. 소린은 놀라며 빌보의 팔을 잡아 세웠다.


 "빌보, 무슨 일인가?"

 "모리아.. 모리아로 가야만 해요."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해보게." 


 빌보의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피핀에 대한 걱정으로 빌보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도, 빌보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패닉에 빠져있었다. 소린은 근처에 있던 시종을 불러 빌보를 진정시킬 포도주를 가져오라고 한 뒤에 천천히 빌보를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피핀이 행방불명되었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게다가 그 애가 아무래도 발록을 깨워버린 것 같다네요. 오.. 불쌍한 피핀. 내가 그 애를 두고 에레보르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발린과 간달프가 그 애를 통제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걸 진작에 알았어야 하는데."


 빌보는 급기야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소린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지금 모리아에서는 어쩌고 있다던가?"

 "간달프가 피핀을 찾으러 갔대요. 하지만 간달프 혼자서 어떻게 발록을 이기겠어요. 두 사람은 모리아 깊은 곳에서 죽어갈거에요."


 소린의 표정이 심각해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소린을 보자 빌보의 마음도 점점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모리아는 난쟁이들의 영역이었다. 피핀이 그곳에서 발록을 깨웠으니, 호빗에 대한 그의 감정은 더더욱 악화되겠지. 어쩌면 모든 난쟁이들이 요정보다도 호빗을 더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모리아로 떠나고 싶겠군."


 빌보는 하도 울어서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린은 아무 말 없이 빌보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에레보르에서 재회하고 소린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사건으로 모든 것이 끝장났다. 빌보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 김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리와 함께 모리아로 돌아가야겠지. 그리고 이제 다시는 소린과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안타까운 감정이 앞섰다. 그리고 김리를 찾아가던 빌보의 앞에 소린이 나타났을 때, 빌보는 마지막 작별인사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소린.."

 "이게 필요할 거야. 입어보게."


 소린의 손에는 웬 얇은 재질의 옷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천이 아닌 금속으로 만들어졌지만, 은색으로 빛나는 그것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이게 뭔가요?"

 "미스릴. 우리 종족들은 그렇게 불렀지. 모리아로 가는 길이 한결 안전해질 거네."


 그것은 무척이나 훌륭한 작별선물이었다. 빌보는 소린이 마지막까지 자신이나 호빗에 대해 저주를 퍼붓지 않고 정중한 손님 대우를 해주는 것에 감탄했다. 하지만 구구절절 감사의 인사를 건넬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빌보는 에레보르를 떠나며, 다시 볼 수 없는 난쟁이들의 왕국과 소린에게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김리는 빌보를 모리아가 아닌 샤이어에 데려다 놓았다. 빌보가 모리아로 간 다한들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빌보는 돌아오는 길 내내 몇 번이고 울음을 터뜨렸고, 그로 인해 거의 기절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에게는 안정이 필요했다. 프로도와 메리, 피핀도 샤이어에서 빌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도 엉망진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메리는 특히 피핀과 사이가 좋았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간달프와 함께 피핀을 찾으러 가겠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프로도와 샘이 애써 그를 달래서 샤이어로 와있었는데, 그렇지 않으면 행방불명된 호빗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빌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빌보가 탄 마차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빌보는 자신에게 달려와 울음을 터뜨리는 조카들을 끌어안으며, 참담한 기분을 애써 숨기고 말했다.


 "괜찮을 거야. 피핀도, 간달프도 무사히 돌아올 거란다 애들아."


 빌보는 그들을 위해 애써 위로를 건넸지만, 빌보의 머릿속은 다른 누구보다 복잡하고 참담했다. 그렇게 그들이 사흘 정도 샤이어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던 중, 모리아로부터 기쁜 소식이 도착했다. 가장 먼저 편지를 확인한 프로도가 빌보의 방문을 벌컥 열며 큰소리로 외쳤다.


 "삼촌! 간달프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어요!"


 힘없이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빌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빌보는 황급히 프로도가 들고 있는 편지를 뺏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천만 다행히도 간달프가 발록을 무사히 잠재웠으며, 피핀 역시 많이 지쳐있기는 했지만, 큰 상처 없이 무사히 구조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빌보는 아주아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체력이 회복되는 대로 샤이어로 돌아올 것이라 했다. 빌보는 다시 돌아올 두 사람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빌보가 우선 뭐라도 먹어서 기운을 차리는 일이 먼저였다. 빌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엌을 향했다.



" 빌보 삼촌, 피핀과 간달프가 돌아왔어요!"


 다음날, 메리가 부엌으로 달려 들어와 피핀과 간달프의 귀환을 알렸다. 빌보는 때마침 알맞게 구워진 생선을 꺼내 접시에 옮겨 담았다. 간달프의 불평 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왔다. 피핀은 모리아에서부터 계속되는 간달프의 호통과 잔소리에 이미 지친듯한 표정이었다. 빌보는 줄곧 피핀을 보게 되면 호되게 혼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피핀의 질려있는 얼굴을 보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빌보는 그저 피핀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그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저녁 식사를 할 때쯤이 되자, 피핀은 원래의 활발함을 되찾았다.


 "다들 발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한 번 봤어야 하는데. 아마 스마우그가 용 모습을 하고 불을 뿜는다고 해도 발록보다 무섭지는 않았을걸요?"

 "페레그린 툭."


 신이 나서 발록에 대해 떠드는 피핀을 향해 간달프가 짧게 주의를 주었지만, 피핀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며칠 동안을 모리아 깊은 곳에서 도망 다녀야 했어요. 다행히 숨을 만한 곳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죠. 다행히 기절하기 전에 간달프가 날 발견했고, 날뛰는 발록을 거의 무찌르긴 했지만, 발록이 다리 아래로 떨어지면서 간달프까지 끌고 내려갔지 뭐예요. 참나무방패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간달프는 지금쯤 이 자리에 없었을거에요."

 "뭐?"


 빌보는 놀라서 포크를 쥔 손을 멈추고 되물었다.


 "이런! 그가 말하지 말랬는데."


 피핀이 놀라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빌보는 피핀을 향해 돌아앉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린이?"

 "오.. 삼촌.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랬으니 비밀을 지켜줘요. 그가 모리아로 와서 나와 간달프를 도와줬어요. 발록을 무찌르는 데에는 그의 공이 컸다구요. 그런 걸 보면 그가 그렇게 나쁜 난쟁이는 아닌 것 같아요. 삼촌은 물론 그를 아주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겠지만."

 "소린이라고? 참나무방패 소린?"

 "쉿! 비밀이라니까요."


 빌보는 포크를 쥔 채로 멍하니 접시에 담긴 생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린이 피핀과 간달프를 구하러 모리아로 갔었다고? 빌보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그랬을 리는 없지만, 그가 자신을 위해서 그러한 선행을 베풀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자 빌보의 가슴속에 설렘이 가득 찼다.


 "빌보? 왜 생선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거에요."


 메리의 목소리에 빌보의 정신이 돌아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발록이 모리아에서 날뛴다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그곳에 사는 난쟁이들일 것이다. 소린은 빌보가 아니라 자신의 동족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과 수고를 무릅쓰고 발록과 맞섰을 것이 분명했다. 빌보는 잠시 들떴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금 식사에 집중했다.



 며칠 후 빌보가 여느 때처럼 신선한 채소와 생선을 고르기 위해 시장에 방문했을 때, 한 호빗이 빌보에게 말을 건네왔다.


 " 빌보 배긴스.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이요?"

 "브리에 드워프들이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군. 그때 그 두린의 왕족들 말이네."


 빌보는 떨리는 손으로 고르고 있던 당근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그 호빗에게 물었다. 


 "언제요?"

 "내일 도착한다고 하더군. 그의 조카들도 함께."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프로도를 살피자, 프로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빌보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서서 프로도를 이끌고 돌아섰다. 하지만 빌보의 표정은 명백하게 기대감으로 변해 있었고, 그것을 눈치챈 프로도가 잠시 고민하다가 빌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삼촌.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나와 필리는 정말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 혹시 제가 그를 향해 뭔가 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거나 그럴 거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면, 전 그들을 만나러 브리로 갈 수 없을거에요."


 프로도의 말을 듣자마자 빌보는 걸음을 멈추고, 온화한 표정으로 사랑하는 조카의 두 손을 잡았다. 


 "오, 프로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난 너의 의사를 존중한단다. 얘야."

 "삼촌..."

 "내가 너무 성급했었어. 이제는 더 이상 널 위한다는 핑계로, 네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재촉하지 않을 거란다. 넌.. 아직 너무 어리니까 말이야."


 빌보의 말에 프로도가 안심하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편한 마음으로 그의 친구들을 마음껏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프로도는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난쟁이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겠다며 시장을 돌아다녔고, 혼자 남은 빌보는 자신의 기대감이 필리와 프로도의 재회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빌보가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를 떠올리자 빌보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에,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시장을 뽈뽈거리고 돌아다니며 채소를 골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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