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Unkindness <5>
Unkindness
5.
빌보는 자신의 몸이 천천히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차라리 이대로 영원한 잠에 빠져 다시는 깨어나질 않기를 바랐다. 빌보의 염원을 신께서 들어주기라도 한 듯, 차갑고 어두운 연못의 깊은 곳으로 점점 가라앉으며 빌보의 의식 역시 천천히 흐려졌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빌보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 보이는 낯익은 자신의 방 풍경에, 빌보는 지독하게 이어지는 자신의 생명력이 원망스러웠다. 차디찬 날씨에 연못에 빠졌기 때문인지, 자신의 생명조차 놓고 싶어 했을 정도의 극심한 좌절감 때문이었는지. 빌보는 물에서 가까스로 구해지고도, 며칠 동안 생사를 오갔다. 온몸에 열이 펄펄 끓었고 정신이 몇 번이나 들었다가 사라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마다 오인이나 오리, 그리고 다른 난쟁이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7년 전 처음 에레보르에 왔던 그 밤도 꼭 이렇게 죽을 듯이 앓았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빌보의 곁에 아무도 없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빌보의 마음속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흐릿해져 가는 빌보의 시야에 몇 차례인가 헛것이 보이기도 했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의 얼굴이나 돌아갈 수 없는 그의 고향, 샤이어. 그리고 벌써 7년이나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았던 간달프의 얼굴.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차가운 옆얼굴. 소린 오큰쉴드.
빌보가 물에 빠지던 순간 그를 건져 올리던 강인한 손은 빌보도 잘 알고 있는 낯익은 손이었다. 예전에도 그가 죽을 것처럼 아팠던 순간에 그의 이마를 짚어주던 투박한 손. 그 손 하나에 기대어 힘겨운 나날들을 전부 버텨냈었는데. 그것이 소린의 손이 아니라 드왈린의 손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빌보를 살려준 것은 드왈린이었겠지. 왜 소린이 아니었던 걸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베개에 겨우 기대고 있던 빌보의 옆얼굴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심하게 잠겨 거의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빌보는 자신의 침대맡에 앉아있는 건장한 체격의 드워프를 향해 원망의 말을 힘겹게 뱉었다.
"왜... 맘대로.. 죽지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
"이럴때만 어설프게..... 날 동정할 거라면, 차라리 친절하게... 굴지 마세요."
내게 친절하게 굴지 말아요. 어차피 당신이 소린이 아니라면. 빌보는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어차피 빌보는 에레보르를 떠날 수도 없고,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소린이 변할 리도 없으니, 변해야 하는 건 빌보였다. 열에 들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동안, 결정했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전부 버리기로 했다. 예전의 씩씩했던 호빗은 이제는 죽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며칠 후 건강해져서 돌아온 빌보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호빗이었다. 물론 그는 예전처럼 난쟁이들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고, 그들에게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를 유지했다. 또한, 여전히 하루에 여섯 끼를 잘 챙겨 먹고, 수다 떨기를 즐겼으나, 그의 웃음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남의 감정변화에 둔한 난쟁이들마저 빌보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지 않다고 저들끼리 수군거릴 정도였다. 빌보의 입은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빌보는 완전히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것이었다.
또한 빌보는 최대한 왕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를 피해 다녔다. 왕의 심부름으로 받아왔던 서신은 빌보가 물에 빠졌을 때 온통 젖어버렸으나, 다행히 그대로 펼쳐 햇빛에 말리니 곧 원래의 글자가 돌아왔다. 빌보는 그 서신을 필리에게 부탁해 소린에게 전달토록 했다. 왕이 그 서신을 받고 뭐라 생각하건, 빌보는 자신의 임무를 그렇게 완수한 것이었다. 빌보가 왕을 피하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었다. 원래도 소린이 먼저 빌보를 찾는 일 따위는 없었으니, 그저 빌보가 먼저 그를 찾아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딱 한 번, 어쩐 일인지 처음으로 소린이 오리를 보내 빌보를 불러냈다. 왕은 빌보의 건강이 어떤지 살펴야겠다고 했으나, 빌보는 정중히 그의 명령을 거절했다. 실제로 빌보의 건강에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니까. 오리가 빌보의 말을 왕에게 그대로 전하자, 소린은 알겠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는 것은 소린이었다. 그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는지, 오리가 소린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신경 쓰지 말고 나가 봐."
오리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왕의 서재를 나섰다. 소린은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몇 번인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은 열 때문에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오리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긴 했으나, 벌써 그의 상태가 안 좋아진 것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무래도 오인을 불러 약이라도 가져오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소린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 소린의 어깨가 미세하게 흠칫 떨렸다. 빌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리의 말로는 그가 소린의 부름을 거절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들어오게."
소린이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자, 누군가가 그의 서재 안으로 커다란 몸을 숙이며 들어섰다.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들어서자 소린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뜻밖의 방문객은 빌보가 아니라, 7년 만에 에레보르를 찾아온 회색의 마법사. 간달프였다.
"그동안 잘 지냈나, 스라인의 아들이자 에레보르의 군주 소린이여."
"간달프."
소린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간달프를 올려다보았다. 간달프는 그런 소린의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돌아오는 것을 누구보다 반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간달프가 에레보르로 다시 찾아왔다는 것은 빌보를 데려가겠다는 뜻이었으니, 빌보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소린으로서는 간달프의 방문이 무엇보다 반가울 터인데.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고 수염을 쓸어내리며, 간달프는 자신에겐 너무 작은 난쟁이들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린이 어딘지 초조한 말투로 간달프를 향해 물었다.
"호빗의 누명이 풀린 것인가?"
"그건 아니네. 하지만 그를 샤이어에 조금 더 가까운 장소로 데려갈 생각이네."
"설마.."
"리븐델. 엘론드가 기꺼이 빌보를 자신의 땅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었네. 물론 자네는 기꺼이 허락해주겠지?"
호빗을 리븐델로 데려가겠다고? 소린의 얼굴에 미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간달프는 그런 소린의 표정을 뭔가 이상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왕은 잠시 생각을 거친 후에, 간달프에게 마지못해 답했다.
"그의 의사에 따르도록 하지."
"물론 그래야겠지. 빌보는 어디있나? 그와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빌보의 방 위치를 가르쳐주자, 간달프는 그 큰 키로 성큼성큼 빌보를 찾아 나섰다. 소린은 홀로 그의 서재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간달프가 방문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빌보가 요새 코빼기도 비치지 않을 때부터 어딘지 소린의 심기가 불편했다. 서신도 직접 가져오지 않고, 자신의 부름마저 거부하는 것은 그동안의 빌보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물론 빌보를 그렇게 만든 것은 소린 자신이었지만. 그가 원하던 대로 빌보는 씩씩하게 웃지도 않았으며, 소린을 주변을 알짱거리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도 많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거지.'
그에게서 모든 걸 빼앗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원하던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는데, 왜 계속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지. 소린은 그답지 않게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만지작거리는 왕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워 보였다.
7년 만에 빌보를 만난 간달프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빌보는 꽤 자라서 이제는 완전한 어른 호빗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마르거나 수척해지는 일 없이 건강한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간달프가 알던 사랑스럽고 행복한 호빗의 눈빛이 아니었다. 물론 빌보가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마냥 어릴 때처럼 세상의 어려움이라고는 모르는 눈빛을 가지고 있을 수야 없겠지만. 간달프는 빌보의 손을 마주 잡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이런, 빌보. 그동안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겐가. 혹 에레보르의 생활이 맞지 않았나?"
"아니에요, 간달프. 맹세코 그런 건 아니에요. 난쟁이들은 비록 말투나 행동은 거칠지만…. 내게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었어요. 7년 동안 전 아주 극진한 손님 대우를 받았죠."
"그럼, 자네의 고생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겠구만."
"......"
빌보는 이번에는 간달프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간달프가 건넨 담뱃대를 받아들고 말없이 담배만 뻐금거리며 피우자, 간달프가 신기하다는 듯이 빌보를 바라보았다. 마냥 아이로만 봤던 샤이어의 호빗이, 어느새 이렇게 성인이 되어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마법사에게 7년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호빗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그동안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빌보는 완전히 어른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기 전에 소린을 만났는데."
소린의 이름이 나오자 담뱃대를 쥔 빌보의 손이 흠칫 떨렸으나, 간달프는 그것을 보고도 모른척 해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빌보는 그런 간달프의 배려가 고마웠다. 아직은, 소린의 이름을 듣는 것이 괴로웠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넘길 수 있으려나.
"감기에 걸린 것 빼고는, 꽤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더군."
감기? 빌보가 고개를 돌려 간달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빌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눈치 빠른 마법사는 금방 알아채고는, 조금 전 복도에서 오리와 마주쳐서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빌보에게 알려주었다.
"오리의 말로는, 며칠 전 왕이 물에 빠진 쥐처럼 흠뻑 젖어서 나타났다고 하더군.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게야. 뭐, 소린은 난쟁이 중에서도 워낙 과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떠벌리지 않는 편이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
빌보는 놀란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담뱃대가 떨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간달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며칠 전의 일들이 혼란스럽게 뒤얽혔다. 설마, 연못에 빠졌던 자신을 구해준 것이 소린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때의 손은 분명-. 빌보가 딴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간달프가 빌보를 향해 다른 이야기를 건넸다.
"빌보, 나와 함께 떠나는 건 어떤가?"
"...."
"빌보?"
"아, 뭐라고 했죠. 간달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 되묻는 빌보를 향해 의미 모를 웃음을 지으며 간달프가 다시 한 번 빌보에게 제안했다.
"리븐델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네."
리븐델-. 빌보의 표정에 놀라움이 스쳤다. 리븐델이라면 샤이어와 조금 더 가까운 서쪽 지역이었다. 그리고 에레보르나 머크우드와는 달리 따뜻하고 편안한 공기가 가득한 요정의 땅. 간달프는 가만히 빌보의 대답을 기다리며 빌보가 떨어뜨린 담뱃대를 주워 물었다.
<계속>
소장단행본 수량조사가 진행중입니다.
위 글의 공지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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