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Hobbit)/런어웨이 피앙세(연재)

[소린빌보/연재] 런어웨이 피앙세 01

 

Runaway Fiance

 

  

1.

 


 

-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여 평생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까?

- 네 맹세합니다.

 

 집안의 장식품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텔레비전을 오랜만에 틀었더니, 드라마 주연 커플의 결혼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저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이 요새 핫한 배우라고 했던가. 반반한 얼굴에 탄탄한 몸매가 과연 누구나 좋아할 만하긴 했으나, 불행히도 연기력은 썩 좋지 않은 듯 어색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래 가지고야 곧 대중들에게서 잊히기 십상이지. 빌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행복한 신랑 신부, 그들을 축하하는 하객들, 화려한 의상을 입은 들러리들과 턱시도를 갖춰 입은 신랑. 하나같이 빌보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는 요소들이었다. 뻔한 드라마, 뻔한 장면, 뻔한 시나리오. 자신이라면 저런 뻔한 시나리오 따위는 쓰지 않았을 거라 자신하며, 빌보는 자신이 아직도 외투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

 그의 자신감은 꽤 근거가 있었다. 비록 드라마작가는 아니지만, 빌보는 나름대로 잘 팔리는 소설가였으니. 하지만 빌보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미친 제작진들은 적어도 영국 내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로맨틱한 요소는 조금도 없고, 오로지 음모와 살해와 모함뿐. 그리고 지금 그의 훌륭한 신작 스릴러 소설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요즘 들어 유난히 팬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싶더니만 기어코 어젯밤, 빌보의 6년 된 노트북이 유명을 달리했다. 물론 대부분 소설가들이 그러하듯이 빌보는 백업이라는 좋은 시스템을 등한시하는 태평한 예술가였다. 뭐, 요즘 같은 세상에 돈만 주면 수리 센터에서 노트북에 저장된 문서들을 복구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오히려 빌보는 담당에게 댈 핑곗거리가 생겼다며 들뜬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고 출판사로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느지막이 눈을 뜨고, 그동안 밀렸던 공과금이나 신문대금 등을 처리하고 평소 자주 가던 근처 카페에서 느긋하게 브런치를 즐겼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동료작가의 신간도 다 읽고, 오후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리 센터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들은 것은 노트북의 완전사망선고였다.

 

“이봐요. 누가 노트북을 완전히 되돌려 달라 했습니까? 그냥, 여기 저장되어있던 파일만 어떻게든 복구해달라니까요?”

“저도 그렇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하드가 완전히 망가져서요. 저희로서는 방법이 없네요. 죄송하지만, 새 노트북을 구매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자료들은 자주 백업해두시고요.”


 망할 자식. 지금 이 모든 사태가 평소에 백업을 하지 않은 내 탓이라는 거야? 빌보는 심드렁한 표정의 수리 센터 직원을 한참 노려보다가, 그래 봤자 이미 날아가 버린 그의 소설들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힘들게 납득하고 돌아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리 나쁘지 않던 기분이 급속도로 하강기류를 타고 내려앉았다.

 출판사에서는 줄기차게 전화가 오고 있었으나, 터치 한 번으로 수신 거부를 해버리고 스팸 번호로 등록하니 너무도 손쉽게 그들의 연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무책임해지는 것이 너무도 손쉬운 세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봤자 먹을 만한 것은 아무도 없을 테니, 레토르트 카레라도 사 들고 갈 요량으로 근처 슈퍼마켓에 들렀다. 하지만 막상 슈퍼마켓에 들어서니, 상심한 자신의 위장에 싸구려 카레 따위를 쑤셔 넣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계획에도 없던 채소들과 고체 카레, 카레용 고기 등을 잔뜩 사서 집으로 돌아왔으나, 막상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모든 것이 다 귀찮게 느껴졌다. 장 봐온 물건들은 대충 현관 근처에 던져두고, 외투도 벗지 않고 주황색 패브릭 소파에 늘어지듯이 주저앉아, 엄청나게 오랜만에 티비를 틀자 나온 것이 그 싸구려 로맨스드라마였던 것이다.

 

 모든 로맨스드라마를 싸구려라고 매도할 마음은 없었지만, 빌보가 로맨스를 싫어하는 건 그의 조카인 열두 살짜리 프로도도 알고 있었다. 특히 행복한 결혼식으로 끝나는 로맨스영화는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행복함을 가장한 결혼으로 엔딩을 맞이해봤자, 그들의 앞날에 다가올 결혼생활은 지옥이나 다를 바 없을 텐데. 작가들이 죄다 결혼이란 걸 해본 적 없는 작자들은 아닐지 몰라. 빌보는 외투를 옷장에 대강 구겨 넣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곰돌이가 그려진 꼬질꼬질한 티셔츠를 꺼내입었다. 무릎이 나온 트레이닝바지는 당연히 그것과 세트였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그런 영화도 있기는 했던 것 같다. 결혼식에서 주례가 시작되기도 전에 식장을 도망치는 신부라던가. 그리고 빌보는 씁쓸했던 6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 인상을 잔뜩 쓰고 자신의 곱슬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휘저었다.

 

 행복한 결혼식, 반짝이는 샹들리에로 장식된 조그마한 홀, 많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결혼을 편견 없이 축복해주러 기꺼이 방문한 친구들, 작지만 화려한 부케, 세상에서 가장 들뜨고 행복한 표정으로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빌보. 빌보의 반대편에서 무거운 문을 열고 빛을 등지고 나타난 빌보의 상대는 같은 동성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결혼은 법적으로 가능한 것이었고, 적어도 이 결혼식장 안에서 그들의 결혼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얼른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 나와 평생을 함께 걸어가겠다고 맹세해요. 빌보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약혼자를 향해 신뢰와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빌보가 사랑했던 그 남자는 그대로 뒤돌아서 영원히 그 결혼식장으로부터 달아나고 말았다. 

 빌어먹을 개자식.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냐고? 전혀. 그 결혼이 애정 없는 결혼이었냐고? 그것도 전혀 아니었다. 비록 3개월 만에 결정한 결혼이기는 했으나, 그들은 세상에서 둘도 없을 만큼 열렬히 사랑했고 서로가 충분히 결혼생활을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연인이었다. 그렇게 그 개자식이 떠나가 버리고, 빌보는 파혼의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빌보가 출판사 담당의 전화번호를 손쉽게 스팸 함으로 보냈던 것처럼, 그 역시 빌보의 연락으로부터 터치 한 번으로 무책임해질 수 있었겠지.


 그 후로 어땠냐 하면, 빌보는 어떻게든 그를 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괜찮은 사람이면 대시하거나 대시를 받아들였고, 연애가 조금이라도 진척된다 싶으면 저돌적으로 프러포즈를 건넸다. 그건 프러포즈라기 보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았고, 몇 명은 당황스러워하며 거절했지만, 몇 명은 기꺼이 빌보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 결혼 중에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한 사례가 있었다면, 지금 빌보가 이렇게 처량하게 홀로 카레에 들어갈 당근을 자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불행히도 빌보의 수많은 노력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빌보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혼식 날이 다가오기도 전에, 아니 결혼준비를 제대로 실행하기도 전에 그들이 수락했던 프러포즈를 거절의 말로 되돌려주었다.

 

- 빌보, 당신은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 당신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는 것 같아 보여.

 

 그들의 말에 단 한마디라도 반박할 수 있었다면, 한 번의 결혼 이력쯤은 빌보의 인적사항에 기록할 수 있었을 텐데. 바보같이 그, 혹은 그녀들의 말에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던 빌보 배긴스였다. 그게 6년 전 실패했던 그 결혼상대자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어서는 아니었지만, 그의 책임이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PTSD였다. 그때 도망가버린 약혼자는 빌보에게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남긴 셈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얄팍한 호감으로 결혼을 하려 했으니, 제정신이 박힌 상대라면 당연히 빌보와 결혼을 하지 않았겠지.

 

 지이이잉-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빌보의 휴대폰으로 줄기차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당근을 썰던 식칼을 내려놓고 소파 옆에 대강 내팽개쳐두었던 휴대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니, 전혀 보도듣도 못한 낯선 번호가 떴다. 담당을 비롯해 빌보가 아는 출판사 사람들의 번호를 죄다 수신 거부했더니 아예 빌보가 모르는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기로 한 모양이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그때는 번역팀 직원 레이첼의 휴대전화를 빌렸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누구의 번호 일라나. 디자인부서의 헨리? 로맨스소설 담당팀의 소피아? 그것도 아니면 출판사 건물 맞은편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휴대폰을 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번호가 누구의 번호인가는 빌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받지 않을 테니까.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은 카레에 우유를 들들 부어, 빌보가 가장 좋아하는 순한 맛으로 카레를 만들어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따뜻한 우유를 넣은 밀크티를 또 큰 머그컵으로 잔뜩 마셨다. 노트북이 없으니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별로 관심도 없는 축구팀의 경기를 보며 맥주도 반 캔쯤 마셨지만, 맥주는 그다지 빌보의 취향이 아니라 남은 맥주를 싱크대에 미련 없이 쏟아버렸다.

 

 과식을 한 탓인지, 아니면 우유를 너무 많이 섭취한 탓인지, 빌보는 밤새 몇 번이고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느라 잠을 설쳤고 새벽부터 옆집 개가 미친 것처럼 짖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잔 시간은 불과 3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가의 집을 방문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오전 9시부터 누군가 빌보의 집 대문을 가열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쾅쾅쾅!


 빌보는 괴로워하며 베갯속으로 머리를 파묻고, 부디 저 반갑지 않은 방문자가 금방 포기하고 떠나주기를 기도했으나 오늘의 눈치 없는 방문자는 인내심도 갖추고 있었다. 줄기차게 문을 두드리는 걸 보니,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빌보의 출판을 담당하는 해밀턴이 결국 빌보의 집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빌보는 마지못해 침대 위에서 힘들게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인지, 무슨 용무로 방문했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해밀턴, 다 좋은데 소설가의 집을 찾아오기에 열 시는 너무 이르지 않아요?”

“......”


 해밀턴은 40대의 노련한 담당자였다. 그렇게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디 하나 모난 데 없는 평범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는 그럭저럭 무난하게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난한 결혼 이후, 그의 배는 점점 불러와 바지 사이즈를 세 치수나 늘려야만 했고, 자꾸만 넓어지는 이마는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그의 키는 빌보와 맞먹을 정도로 작았다. 빌보는 비율만큼은 자신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빌보는 자신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아야만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이 남자가 해밀턴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빌보의 집 앞에 서 있는 이 방문객이, 출판사 직원보다도 더 빌보에게 환영받지 못할 남자라는 것도.


“소린.”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는 빌보를 내려다보며, 남자는 머쓱하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린 오큰쉴드. 그는 원래도 미소를 자연스럽게 짓는 남자는 아니었다. 큰 키와 넓은 어깨, 또렷하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무뚝뚝하고 차가운 태도 때문에, 그의 주변인들은 그의 미소를 쉽사리 볼 수 없었지. 하지만 빌보만큼은 질리도록 그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아주 확연한 과거의 일이었고, 빌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얼굴은 지금처럼 어색하고 머쓱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이야.”


 정확히 6년하고도 1개월. 빌보에게 PTSD를 남겼던 그 결혼식에 바로 이 남자도 함께 있었다. 하객이나 직원의 위치가 아닌, 빌보의 반려자의 위치에서. 도망쳤던 약혼자. 그가 지금 빌보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환영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온 거 보면 부탁할게 있나본데, 용건이 뭐예요.”

 “현관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닌데…. 그렇다고 지금 자네 꼴을 보니 다른 장소에서 이야기를 할만한 상황도 아닌 것 같군.”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소린의 시선에, 빌보는 자신이 지금 어떤 차림새를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목이 늘어난 곰돌이 티셔츠에, 후줄근한 트레이닝 팬츠. 퀭한 눈매와 미친 사람처럼 산발한 머리.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집으로 들어오라고 제의할 법도 했지만, 순순히 그를 자기 집으로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 앞 삼거리에 있는 카페에 가서 기다려요. 씻고 나갈 테니까.”

 “그러지.”

 

 미련하기는. 빌보는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자신의 한심함을 탓했다. 지난 6년간 머릿속으로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그렸었다. 소린이 자신을 찾아온다면 세상에서 가장 냉랭하고 매정하게 그를 내쳐내려고 했었다. 아니면 너 따위는 내 인생에서 아주 상관도 없어졌다는 듯한 여유 있는 미소로 상대하려고 거울을 보면서 수도 없이 연습했건만. 빌어먹을 해밀턴. 차라리 해밀턴이 찾아왔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빌보는 이제는 애꿎은 해밀턴을 탓하며, 부랴부랴 곰돌이 티셔츠를 벗었다. 샤워기로 찬물을 머리에 인정사정없이 적시고 있자 이제 조금 제정신이 드는 듯도 했다.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6년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없던 소린이 대뜸 자신의 집을 방문하다니. 그보다 집 주소는 어떻게 안 거지? 예전에 살던 플랫은 다른 곳이었는데. 그가 할 말이나 부탁이 있다고 해서, 굳이 빌보가 그를 만나러 갈 이유는 조금도 없었지만, 그에 대한 미련이나 분노가 사그라지고 나니 막상 남은 건 호기심이었다. 과연 무슨 이유로 날 찾아왔을까. 물건을 팔거나, 종교를 포교하려는 목적이라면 그 카페에서 자랑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얼굴에 끼얹어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빌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하늘색 체크무늬 남방을 걸쳤다.

 


 미안하다는 사과 같은 걸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는 형식적인 안부 인사도 묻지 않는 이 남자는 역시 여전했다. 빌보가 평소와 달리 노트북도 없이, 훤칠한 동행을 데리고 카페를 찾아온 것이 신기한 듯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단골카페 아르바이트생에게 늘 그렇듯이 우유가 들어간 차가운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소린의 앞에는 미리 시켜둔 따뜻한 허브티가 놓여있었다.


“노인네 취향으로 마시는 건 여전하군요.”

“당신도 애들 입맛인 건 여전하군.”

“애들은 커피 안 마셔요. 그래서, 하려는 부탁이 뭔데요. 피차 별로 오래 얼굴 맞대고 싶은 사이도 아니니까, 얼른 할 말만 하고 헤어집시다.”


 소린이 가타부타 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부탁이 있는 것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그 부탁이 터무니없으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끼얹으려 했건만, 조금 전 다짐도 잊어버리고 아이스커피를 주문한 자신의 경솔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는 빌보였다. 소린은 선뜻 입을 열기 어려운지, 한참을 찻잔만 노려보며 고민했고 그사이 빌보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커피를 빨대로 순식간에 들이켰다. 달그락거리며 얼음을 뒤적이다가, 끝내 인내심이 바닥난 빌보가 신경질적으로 소린을 향해 말했다.


“어려운 부탁인 건 충분히 알겠으니까, 빨리 뭔지나 말하라구요.”

“그러지. 혹시 내 여동생을 기억하나?”


 빌보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소린의 가족관계에 대한 것들을 떠올렸다. 아마도 동생이 둘이 있다고 했지. 남동생과 여동생 각각 하나씩. 그러나 그들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네 마네 유난을 떠는 동안, 가족들은 지중해의 어느 섬인가로 가족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배를 타고 한참이나 들어가야 하는 섬이라 도저히 결혼식 날에는 도착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결혼만큼은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화를 걸어주었다. 아마 그때 빌보와 통화를 했던 게 소린의 여동생이었지.


“전에 통화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름이.. ”

“디스.”

“그런데, 그녀가 왜요?”


 소린은 겨우 여기까지 말문을 열어놓고, 또다시 곤란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빌보가 다시 한 번 신경질을 내려 하기 전에, 다시 소린이 디스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디스한테는 아들이 둘이 있어. 다섯 살, 열 살. 큰애는 필리, 작은애는 킬리라고 하는데.. 필리를 낳고 나서 디스의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었는데, 굳이 또 둘째를 낳았더군.”

“저런.”

“그래서 가족들은 디스를 위해 공기 좋은 섬의 별장에서 지내기로 했고. 지난 6년 동안 섬 밖을 거의 나오지 않았어.”

“그런데요.”


 도대체 그의 여동생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빌보가, 슬슬 인내심이 바닥난 듯 컵에 담긴 얼음을 빨대로 휘저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카페에 대피해있는 동안 해밀턴의 방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다행이지만, 소린의 이야기는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소설가인 게 소린이 아니라 자신이라 다행이라는 것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때 소린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디스가 이번 주말에 조카들을 데리고, 내 집에서 한 달간 머무르겠다고 하더군.”

“당신을 만나러요?”

“응. 그리고 내 배우자도 만나러.”


 달그락거리며 얼음을 휘젓던 빌보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배우자? 이 망할 자식이 결혼을 했단 말인가? 자신의 결혼은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망쳐놓고? 빌보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소린의 얼굴에 얼음을 흩뿌릴 기세로 무섭게 굳어왔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 다시는 이 카페에서 작업을 할 수 없을 테니, 애써 분노를 내리누르며 빌보가 소린을 향해 말했다.


“결혼 축하해요. 그 배우자는 어떤 사람이죠?”

“너야.”


뭐라는 거야. 

빌보는 ‘너’라는 이름을 가진 영국인, 아니 외국인이라도 있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게 아니라면 설마, 자신이라는 건가?


“디스가 당신을 내 배우자로 알고 있다고. 빌보 배긴스.”

“우린 거의 결혼할뻔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결혼한 사이는 결코 아니잖아요?”

“디스는 내가 파혼했다는 사실을 몰라.”


 소린의 말에 빌보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맴돌았다. 정리하자면, 소린의 여동생은 소린이 빌보와 6년 전에 결혼한 줄로 알고 있고, 빌보를 만나러 섬에서 나와 있지도 않은 신혼집을 찾아오겠다 했다고?


“그래서, 뭐 어쩌자구요. 그냥 말하면 되잖아요, 난 6년 전에 결혼하지 않았단다. 왜냐하면, 내가 결혼식장 입구에서 비겁하게 도망쳤기 때문이지.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혼식만을 꿈꾸고 있던 불쌍한 빌보 배긴스를 버려두고 말이야.”

“빌보..”

“설마, 뭐 당신이랑 결혼한 척이라도 해달라고 날 찾아온 건 아니겠죠?”

“......”


 정말인가 보네. 빌보는 뒷골이 강하게 땅겨오는 것을 느끼며, 이럴 바에는 집에서 얌전히 해밀턴의 방문을 기다리는 편이 나았겠다고 열 번쯤 되뇌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해밀턴의 번호를 당장 스팸 번호목록에서 삭제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빌보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하자, 소린이 빌보의 손목을 잡으며 그와 눈을 맞춰왔다.


“디스가 많이 아파.”

“......”

“그 애가 떠나기 전까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그러니 부탁이야 빌보..”


 개자식. 세상에 둘도 없을 호래자식. 자기 여동생은 저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 인간이 내게는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야. 빌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컵에 담겨있던 얼음을 소린의 머리 위로 쏟아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소린의 컵에 담긴 지금은 미지근해진 허브 티까지 얼굴에 끼얹어주었다.


“뻔뻔하기도 하시지. 지금 누굴 찾아와서 그딴 부탁을 하는 거야.”

“빌보..”

“내 이름 부르지 마. 다시는 찾아오지도 말고, 얼굴 비치지도 마.”


 내일부터 새로운 단골 카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빌보는 자신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건네지도 않고 씩씩거리며 카페를 나섰다. 저곳의 브런치는 정말 최고였는데. 아쉽게 되었어. 하지만 어차피 노트북도 고장 나고, 빌보가 쓰던 소설의 파일은 송두리째 사라졌고. 당분간은 카페를 찾아갈 일도 없었다. 이게 다 빌어먹을 해밀턴, 빌어먹을 노트북, 빌어먹을 로맨스드라마 때문이었다.



<계속>


아마 지금까지 연재했던 것 중에 가장 긴 이야기를 쓸 것 같은데,

꾸준히 잘 써보겠습니다.

아이디어 짤 때 도움 준 스킵님 감사합니다:D

 

,