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빌보] Unkindness 完.
Unkindness
完.
간달프가 느긋하게 빌보의 대답을 기다려준 덕분에 빌보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고민할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간달프를 따라 리븐델로 가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아픔은 없겠지. 소린의 한결같은 냉대와 차가움을 참고 견딜 일도, 그가 내뱉는 모멸 섞인 말들에 상처받을 일도. 그것은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리븐델의 군주는 소린보다는 조금 더 친절하겠지. 하지만 그곳에는 소린도 없겠지. 빌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빌보가 그렇게나 원하던 기회였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천천히 그를 잊어갈 기회.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간달프가 세 번째의 연초를 다 태웠을 때 마침내 빌보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아서 간달프에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간달프는 입가에 싱긋 미소를 띠며, 자네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신 겁니까."
오인이 별일이라는 듯 신기해하며 약을 지어 왕의 머리맡에 가져다주었다. 소린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오인을 향해 무어라 반박의 말이라도 할라치면 기침이 자꾸만 터져 나오는 바람에 꼼짝없이 그의 잔소리를 가만히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오인의 곁에서 자잘한 심부름을 하던 오리는 줄곧 안절부절못하고 그들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고 있었다. 소린은 그런 오리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 번 미간을 찌푸렸다.
오리는 일주일 전쯤, 왕이 흠뻑 젖어서 에레보르로 들어오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흠뻑 젖어있는 것은 소린 뿐만은 아니었다. 왕이 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홀딱 젖어, 정신을 잃은 빌보였다. 빌보를 데려다가 그의 방에 눕히고, 왕은 오리에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소린은 오늘 본 일을 누구에게도, 특히 빌보에게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오리는 빌보의 젖은 옷을 말려주고, 오인을 불러와 그의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반나절을 쏟았다. 겨우 빌보가 무사히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오리는 소린 역시 흠뻑 젖어서 돌아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왕의 방으로 달려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때 그가 여전히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우두커니 앉아있다는 사실에 오리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소린의 표정이었다. 오리는 한 번도 왕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만 바라보며 망연자실 앉아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인지는 몰랐으나, 오리는 왠지 이 사실을 빌보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소린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겠지. 오리는 고민만 하고,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자신이 한심스러워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간달프가 빌보를 데리러 왔다는 소문은 반나절도 안 돼 순식간에 온 에레보르 왕국 안에 퍼졌다. 누군가는 아쉬워했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아 했다. 빌보가 떠나는 것을 반기거나 좋아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붙잡을만한 난쟁이도 그리 많지 않았다. 7년 동안 에레보르에서 난쟁이들과 함께 섞여 지냈던 호빗의 존재감이란 딱 그만큼이었다. 간달프는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내일 아침에 떠난다고 했다.
소린은 오인이 지어준 약 덕분에 전보다는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으나, 여전히 기침을 달고 있었다. 발린이 오늘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워낙 단호하게 말하는 통에, 소린은 간달프의 작별인사도 그의 침대에서 들어야만 했다. 날이 저물자 모두가 각자의 잠자리로 들어섰다. 소린은 여느 때처럼 쉬이 잠들지 못하고 누워서 자신의 손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 손으로 빌보를 차가운 물 속에서 끌어냈었다. 소린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물에 빠진 빌보를 보았을 때, 소린은 무언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도 모르게 그를 구하러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자꾸만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는 빌보를 구해내서 안고 에레보르 안으로 정신없이 달려 들어오는 동안 소린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 따위를 생각할 겨를은 남아있지 않았다. 오리에게 빌보를 맡기고 자신의 방으로 터덜터덜 돌아오고 나서야, 소린은 깨달았다. 왜 그를 구한 거지? 그리고 소린은 금방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변명을 찾았다. 빌보는 어쨌든 손님이었고, 자신의 영토에서 손님이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빌보가 위험에 빠질 걸 알면서도 머크우드까지 심부름을 보냈던 것은 다름 아닌 소린이 아니던가. 소린은 이성에 배반하는 자신의 행동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7년 전에도 그랬었다. 빌보가 착각했던 것과 달리, 약초를 보내준 건 소린이 아니었다. 발린이 제멋대로 소린 몰래 귀한 약초를 빼돌렸고, 소린은 그것을 알고 크게 화를 냈었다. 발린은 자신이 드왈린을 시켜 그 약초를 몰래 호빗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빌보가 바로 죽었을 거라고 했지. 그딴 호빗이야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며, 소린은 발린에게 냉랭한 대답을 건넸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새벽, 불면증 때문에 이리저리 뒤척이던 젊은 왕은 무슨 변덕인지 아무도 모르게 호빗의 방을 찾아갔다. 소린은 그의 얼굴에서 좌절감을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의지할 대상을 잃어버린 호빗이 좌절에 빠지고 웃음을 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빌보의 방문에 들어서자마자, 소린은 자신이 확인하고 싶어 하던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드왈린과 발린이 왕실의 약초를 훔쳐다 먹인 덕인지, 그는 곧 죽을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꿈이라도 꾸는지, 빌보는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의 이름을 몇 번이나 잠꼬대로 내뱉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소린이 느낀 것은 어떤 승리감이나 도취감이 아니라, 동정이었다. 그리고 깊은 동질감. 소린은 아버지를 잃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그와 겹쳐보고 있었다. 소린이 가족을 잃은 괴로움을 혼자 온전히 견뎌야 했듯이, 이 조그마한 호빗도 온몸으로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소린은 저도 모르게 빌보의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잠꼬대를 멈추고 편안해 하는 빌보의 호흡에, 소린은 함께 안도했다. 그것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 아기 새처럼 기대 쌕쌕 고른 숨을 쉬는 작은 생물체가 왜인지 소린의 마음마저 편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날 밤 한순간의 변덕일 뿐이었다.
다음날 마주친 빌보는 씩씩했고, 예전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소린의 마음속에 잔혹하고 심술궂은 마음이 다시금 솟구쳤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를 더 괴롭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고, 그를 다시 좌절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로부터 7년 동안 소린은 자신의 행동을 되짚을 생각도, 이유를 찾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물에 빠진 빌보를 또 한 번 구해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마음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왜 그렇게 그에게 모질어야만 했을까. 그리고 이유는 생각보다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왜냐고? 그래야지만 빌보가 에레보르를 떠나지 않을 테니까. 그에게서 돌아갈 장소를 빼앗고 외롭게 만들면, 그가 그때처럼 자신의 손에 기댈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애 같은 독점욕이었다. 방향이 잘못된 애정. 그리고 그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소린은 침대에 누워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늦어버렸다. 이 차가운 밤이 지나면, 빌보는 간달프와 함께 리븐델로 떠나겠지. 그리고 다시는 에레보르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때 조용히 소린의 침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방으로 들어섰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소린은 그가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빌보 배긴스.
빌보는 가만히 소린의 침대맡으로 다가와 그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아직 미약하게 열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빌보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 순간 소린이 눈을 뜨고 일어나 빌보의 손목을 잡아챘다. 빌보는 숨을 들이켜며 놀란 눈으로 떨며 소린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일이라도 떠올린 듯, 불안해하는 빌보를 향해 소린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작별인사를 하러 온 건가?"
"목소리가 아직 쉬어있네요."
"...리븐델로 간다지? 요정의 왕은 나보단 친절한 사람일 테니 잘됐군."
빌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왕의 수척한 얼굴과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쓰리게 만들기라도 한 것일까. 빌보가 소린에게 잡힌 손을 잡아빼자, 소린이 잠시 움찔하며 그의 손을 놔주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빌보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할 거라 생각하며 소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빌보는 곧바로 소린의 손을 자신의 작은 두 손으로 감쌌다.
"요정의 왕이 아무리 친절하다 해도, 당신보다 친절하지는 않을 거예요."
"무슨 소리지?"
"7년 전에.."
빌보의 입에서 나온 7년 전이라는 단어에 소린이 잠시 흠칫 놀랐다. 빌보는 소린의 손을 다시 한 번 꽉 잡아 감싸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저 이어 했다.
"부모님을 잃고 좌절에 빠진 날 받아준 건, 누구도 아닌 에레보르의 왕이었어요."
"그건 간달프의 부탁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아플 때 약초를 보내줬던건요?"
"...그건 발린이 멋대로 가져간 거지."
갈라지는 목소리로도 퉁명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꼬박꼬박 내뱉는 난쟁이 왕의 고집에, 빌보는 슬쩍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아냈다. 소린 또한 자신이 지금 이렇게 빌보를 향해 말싸움을 걸 때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지만, 빌보에게 매몰차게 굴지 않고 말하는 방법 따위를 소린이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빌보가 소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내 이마를 짚어주었던 건요? 그것도 간달프나 발린때문이었나요?"
"...그건.. 그게 왜 나라고 생각하지..?"
"당신이 지금 아프니까요."
"뭐?"
빌보의 입에서 나온 엉뚱한 증거에, 소린이 당황하며 물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호빗이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감기에 걸려있기 때문인가. 소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게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날 물에서 구해준 게 당신이라고 들었어요."
"......오리."
소린은 자신이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비밀을 발설한 오리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빌보는 소린의 손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감싸 쥐며, 두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물에 빠진 날 구해준 그 손을 난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왜냐면 난 그 손 하나에 의지해서 지금까지 에레보르에서 버틸 수 있었으니까."
"......"
"소린. 그때의 그 작은 친절이 날 지탱해줬어요. 고맙습니다."
빌보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소린의 친절에 대해 감사했다. 그의 모든 말에 진심이 실려있었고, 그 진심들이 소린의 가슴에 와 닿아 그의 마음을 따끔따끔 찔러왔다. 감사인사를 받을만한 친절이 아니었다. 비록 빌보에게는 그 친절이 소중한 구심점이었다고 해도, 그 이상으로 빌보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 또한 소린이었다. 빌보가 천천히 쥐고 있던 소린의 손을 내려놓고 뒤돌아서자, 소린이 다급하게 일어나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븐델로 떠날 거라면, 샤이어로 돌아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소린."
"예전에…. 샤이어의 네 친척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한 적이 있었지. 네게 백엔드를 다시 돌려주고 싶다고 하더군."
"왜 내게 알리지 않았어요..?"
소린의 말을 들은 빌보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 충격에 빠져있거나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있겠지. 빌보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그가 그렇게 애타게 그리워하던 샤이어로 돌아갈 기회를 뺐었으니. 소린은 빌보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으며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소린이 대답을 하지 않자, 빌보가 다시 한 번 소린을 향해 물었다.
"내가 샤이어로 돌아가는 편이 당신에게 더 좋았잖아요. 그런데 왜.."
빌보의 목소리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어딘지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설렘을 품고 있었다. 소린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채고 놀란 얼굴로 빌보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걸까. 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도 이제서야 깨달은 자신의 행동들에 대한 이유를 내뱉기 시작했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뺏어야. 네가 날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소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 빌보의 고개를 들어 올리자, 빌보의 얼굴이 그의 눈에 가득 들어찼다. 빌보의 얼굴에는 예전과 같은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눈빛 가득 기쁨을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 소린의 가슴 한가운데서 찡하고 따뜻한 전율이 흘러넘쳤다.
'아, 내가 원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소린은 두 팔을 뻗어 빌보를 끌어당겨 꽉 안았다. 뻥 뚫렸던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가득 메우는 따뜻함이었다. 그리고 기쁨을 느끼는 것은, 빌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지독하게도 그를 괴롭히던 차가움과 외로움은 소린의 품에 안긴 순간 전부 사라졌다. 소린은 부서질 듯이 빌보를 끌어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지 말게. 어디로도 떠나지 말고, 이렇게 있어."
"이미 간달프에게는 대답했어요. 난 이제 친절한 내 왕님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빌보는 조심스레 작은 손을 뻗어 소린의 넓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제는 그래도 되는 것이다. 왕의 곁에 머물러서 왕이 힘들어할 때 그를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어줘도 되는 것이다. 샤이어도 리븐델도, 그 어떤 장소도 왕의 곁보다 따뜻하지는 못하리라.
<Fin>
소장단행본 수량조사가 진행중입니다.
위 글의 공지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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